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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늘한여름밤 Jul 09. 2018

결혼도 방학이 필요해

가끔 너를 떠나 나를 만나고 싶어

 여름방학 기간이다. 대학가에 위치한 우리 동네는 방학을 기점으로 눈에 띄게 한산해졌다. 동네 식당사장님들의 표정은 조금 더 여유로워지고, 학생들의 옷차림은 좀 더 잠옷 같아졌다. 학기 중과 똑같은 공간이지만 방학의 공기가 구석구석 퍼져있는 걸 느낀다. 내 기억 속 여름방학을 더듬어 볼 때면 빗소리가 먼저 들린다. 조용한 방 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었다. 학기 중에는 넓은 캠퍼스에서 온갖 사람들과 부대끼며 많이 웃고 많이 떠들었다면, 방학에는 방 안에 나 혼자였다. 모시이불을 덮은 것처럼 서늘하고 어딘가 허전한 기분이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습한 공기를 훅 들이키면 낯선 냄새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언제부터 내 삶에서 방학은 사라졌다. 계절의 변화에도 나의 일상은 별다를 바 없이 유지된다. 매일 비슷한 일상을 꾸려가는 것은 소중하지만, 조금씩 지치는 일이다. 같은 면만 반복해서 쓰다 보면 삶의 한 귀퉁이가 마모되는 걸 느낀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단번에 달라지던 느낌이 그립다. 내가 익숙했던 것들이 모두 사그라들고 조용한 시간 속에 나 홀로 남겨진 기분을 떠올려 본다. 금방 다시 일상과 재회하리라는 걸 알기에 고독과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시간. 문득 궁금해진다. 왜 결혼은 방학이 없을까?  



 너와 함께하며 나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마음을 맞대고 있다 보면 무르고 삭는 부분이 생기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혼자 생활을 가꾸는 리듬 같은 것. 살뜰히 집안일을 챙기는 너의 노동으로 인해 나의 일상은 윤택하게 유지되고 있다. 냉장고를 열면 먹기 좋게 시즈닝 된 고기가 1인분씩 포장되어 있다. 재활용 쓰레기는 문득 보면 사라져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깨끗한 새 컵들이 정수기 옆에 정리되어 있다. 물론 나도 내 몫의 집안일(빨래와 청소)을 성실하게 해내고 있지만, 오롯이 내 살림을 꾸리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곳에 내 칼과 내 도마가 있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주를 개놓는 삶은 아니다. 내 삶의 절반을 거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아주 든든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내 삶의 절반만 돌보고 있다는 불안함이 스친다. 그까짓 집안일! 나 혼자서도 다 해낼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100% 확신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삶에 네가 들어오며 나를 구성했던 것들은 천천히 희석되고 있다. 내 안의 농도 짙은 외로움과 불안함, 분노가 너의 사랑으로 옅어지는 것은 좋았다. 결핍과 고통이 흐려지며 삶이 한결 편안해진 것도 사실이다. 너와 있으면 태평양에 떠있는 듯 평화롭고 둥실거린다. 별일 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같이 수다를 떠는 평온한 저녁 시간은 내 마음을 물렁하게 만든다.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적당히 괜찮게 느껴진다. 그러나 파스텔톤 세상에서 모든 것은 조금씩 더 흐릿하고 뿌옇다. 내가 나를 채우기 위해 애썼던 시간들이 조금씩 흐려진다. 혼자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어내는 시간,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내 숨소리가 들리던 순간들, 뜬금없이 지하철을 타고 근사한 저녁을 먹으러 신사역으로 가는 길, 문구점에 가 찰흙을 사서 작은 동물들을 만드는 날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남는 시간이 너무나 쉽게 너로 채워지면서, 나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일에 조금씩 게을러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쌉쌀한 외로움을 매달고 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나로 꽉 차서 숨막혔던 세상. 그 속에서 원색으로 날카롭게 빛나던 나를 영영 잃어버린다면, 역시 서운하겠지.   



 너와의 관계를 떠나서 나를 발견하고 싶다. 너는 늘 내 옆에 있다. 물리적으로 옆에 없을 때도 내 옆에 있다. 지난 5년 간 너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나는 때로는 네가 해준 말로, 때로는 너와 나를 비교하며 나를 이해할 때가 많았다. 너의 말에 따르면 나는 너에 비해 정서가 풍부하고, 유쾌하며, 불안정하고, 존경할만한 사람이다. 네가 옆에 없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 지금과 똑같을까? 다르다면 어떤 점이 달라질까? 더 대담해질까? 더 욕을 많이 할까? 더 부지런할까? 마음 속에 네가 없이 혼자서 길을 걷는 내 발걸음이 어떨지 궁금하다. 결혼반지 없이 낯선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를 만나고 싶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어떻게 달라질지 느껴보고 싶다. 그 안에서 내 웃음소리마저 달라질지 모른다.  


 결혼도 방학을 한다면 단출하게 짐을 싸서 강원도로 떠날 것이다. 결혼반지는 빼서 집에 두고. 화려한 원피스는 몇 벌 챙겨서. 깔끔한 방 하나를 빌려 한 달 간 살고 싶다. 낯선 공간을 오직 내 물건들로만 채우고 싶다. 내가 결혼한 걸 모르는(혹은 신경 쓰지 않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나 혼자 장도 보고 냉장고도 채우고, 종량제 봉투도 야무지게 묶어서 내다 놓으면 엄청 뿌듯할 것이다. 그곳에서는 누구의 부인도, 연인도 아닌 오로지 나로만 존재하고 싶다. 그 사람은 혼자 빗소리를 들으며 어떤 표정을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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