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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 Jan 04. 2024

조금만 크롭 하면 안 될까요?

Part 1. 사진 : 광각이 힘든 플레이의 사진 찍는 연대기



   카메라 매거진에서 일한다고 소개하면 종종 사진을 전공했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한 번은 카메라 장비 중고거래로 늦은 밤 서울 송파구에서 경기도 고양시인 우리 집 앞까지 와준 게 고마워서 처치 곤란 악성 재고인 과월 호를 조금 나눠 줬는데,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혹 내가 자신의 동문인지 확인 차 학번을 묻는 이가 있었다. 또 한 번은 카메라 장비 관련 행사에 참여했다가 일전에 협업을 진행했던 다른 브랜드 담당자를 우연히 만나 부스 한쪽 구석에서 사담을 나누면서였다. “그럼 대리님도 사진 전공했어요?” 그럴 리가요.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뿐만 아니라 함께 일했던 동료들도 같은 질문을 받은 기억이 있다고 했다. 심지어 디그다는 돈만 안 낸다 뿐이지 거의 단골손님 같은 질문이라고 했을 정도. 문득 패션지에 종사하는 에디터들도 디자인이나 의류 쪽 전공을 했을지, 구체적으로는 ‘어느 과 졸업했어요?’라는 질문을 받는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나는 사진을 전공한 적이 없고, 대학원에서 영화 연출 관련 수업을 듣긴 했지만 그렇다고 찍는 행위를 누군가에게 정석으로 배운 것도 아니다. 단지 친구들에게 도토리를 구걸하던 싸이월드 시절부터 무언가 끄적이는 것을 좋아해 사진 취향이 꽤나 확고했고(글 두세 줄에 감성적인 사진 하나 첨부하면 그게 또 그렇게 뽀대나그든여), 마침 또 나에게 이 씨 성을 물려준 남자가 어느 날 카메라를 들고 집에 왔을 뿐.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모리스 B 홀브룩*은 인간에게 취향이 형성되는 시기는 평균적으로 23.5세이며, 청소년기에 자주 듣던 음악이 평생 취향으로 굳어진다는 연구를 내놓았다. 이 이론은 단순히 음악뿐만 아니라 영화나 문학, 미술 등 다른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통용되어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인간은 경험을 기반으로 학습하는 사회 동물이니 찰나의 경험이 훗날 직업으로 연결되는 확률 또한 그다지 적지 않을 것이다. 하다못해 우리 가족이 이번 주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보다는 많지 않을까. 나는 하필 그 ‘취향이 형성되는 시기’에 똑딱이라 불리는 디지털카메라를 손에 넣었고, 이왕 카메라가 생겼으니 사진을 찍으러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든 만들고자 했다. 그러다 인과관계가 있는 주위 사람이 아닌 다른 피사체를 조금씩 뷰파인더 안에 담기 시작했고, 요즘은 픽쳐 프로파일*, 필름 시뮬레이션* 등 브랜드마다 불리는 기능상의 명칭이 조금씩 다르지만, 홍콩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할 법한 무드와 흡사한 텅스텐과 4:3 비율의 무성 영화를 닮은 흑백과 같은 그 당시의 ‘필터 모드’를 자주 적용해 사진을 찍었다. 그때 담아낸 사진들 속 피사체는 뚜렷했지만 전체적인 배경은 선연하지 않고 무엇이라 형언하기엔 어려운 흐리멍텅한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20년 전의 나는 어설프게나마 사울 레이터*를 표방하는 중2병 걸린 청소년 같았달까. 와 오늘 밤 자다가 생각나면 이불킥 각이다.







   그 사이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다. 성장해 가며 겪은 일들을 회고록으로 정리한다면 얼추 두꺼운 양장본 박스 세트가 될 터인데 우습게도 한 번 뿌리내린 취향은 해안가 절벽에 자리 잡은 소나무에 가깝다. 매서운 너울에도 끄덕 없는. 메인으로 쓰던 카메라 바디를 여러 번 바꿨고, 상황에 따른 보정 스타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습득했고, 심도가 한 20%쯤 더 얕아진 것 빼고는 전체적인 구도나 느낌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러 가지 부캐가 주목받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듯 특정 취향을 품고 사는 것은 쌍수 들고 환영받을 일이 아닌가! SNS 상에서 주목받는 작가들의 사진도 컨셉이 확실한 류가 대다수인지라 나 역시도 그득한 취향이 느껴지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게 실이 되진 않았다.






