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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늘한여름밤 Jun 14. 2018

사랑하는 것들에 너그러워지기

실수를 하더라도 좀 봐주는 거야. 너에게도, 나에게도.  

 왜 너에게는 별일 아닌 것에도 짜증을 내게 되는 걸까? 어제만 해도 그렇다. 얼핏 생각해보면 너에게 볼 맨 소리 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매주 헬스장에서 PT를 받는데 어제는 너 때문에 늦어서 헐레벌떡 뛰어갔다. 네가 헬스장이 임시공휴일이라고 말한 탓이었다. 나는 혹시 몰라 너에게 헬스장 앞을 지날 때 불이 켜져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달라고 집을 나서는 너에게 부탁도 했었다. 그런데 너는 내 부탁을 새카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덕분에 ‘왜 아직 안 오시냐’는 트레이너 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놀라 집을 나섰다. 헬스장으로 뛰어가는 그 바쁜 새에도 짜증을 못 참고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헬스장 문 열었잖아! 왜 말 안 해줬어!!”.  


씩씩 거리며 운동을 마치고 아까 못한 잔소리를 마저 하려고 핸드폰을 켰더니 메시지가 쪼르르 와있었다. ‘봐줘!! 봐달라고 요구하고 싶어.’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나 사랑하자나 봐줘. 응?’ 이 뻔뻔스럽고 귀여운 요청에 웃음이 먼저 나왔다. 사랑하니까 실수한 걸 봐달라는, 이 치명적으로 사랑스러운 말을 너는 도대체 어떻게 배운 걸까? 



 “좀 봐주라~~”라는 말을 나는 너에게 처음 들었다. “봐달라”라는 말이 무슨 뜻이고 어떤 맥락에서 쓰이는 말인지 머리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표현을 입 밖으로 내뱉는 걸 본 건 네가 처음이었다. 그 때 나는 너의 실수로 화가 나 있는 상태였고, 미안하다는 너의 말에도 분이 다 풀리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자 네가 내 팔을 잡아 흔들며 ‘좀 봐주라’를 시전했던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 애교스러운 콧소리는 내 안에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켰다. 누군가 나에게 화를 낼 때 나의 반응은 보통 두 종류였다. 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화를 내거나, 잘못을 인정하고 침묵하며 용서를 기다리거나. 좀 봐달라며 상대의 너그러움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상상력 밖의 반응이었다. 내 마음은 풀썩 무장 해제 되었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근데 나를 사랑하니까 내 실수를 좀 너그럽게 넘어가 줄 수 있지 않을까?’. “좀 봐달라”는 말을 풀어보면 이럴 것이다. 타인의 실수로 피해를 입을 때 짜증이 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타인이 그냥 아무나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일 때, 우리는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 보려는 수고를 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네가 급한 전화통화를 하느라 헬스장 문 열었는지 확인하는 걸 깜빡 했다고, 나도 그럴 때 있다고 이해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짜증을 내며 타박하는 대신 별 일 아니라고 웃으며 넘어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정도 아량은 배풀 수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한번도 너그러웠던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헬스장에 지각하는 그까짓 일. 그 작은 실수도 나는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 나는 일정을 스케줄러에 기입해놓고 혹여 잊을까 매일 확인하는 사람이다. 약속에 늦거나 스케줄을 착각하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이다. 약속 시간 5분 전에는 도착해있으려 한다. 혹 예상치 못하게 일정이 늦어지면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실수로 지하철을 반대 방향으로 타는 꿈을 악몽으로 꾼다. PT에 지각하는 게 남들한테는 아무 일도 아닌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쿵 내려앉는 일이다. 그러니 나의 “헬스장 문 열었는지 확인해줘.”라는 부탁은 “퇴근할 때 우유 사와 줘.”라는 부탁보다 “자네를 믿고 내 심장을 맡기겠네. 부디 소중히 여겨주게”라는 부탁에 더 가깝다.  

‘나라도 그랬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너의 실수를 용납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혹여 그랬다면 나는 스스로를 쉽게 용서하지 않았을 테니까. 몇 번이고 더 신경 썼어야 했다고, 한 번 더 체크했어야 했다고 나의 부주의함과 안이함을 탓했을 것이다. 나의 실수에 괜찮다고 말해본 적 없는데 어떻게 너의 실수에는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 다그치던 기준들은 너에게로 옮겨간다. 네가 덤벙거리며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에 나는 분개하게 된다. 네가 돈 걱정을 충분히 하지 않는 것에, 치열하게 진로고민을 하지 않는 것에, 나와 한 작은 약속들을 잊어버리고 마는 것에 뱃속에서부터 화가 난다. 너는 뭔데 그렇게 태평스러울 수 있는지, 그렇게 살아도 괜찮았던 너의 삶에 화가 난다. 그 앞에서는 평생 나를 괴롭혀왔던 나의 조바심이 더 한심하게 느껴지니까. 고작 헬스장에 지각하는 걸로 심장이 쿵 내려 앉는 못난 나를 마주해야 하는 게 싫다. 너의 실수로 나의 취약함이 드러나는 순간, 스스로를 가차없이 내려치던 엄격한 회초리로 너를 내려치고 싶어진다.  


 너는 그런 나의 회초리를 막아서고는 말한다. 좀 봐주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박하게 구는 거 아니라고 애살스레 웃는다. 그제야 나는 오래된 악몽에서 깨어나듯 정신이 든다. 맞다. 봐줘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너그러워야 한다. 잘못을 해도 괜찮다고, 별 일 아니라고 다독여줄 수 있어야 한다. 소중한 것들에게는 예외를 허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실수를 하더라도 “좀 봐주라”는 한 마디에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좀 봐달라’는 말을 내 마음 안에서 몇 번이고 굴려본다. 너를 찔렀던 내 마음 속 뾰족한 가지들이 물러진다. 그래 어쩌다 지각하는 일도 있는 거지. 너를 용서했는데 어쩐지 내가 용서 받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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