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의 글쓰기 노트 15

장르별 글쓰기-문학, 수필

by 이란

수필가 피천득 선생님은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예술가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겸허하게 한 표현에 대해 독자가 자신의 입장과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은 곡해이기 때문입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표현의 정갈함이나 사고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 글을 쓰기 위해 그가 거쳤을 일련의 과정들이 하나씩 스칩니다. 보통 사람들의 수준을 뛰어넘는 독서와 습작이 그 과정에 포함됩니다. 무엇보다 그분은 이미 등단이라는 과정을 통해 대중의 인지도가 형성되기 전에 문단에서 필력을 인정받은 분입니다. 피천득 선생님이 자신의 입장에서 수필에 대해 했던 겸허한 표현을 일반인이 자신의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관점에서 수필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그 이해를 돕기 위해 일기와 비교하고자 합니다. 일기와 수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두 분야 모두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작성될 수 있습니다. 시간 순서대로 그 날의 일을 쓸 수 있고 옛 추억을 끌어와 쓸 수도 있습니다. 별다른 차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늘 10년 전의 기억이 떠올라 일기에 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분야에는 매우 명확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독자의 존재 유무입니다. 일기는 기본적으로 독자가 필자 자신입니다. 하지만 수필은 대중이라는 독자를 대상으로 합니다. 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쓴 글'은 일기에 가깝습니다. 수필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을 갖고 필자가 써내려 간 글입니다. 쉽게 집에서 만든 음식과 레스토랑에서 만든 음식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갈한 문장으로 수준 높은 일기를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글 안에 내면적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글은 어디까지나 필자 자신을 위한 글입니다. 수필은 그 단계를 반드시 뛰어넘어야만 합니다. 공자는 '70세에 마음가는 대로 행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범인이 아닌 성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예술가인 백남준 선생님의 '예술은 사기다'라는 표현에 대해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은 미술을 공부한 분으로서 자신의 분야에서 그만의 세계를 구축한 예술가입니다. 그가 예술에 대해 고뇌하며 내놓은 작품들에 대해 했던 표현을 일반인이 쉽게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러한 단어에 닿을 만큼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이 완벽주의자가 했던 말을 표현만 그대로 가져오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인에게 수필은 결코 붓 가는 대로 쓴 글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독과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우러나오는 삶의 정수와도 같습니다. 그 글을 읽는 사람의 영혼을 흔드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세이스트는 어쩌면 철학자와도 닮아 있습니다. 매일 스치는 일상을 시간에 따라 흘러 보내지 않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색의 결과물이 수필입니다. 독자는 수필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한 잔의 차를 마시듯 쉼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에세이는 필자의 주변의 무엇이든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 할 수도 있고 음악이나 인간관계에 대해 다룰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단지 그것을 무분별하게 나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좋다 싫다는 감상은 감상문이지 수필이 아닙니다. 사색이라는 여과를 거치지 않은 경험은 일기입니다. 대개의 일상은 일로서 채워지고 그 일은 생산입니다. 누군가는 나의 일을 소비합니다. 예술의 영역이 조금 독특한 것은 생산자가 예술가이고 창작의 영역은 인간의 영혼에 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인생'이라는 2007년도의 영화를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보았습니다. 인생의 가치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받았는가가 아닌 주었는가로 평가되어야만 한다는 영화의 주제 의식에 따른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인 마츠코의 인생은 꽤 의미있을 수도 있을 듯 합니다. 그의 주변 사람 중 몇몇은 그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녀의 남동생은 주인공에 대해 '시시한 인생'이라고 아주 객관적으로 평가합니다. 누군가에게 주기만 하다가 너덜너덜해진 마츠코의 인생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받기만 했던 류라는 남자는 그녀를 신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신은 거대해진 체구를 비웃는 중학생들에게 야구 배트로 두둘겨 맞고 죽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신이고 다른 모든 이에게는 의미 없는 한 여자의 인생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 그녀를 아꼈던 마츠코의 친구는 그녀에게 류를 사랑하면 안된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마츠코는 지옥이라도 그와 함께 가겠다고 했습니다. 자기애마저 버린 그 사랑은 그녀를 결국 자기파괴로 몰고갑니다. 그녀는 신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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