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기증을 신청하며
태어나는 것은 자기 의지에 따른 선택이 아니다. 어쩌면 죽음도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죽음이 존재한다. 자연스럽게는 노환으로 사망할 수 있지만, 전쟁이나 기아로 어린 생명이 사라지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지금 삶의 중반부에 닿아 있다. 학창 시절에는 시인 김소월처럼 요절하는 것이 아주 멋있게 보이기도 했다.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죽음은 고통스런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서 아름답게 그려지기도 한다. 천주교 신자로서 견진성사까지 받았던 나로서는 자살이 종교적으로 지양되는 자세임을 알고 있다. 이르게 꺾이는 꽃처럼 자신의 선택과 상관 없이 꺼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생명이지만, 주어진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 하는 것이 종교적인 의무이다. 냉담 중인 나로서는 무엇이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나에게 신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죽음 그 자체를 선택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선택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장기기증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어렸을 때도 장기기증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무언가 두려웠다. 나는 메스에 대한 공포가 있다. 이 공포는 깊고 오래된 것이서 어렸을 때 의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직업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피를 보면 현기증이 일고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는 두려움이 있는데 어떻게 냉철하게 환자를 대할 수 있을 것인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개나 고양이 등 동물을 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친구와도 손 잡는 것 이상의 스킨십을 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타인의 몸을 만져야 하는 의사라는 직업은 인간의 생명을 대하는 중요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하고 싶지 않은 일에 해당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이 공포를 뛰어넘게 되었다. 장기기증은 내가 나의 몸을 의식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생명이 누군가의 꺼져가는 생명을 다시 살릴 수 있다면 화장되거나 흙으로 돌아가는 일련의 과정보다 더 나을 것이란 결론에 닿은 것이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반가워하지는 않으신다. 그럼에도 나는 용기를 내어 내 의지를 설명하고 주민등록증에 장기기증 스티커를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