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들끼리 화내기엔 인생이 너무 짧지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2020
감독: 그레타 거윅
출연: 시얼샤 로넌, 플로렌스 휴, 엠마 왓슨, 앨리사 스캔런, 티모시 살라메
동생과 싸웠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조용한 주택가에서 중년 여자 둘이 언성을 높였다. 이런 빅매치는 거의 20년 만이던가. 10분 전까지만 해도 와인을 나눠마시며 깔깔대고 있었는데, 나의 한 마디에 웃음기가 사라진 동생이 쌩하니 식당을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얼떨떨하다 정신을 차리고 동생 뒤를 따라나섰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 달의 행복 타임이 될 줄 알았는데. 맛있는 밥 먹고 왜 그랬을까.
어떻게든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동생과 불편한 시간이 길어지지 않았으면 했다. 큰 키에 걸음도 어찌나 빠른지, 이미 저만치 멀어진 동생을 뛰다시피 쫓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버리기 직전 어깨를 잡았다. 술기운에 벌어진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나길 바라며 웃었다. 같이 가자고, 왜 그렇게 화를 내냐고, 옆구리를 찌르며 장난을 걸어보았다. 기대와 달리 동생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고,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2차전이 시작됐다.
나는 딸만 둘인 집의 맏이다. 어릴 땐 동생과 한 이불속에 잠들고, 옷과 인형을 공유하고, 나란히 붙여놓은 책상에 앉아 숙제를 했다. 두 살 터울인 우리는 친구처럼 자랐지만, 살벌하게 싸우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옷을 누가 먼저 입나, 학용품과 장난감을 어디 뒀나, 시끄럽다, 얄밉다, 짜증 난다, 싸움이 일어나는 레퍼토리는 매일 다채롭고 끝이 없었다. 온몸이 울리도록 등짝 스매싱을 날리고, 꼬집고, 머리채를 잡았다. 공부 안 한고 딴짓을 해서 엄마한테 혼나고 있을 때, '엄마, 나 숙제 다 했어~' 하며 동생은 염장을 질렀다. 나는 친구 집까지 따라오는 동생이 귀찮아서 도망쳐버리기도 했다. 울며불며 뛰어오는 동생을 모르는 척하고서.
비슷한 장면이 영화 <작은 아씨들>에 등장한다. 조가 옆집 로리와 스케이트를 타러 갈 때, 에이미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선다. 에이미는 조만 바라보는 로리를 남몰래 짝사랑한다. 얼어붙은 호수 위를 멀리서 따라오는 에이미를 조는 외면한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모른 척한다. 작가의 꿈을 키우는 조가 소중히 간직해 온 원고를 에이미가 불태워버린 후, 조의 마음은 단단히 얼어붙었다. 설마 했는데 두꺼워 보이던 얼음이 깨져버리고, 에이미가 겨울 호수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1994년에 나온 <작은 아씨들>은 크리스마스에 보고 싶은 따뜻한 가족 영화다. 19세기 미국을 배경으로 매그, 조, 베스, 에이미, 네 자매의 꿈과 성장,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레타 거윅이 연출한 2020년 영화 <작은 아씨들>에는 성인이 된 자매들의 이야기, 특히 둘째 조와 막내 에이미의 관계가 좀 더 부각된다. 의젓한 장녀 매그, 따뜻한 셋째 베스와 달리, 조와 에이미는 고집 센 성격으로 사사건건 부딪힌다.
"아무튼 힘든 일 빠져나가는 건 알아줘야 해."
(베스의 간병을 위해 돌아온 조가 에이미 뒷담을 한다.)
"나 원래 그랬어(현명했어). 단점만 봤으니 몰랐던 거지."
(언제부터 이렇게 현명했냐며 놀라는 조에게 에이미가 하는 말.)
