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당신은 좋은 사람이군요

by 상담사 이경애

타인의 삶 (The Lives of Others) 2007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출연: 울리히 뮤흐, 세바스티안 코치, 마르티나 게덱


오래전 상담실에서 만난 기태 씨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기태씨의 마음속엔 중학교 시절 담임교사의 한 마디가 남아 있었다. (기태는 이름은 가명이며, 누구의 이야기인지 알 수 없도록 내용을 각색했다.)


'넌 눈빛이 안 좋아. 나중에 잘 되나 어디 두고 보자'.


당시 기태씨는 소위 '노는 친구'들과 어울려 수업을 소홀히 하고, 점심시간이면 학교 밖으로 탈출해 군것질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보다. 교사의 훈계가 길어지고, 손바닥을 맞고, 부모님까지 불려 오게 되자 기태씨는 짜증이 났다. 반성보다는 반항의 태도가 드러났는지 모른다.


눈빛이 안 좋다는 말은 전에 들은 어떤 꾸지람과도 달랐다. 자신의 내면에 어둡고 사악한 무언가가 있고, 교사 그걸 꿰뚫어 본 것만 같았다.

기태씨는 다른 사람 눈을 마주 보가 힘들어졌다. 특히 나이 많은 사람과 대화할 때면 어디를 봐야 할지 몰랐다. 대화할 때 당당하게 시선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고 했다. 사람이 정말 달라질 수 있느냐고 물었다.




2007년 개봉한 독일 영화 <타인의 삶>은 달라도 너무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남자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극작가 드라이만과 비밀경찰 비즐러.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마주칠 일도 없었을 모르지만, 통일 전 동독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정부의 감 대상이었다.

드라이만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그려낸 작품으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 극작가다. 드라이만을 못마땅해하는 정부 고위 간부가 어떻게든 드라이만의 꼬투리를 잡아내려 한다. 그는 드라이만의 연인이자 배우인 크리스타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


유능한 비밀경찰 비즐러가 드라이만의 집에 감청 장를 설치해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는 임무를 맡다. 효과적인 수사를 위해 인간의 약점을 파고드는 비즐러는 심문 기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경찰대학 교수이기도 하다.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데 한치의 흔들림 없는 그를 사람들은 두려워하면도 경멸한다.


비즐러는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일상을 24시간 엿듣다. 작가와 배우로, 또 연인으로 두 사람은 함께다. 를 읽고, 음악을 듣고, 파티를 다. 그들을 아끼는 친구 팬들이 있고, 그들 또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본다. 두 사람을 통해 비즐러는 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의 아름다움- 사랑, 우정, 그리고 예술을 한다.


즐러는 그동안 일하면서 수사 대상에게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수사 방향에 맞춰 필요한 사실만 알아내면 만이었다. 그런데 드라이만과 크리스타 일거수일투족을 켜보 동안 그들이 궁금해지고, 남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의 갈등과 위기에 마음을 졸인다.

알면 더 이상 남일 수 없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도 비슷한 설정이 있다. 돈 되는 일이라면 엇이든 는 지안이 사내 정치에 휘말린 아저씨 동훈을 불법 도청한다. 그의 약점을 캐내어 모함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일이지만, 동훈을 알게 면서 상처를 입힐 수 없다. 동훈은 그동안 지안이 만났던 사람들과 르다. 지안의 척박한 삶에 연민을 느며 동훈은 말한다.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



<타인의 삶>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여러 번 장한다. 한 번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서 만난 아이가 천진하게 비즐러에게 묻는다. 아저씨 정말 비밀경찰이냐며, 비밀경찰은 나쁜 사람이라고 아빠의 말을 전한다. 분이 상한 비즐러는 이름을 는다. 예전의 비즐러라면 이름을 알아내 '나쁜 사람'이라는 이 아빠의 말을 증명해 주었을 이다. 그러나 비즐러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내가 궁금한 건 네가 들고 있는 공의 이름이라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얼버무다.

비즐러는 더 이상 나쁜 사람로 살 수 없다.


그토록 냉혹하던 비즐러는 왜 드라이만에게 흔들렸을까. 사랑받고 성공한 예술가 드라이만은 동년배인 비즐러가 호기심을 느낄 만한 매력적인 인물이다.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 갈등하고 타협하는 모습에 공감되기도 간다. 서로를 이해하고 아끼는 크리스타와의 사랑도, 친구들과의 따뜻한 우정도 비즐러에겐 없는 것들이다.

