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아그라에서 오르톨랑까지

by 이란

유난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까다로운 취향이 멋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차이가 곧 잘 상대를 다치게 하기 때문이다. 건강 상의 이유로 채식을 하고 난 후의 일이었다. 함께 식사를 한 친구와 선생님의 반응은 호의적이었으나 당황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모두 다 먹는 음식을 앞에 두고 혼자 돌연 먹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맛의 즐거움은 삶의 한 부분을 밝힌다고 믿어왔다. 그 기억은 일 때문에 밖에 머무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먹던 어린시절의 과자부터 하교 후 친구와 먹던 초등학교 앞의 떡볶이에까지 닿아있다. 가끔 그 기억이 주는 따스한 온기를 따라 과자나 떡볶이를 먹곤 한다. 화려한 곳에서 최고의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도 인생에서 경험해볼만한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태어나는 모든 것은 결국 소멸한다. 그래서 채식을 고집하지 않았던 것이다. 꽃이 피고 지듯 동물도 태어나고 죽는다.


채식을 두고 이야기가 많다. 건강 상으로 유익하다는 이야기부터 극단의 채식으로 건강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존재한다. 채식을 하는 사람들도 다양해서 누구는 생선을 먹고 다른 누구는 우유나 달걀까지 먹는다. 채식을 권하는 의사의 소견으로는 육류, 생선, 우유와 달걀까지 식단에서 배제하는 비건이 좋다고 한다. 대신 그 자리에 다른 가공식품이 채워져서는 안된다. 신선한 채소로 채워져야 한다. 체중은 칼로리를 잘 계산하면 관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건강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주변에 지인이 겪는 건강 상의 문제들이 결국 생활습관이나 식습관에서 결정된다면 충분히 고려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걀과 유제품까지 제외하고 나니 밖에서 먹을 음식이 거의 없었다. 야채의 드레싱까지 헤어려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고기의 잡내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육식을 식단에서 제외하는 것은 쉬웠다. 디저트가 문제였다. 완전채식의 비건이 목표였던 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또 다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생명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삶의 질은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미식가의 찬사를 받던 푸아그라와 오르톨랑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음식의 가치가 아니라 생명의 존엄성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미각을 극도로 끌어올리기 위해 거위와 멧새가 거치는 일련의 과정은 매우 잔인하다. 만물의 영장은 모든 동물 위에 군림하며 먹이사슬의 끝에서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권력이 자연에 가하는 파괴는 매우 폭력적이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의 끝에 어떠한 철학이 있다면 그런 의미에 닿아 있다.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는다. 또는 고통을 가해 죽게 하지 않는다. 달걀이나 우유는 닭이나 소로부터 자연스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 과정도 상업적 목적을 위해 공장식으로 관리될 수 있다. 한편, 푸아그라 역시 겨울이 끝나고 먼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스스로 먹이를 많이 먹어 간에 지방이 많아질 때 잡은 경우, 가격이 매우 고가라고 한다. 사육장에서 강제 투입되는 먹이를 먹지 않기 위해 날개와 목이 상한 채로 병든 거위의 간을 먹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돈을 지불하면 누군가 그 과정을 대신해 주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도축을 하는 사람은 결국 돈 때문에 그 일을 한다.


오르톨랑의 맛이 얼마나 훌륭한지 서식하는 멧새의 개체수가 큰 폭으로 급감하였고 조리방식 역시 잔인하다는 문제가 있어서 프랑스에서 오르톨랑은 금지되었다. 멧새는 어두우면 시간 관념을 상실한 채 계속 먹는다. 그런 이유로 사냥꾼은 멧새를 잡아 눈을 뽑는다. 그리고 어두운 곳에 가두고 음식만을 준다. 그렇게 살을 찌워 브랜디에 익사시킨다. 그 과정에서 새의 작은 몸 속 가득 브랜디가 스민다. 그 상태로 털을 뽑아 조리한다. 멧새는 참새처럼 매우 작다. 한 입에 넣어 뼈까지 씹어 먹는다고 한다. 그 고통이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데 동물의 권리까지 챙겨줄 여유는 없을 것이다. 아무런 이권도 상관 없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잔인해질 수 있는 인간의 단면을 본다. 정육점 앞에서 고기를 팔지 말라고 시위하는 채주식주의자는 지금의 나도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태어나고 죽는 가축의 삶의 여정을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인간의 인권이 그 동물만큼 잘 갖춰져 있는지부터 헤아려야 할 것 같다. 삶은 완벽하지 않다. 그 속에서 어떤 삶을 살지 선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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