아들러(Alfred Adler)는 '한 가족의 아이들이 같은 환경에서 성장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출생 순위에 따라 아이의 심리적 환경은 다르다'라고 했다. 또 출생 순위가 성장하여 세상에 적응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아들러에 따르면 첫째는 보통 의젓하고 성실하다. 둘째는 이미 앞선 형제가 있기에 늘 경쟁심을 느끼고 주장이 강하다. 가운데 아이는 집안의 중재자 역할을 맡기도 하고, 넷 중 셋째는 순하고 사교적이며 첫째처럼 의젓할 때도 있다. 막내는 늘 관심을 받으며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경향이 있다. 외동아이는 성취동기가 높지만 의존적이고 협동할 줄 모른다. (참고: '심리상담과 치료의 이론과 실제', Gerald Corey)
아이가 하나 둘 뿐인 요즘, 출생순위 개념은 아들러 시대와 조금 달라졌을지 모른다. 가급적 큰 아이, 작은 아이 차이 없이 공평하게 키우려 애쓰는 부모들이 많다. 그럼에도 부모 노릇을 처음 하는 첫째 때와, 여유가 생긴 후 태어난 막내를 대할 때 부모의 태도는 다르다. 아이가 태어나는 시기마다 부모의 정서적 안정성, 경제적 여건, 주변 환경, 부부 관계 등이 변하기도 한다.
(이미지_2020.02.28, SBS 뉴스 기사 중에서)
막내 에이미는 꿈도 욕심도 많지만, 자매들 중 가장 현실적이다. 대고모의 후원으로 유럽에서 그림 공부를 하지만, 천재가 아님을 깨닫고 '다른 재능을 갈고닦아 사교계의 장식품이 되겠다'라고 선언한다. 에이미와 달리 조는 어릴 때부터 준비해 온 작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집을 떠나 홀로 도시에서 글을 쓰며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도 돕는다.
자매는 각자 바라는 길을 가지만, 유년 시절이 끝나고 마주하는 세상은 녹록지 않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한다. 내가 놓친(혹은 놓아버린) 기회가 다른 이에게 날아가는 걸 볼 때 속이 쓰리다. 가장 가까운 자매가 그 당사자라면 마음은 더욱 복잡하다. 함께 기쁘기도 하지만, 남몰래 서글프기도 하다.
자매는 인생 첫 라이벌, 가장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관계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부모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물질적 자원을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의무와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 그게 힘이 되기도, 원망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공평'이란 화두는 자매 사이에 잠복한 갈등의 씨앗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자매가 나의 행복과 불행을 재단할 기준이 되기도 한다. '왜 너만', '왜 나만'. 어릴 때는 대놓고 싸우지만, 어른이 되면 입 밖으로 꺼내기도 어렵다. 속마음은 여전할 때가 있다 해도.
조의 원고를 에이미가 불태웠을 때, 에이미가 얼음 호수에 빠졌을 때, 둘 사이에 돌이키기 힘든 균열이 생길 뻔했다. 내 성격은 왜 이 모양일까, 자책하는 조에게 엄마가 말한다. 너는 나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매일 화가 나는 걸 다스리려고 엄마도 40년 간 노력했다고.
자매들의 부모는 가난한 살림에 네 딸을 따뜻하게 돌보며, 어려운 이웃들까지 살핀다. 자매들은 갈등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보듬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들은 서로에게 돌아가는 길을 찾는다.
'여자 형제들은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든지 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든지 둘 중 하나다.'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소설 <삶의 한가운데>의 첫 문장이다.
자매를 잘 안다고 믿기에 오히려 모를 수 있다. 서로에 대해 궁금해 본 적 조차 없을지도. 말 안 해도 알아야지 기대하지만, 독심술이 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가까운 사이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자매는 가장 좋은 친구가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로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부릴 수 있다. 내가 행복할 때 어떤 얼굴이 되는지, 두려울 때 어디로 숨는지 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잘 알 때도 있다.
생계를 위해 통속 소설을 쓰며 자신감을 잃은 조에게 에이미가 한 마디 한다.
"가족이 티격태격하고 웃고 하는 이야기를 누가 읽겠어? 중요할 것도 없는 얘기잖아." (조)
"그런 글들을 안 쓰니까 안 중요해 보이는 거지. 계속 써야 중요해지는 거야." (에이미)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 데는 정성이 필요하다. 가족이라도 예외는 없다. 먼저 연락하고, 자주 물어보고, 가끔은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균형도 맞아야 하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애쓰는 관계는 언젠가 쓰러져버릴 고장 난 상다리 같다.
다음 날 동생에게 장문의 카톡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동생도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돌아보았다고 한다. 미처 헤아리지 못한 너의 마음, 알아차리지 못한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동생과 함께 하려고 궁리하는 재미난 일이 많다. 분위기 좋은 맥주집과 퓨전 일식당, 사전 예매해 둔 전시회들, 언젠가를 꿈꾸는 유럽의 미술관과 수도원 여행도. 자매 통장 금액을 늘려야 하려나.
조가 하는 말처럼 "자매들끼리 화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