   그런데 몇 달 전, 이 소나무 수액 때문에 멘탈이 다 흔들리는 사건을 겪었다. 엔데믹을 눈앞에 두고 많은 브랜드들이 팸투어 식의 출사 이벤트를 열기 시작했는데, 평소 흠모하던 모 브랜드에서 1박 2일 일정으로 촬영 프로젝트 공지가 뜬 것이다. 부랴부랴 가지고 있던 포트폴리오 디자인을 해당 브랜드 입맛에 충족시킬 모양새로 전면 수정했고, 브런치스토리에 전국 지역 출사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어 사진 촬영은 물론 원고를 써낼 수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부각시켰다. 나는 이번 프로젝트에 다 걸었고, 꼭 함께 하고 싶다는 집..착 아니 집념을 담당자가 느낄 수 있게 마지막 장에 출사지에서 만나자는 일종의 킬링 문구도 공지문에 있는 색감을 그대로 따서 넣었다. 일주일을 꼬박 작업 한 덕분인지, 계획대로 최종 선발 명단에 합류할 수 있었다. tmi지만 입사 지원서처럼 공모 포트폴리오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원하는지 그 욕구의 척도를 녹여내는 것이 중요하고 나는 그런 걸 매우 잘 하..


그대들은 초록색을 좋아하잖아요?(후훗)



   출사회를 떠나기 전 출산이 임박한 그다를 만나 합격 소식을 전했다. 디그다는 이번 출사회가 해당 지역 관광공사와 함께하는 프로젝트인듯하니 아마도 시티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광각 구도의 사진을 찍는 게 핵심이 될 거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카탈로그스러운, 주로 공모전에서 입상하는 그런 사진들 말이다. 응. 언니 나 그거 뭔지 알아. 아이가릿.



   대망의 출사회 당일. 제습함에서 고이 주무시던 13mm 광각렌즈를 챙겼고 주말x관광지에 몰릴 인파를 감안해 표준 화각의 줌렌즈도 챙겼다. 전쟁에 총알 장전을 빼놓을 수 없으니 여분 메모리와 배터리도 두둑하게 챙겼다. 집결지에 도착해서 여정을 함께 하게 된 다른 작가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버스는 출사지로 출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에 촬영 계획은 부족할 것 없는 성공 그 자체였다.






“잘하고 있지?”

“Aㅏ.. 나 망한 것 같아..”

남편의 카톡에 다 식어서 김 빠진 콜라처럼 미적지근한 답장을 뒤늦게서야 보냈다. 정해 준 포인트에 도착해 식사 후 본격적인 촬영을 하는데 이상하게 뷰파인더 너머로 보이는 상을 볼 때마다 속이 답답하게 울렁거렸다. 내가 쓰던 바디가 아니라 그런 것도 아니다. 브랜드로부터 촬영용으로 지급받은 카메라는 내가 메인으로 쓰던 바디의 한 단계 후속작이었지만 외형상 달라진 것이 거의 없고 센서나 기능면에선 오히려 월등히 좋아진 모델이었다. 이 좋은 걸 손에 들고 지금 한숨을 쉬다니. 화각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처음 해보는 관광지 촬영도 아닌데 뭐가 문제인지 이상하게 찍은 결과물을 확인할 때마다 ‘이게 아닌데..’라는 혼잣말이 나왔다. 혹시 점심 먹은 게 체한 건가? 그도 아니면 머리가 아픈가? 오늘이 며칠이었더라? 나 화장실 못 갔나? 장소를 옮길 때마다 아리송한 갑갑함은 더해갔다. 그러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찍긴 찍어야 하니 뭐가 되든 되겠지 하며 결국 이 골목 저 슈퍼 앞 가릴 것 없이 셔터를 남발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상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다. 메인으로 정해진 촬영은 야경이었고 깨끗한 야경을 촬영하려면 가시거리 확보가 중요해서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어야 하는데, 낮 동안 쨍하다 못해 녹아내릴 듯 이글대던 하늘에 갑자기 스모그가 가득 찼다. 근처가 바다인지라 해무가 잘 나타나는 동네라는데 왜 때문에 하필 그날이 오늘이란다. 내 마음을 읽었어 하늘?