또한 드라이만의 삶에는 예술이 있다. 라이만을 만나 비즐러는 처음으로 문학과 음악에 관심이 생겼을 것이다. 에는 증오와, 공포, 고통 외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그 아름다움을 나누며 사람들은 살아간다는 것을 비즐러는 알게 됐다.


존경하던 선배를 잃고 비탄에 잠긴 드라이만이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라는 피아노곡을 연주하는 장면이 있다. 드라이만의 연주를 듣던 비즐러가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연주를 마친 드라이만 크리스타에게 말한다.


"이 곡을 듣고도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비즐러는 언제부터 '나쁜 사람'이었을까. 영화에서 자세한 사연이 러나진 없지만, 그도 나쁜 사람이 되려던 건 아니었을 거다. 국가에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 감정을 배제하고 직이 원하는 성과를 내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뛰어난 수사관 비즐러' 외에 다른 정체성, 다른 보람은 없었다. 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함께 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즐러는 외로운 사람이다. 마음을 터놓고 친밀하게 지내는 친구도 가족도 없다. 그에게는 일 뿐이다. 비밀경찰로 일하면서 사람들은 그에게 두려움과 혐오를, 관심을 보인다. 마음만 먹으면 타인의 운명을 쥐락펴락 할 수 있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에 임박한 위기를 알고 있는 비즐러는 더 이상 만히 지켜볼 수 없다. 렁각시처럼 은밀하게 도우며 두 사람의 삶에 여한다.

배우와 팬 사이로 우연히(!) 비즐러를 만 이야기를 나눈 크리스타는 말한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군요."


누군들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고 싶을까. <나의 아저씨>에서 지안이 동훈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거칠고 무례해 보이지만 실은 가난과 폭력 속에 병든 할머니를 시는 어린 가장이라는 걸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라면. 따뜻하고 책임감 있는 어른을 만나지 못했다면.


"만남은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고 세상으로 향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만남이 지니는 힘과 신비로움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나는 나 자신과 만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고 타인과의 만남을 필요로 한다." (샤를 페팽, "만남이라는 모험" 중에서)




우리는 나 자신 그리고 타인을 '어떤 사람'이라는 말로 설명하려 한다. 내향적인 사람, 명랑한 사람, 신중한 사람, 대범한 사람, 다정한 사람, 차가운 사람 등.

심리학에서는 '심리 검사'를 통해 성격 특성을 이해하고자 한다. 상담실에서 사용하는 성격 검사 중 TCI (Temperament and Character Inventory, 기질 및 성격 검사)가 있다. 선천적인 영역인 기질(Temperament)과,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성격(Character)을 통해 포괄적으로 한 사람을 이해하려는 검사다.

TCI 척도 중에 대인 관계 특성을 예측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다. 기질 척도 중 '사회적 민감성(Reward Dependence)' 그리고 성격 척도 중 '연대감(Coorperativeness)'이다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역인 '사회적 민감성'이 높을수록 감수성이 풍부하고,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따뜻하고 다정하게 보일 수 있다. '사회적 민감성'이 낮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고 관계에서 거리를 두는 성향이 있다. 사회적 민감성이 낮다고 해서 대인 관계에서 미성숙한 게 아니다.

후천적으로 길러진 '연대감'이 높을 때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고, 공감하며, 나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연대감'은 환경과 경험의 영향을 받아 아진다. 누군가에게 수용받고, 공감받아본 험이 자연스러운 토대가 된다. 학습을 통해서도 발달한다. 누군가를 보고 배우며 성숙해 기회가 생긴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좋고- 나쁜' 갈림길에서 선택을 할 뿐이다. 오늘은 좋았다 내일은 나빠지기를 왕복하고, 그 사이 적당한 지점 어딘가에서 망설이기도 한다. 나쁜 선택을 해놓고 후회하기도 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 애쓰다 치기도 한다.


눈빛이 나쁘다는 말을 들었던 태씨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 기태씨는 그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새로 사귄 친구도 있다. 괜찮은 놈이라고, 너무 좋은 사람이 될 필요 없다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건, 다른 어떤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만남 속에서가 아니라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이 수 있을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태씨게 좋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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