야경 촬영 시작하기 전 호텔에서 찍은 바깥 기상 상황... 제대로 망했다 싶었다





광각 축에도 못 끼는 13mm(환산화각 19.5mm)
그나마 이게 최선이었다



   현장에서 밤늦게까지 해무가 걷히기를 바라다 조금이라도 나은 포인트를 찾으려고 이곳저곳을 이동해 찍어봤지만 한계였다. 다른 작가들은 맑은 날 한 번 더 와야지, 이거 영 안 되겠다며 계획 노선을 변경하는 듯 보였고, 나는 오늘 당장 내놓아야 하는 촬영은 아니니까 어떻게든 후보정으로 비벼보자며 호텔로 들어갔다. 그래도 새벽즈음엔 걷히지 않을까 30분 간격으로 창밖을 내다봤지만 소용없었다. 낮부터 이어진 이유 모를 답답함의 원인을 끝내 찾지 못한 채, ‘해무가 잘못했네..’라는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며 아침 녘에 겨우 잠을 청했다.





   찜찜한 기분을 뒤로하고 며칠이 흘렀을까. 집 근처 카페에서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면서 아아악! 하고 무릎을 탁 치는 일이 생겼다. 촬영한 사진들 중 그나마 나은 것을 어렵게 셀렉하고 보정을 한 뒤 함께 보낼 원고를 쓰다 머리가 안 돌아가서 잠시 쉬어야겠다고 나온 것인데, 기분 전환 삼아 휴대폰 배경화면이나 바꿔볼까 싶어 셀렉 한 사진들 중 몇 장을 적용해 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속이 다 편안....



   그제서야 알았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프레임 안에 주요 피사체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이 드러나는 걸 유독 못 견뎌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럼 내가 좁아터진 화각을 좋아했었단 말이야? 참나. 출사지에서 나를 쩔쩔 메게 했던 원인이 겨우 이것인 게 어이가 없어서 최근 몇 달간 SNS에 업로드했던 사진들을 훑어보니 가로 구도보다는 세로 구도의 사진이 더 많았고, 광각 구도의 사진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가 힘들었다. 맙소사.. 설마 설마 싶어서 처음 사진을 시작했던 N년 전의 파일까지 다 뒤져봤는데 이놈의 취향은 소나무가 곧다 못해 수액이 아주 넘쳐흐르고 있었다. 간간이 취재 의뢰를 받아 촬영을 진행했던 행사 건을 제외하고는 전부 크게 다르지 않은 꼴을 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내가 좁은 화각을 선호했구나..


ⓒSaul Leiter   당신 마음속의 사울 레이터는 광각을 찍지 않아


이미지 출처: TVN 방구석 1열 26화   시네마스코프는 미술팀도 힘들대요. 보는 나도 힘들어?





   비척비척 집으로 돌아와 이미 보정까지 다 끝낸 파일을 다시 불러왔다. 크롭을 했다가, 언두를 눌렀다가, 아니야 그래도 참아봐. 다시 또 크롭을 했다가. 몇 번째 인지 모를 무한 반복의 굴레 속에 뻥 하고 터질 것 같은 욕구를 겨우겨우 억누르며 최종본을 첨부한 메일의 전송 버튼을 눌렀다. 아마도 담당자분은 내 스스로 가둔 이 처참한 마음을 모를 테지.



아아, 조금만.. 조금만 자르고 싶다..!!!!!!





* 모리스 B 홀브룩: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콜럼비아대학교 교수로 마케팅 분야에서 숱하게 회자되는 인물. 소비자 심리학에 대해 주로 연구
* 픽처 프로파일: S사 카메라 바디에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필터에 세부적인 색감이나 질감 등을 유저가 취향에 따라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기능
* 필름 시뮬레이션: F사 카메라 바디에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필터에 세부적인 색감이나 질감 등을 유저가 취향에 따라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기능
*사울 레이터: 영화 <캐롤>(2021)의 모티브가 된 미국의 사진작가(1923~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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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에디터와 번역가, 남에게 취향을 팔기보단 매번 본인이 사기만 하는 전직 마케터가 풀어내는 디깅의, 디깅에 의한, 디깅을 위한 에세이. 디깅을 처음 시작하는 분, 다수가 인정하는 프로 덕질러, 이 장르 저 장르 최애는 없고 차애만 가득한 우리 옆집 사는 분까지 두루두루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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