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소리를 낼 때
미라클 벨리에 (Bellier Family) 2015
감독: 에릭 라티고
출연: 루안 에머라, 카린 비아르, 프랑수아 다미앙, 에릭 엘모스니노
어릴 적 봤던 동화 속 여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아름다웠다. 백설공주는 백옥처럼 흰 피부에 발그레한 뺨으로 여왕의 질투를 불러일으켰고, 재투성이 신데렐라는 요정 대모가 살짝 도와주자 눈부시게 변신했다.
라푼젤은 완벽하게 균형 잡힌 우아한 공주님들과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가장 눈에 띄는 라푼젤의 특징은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다. 물론 윤기 나는 긴 머리는 시대를 초월해 여성의 매력과 건강의 상징이다.
그러나 라푼젤의 머리카락은 보기 좋게 적당히 긴 게 아니었다. 높은 탑에서 늘어뜨려 지상에 닿을 정도다.
라푼젤을 탑에 가둔 마녀는 긴 머리카락을 타고 올라와 라푼젤을 만난다. 나중에는 왕자 또한 그 머리카락을 밧줄 삼아 탑을 오른다. 라푼젤의 머리카락은 타인과 소통하고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가치가 있다.
라푼젤 이야기가 아이의 성장과 독립을 상징적으로 다룬 의미가 있음은 '옛이야기의 매력'이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저자 브루노 베텔하임은 정신분석의 원리들을 어린이 양육과 사회 문제에 적용했던 심리학자이다. 그는 '옛이야기의 매력'에서 라푼젤, 신데렐라, 백설공주, 빨간 망토, 잭과 콩나무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들이 아이의 성숙과 적응에 필요한 발달 과제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옛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마녀나 새엄마는 엄마의 다른 모습이다. 어릴 때 누구나 한 번쯤 우리 엄마는 가짜 엄마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이들은 아직 내 '좋은 엄마'가 '나쁜 엄마'가 될 때도 있다는 걸 이해하기 어렵다. 엄마가 무섭게 화를 내며 야단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고, 동생만 예뻐하는 것 같을 때, 완벽한 진짜 엄마를 상상한다. 분열된 엄마의 나쁜 측면이 옛이야기에서는 마녀나 새엄마로 등장하곤 한다.
마녀는 라푼젤을 탑에 가두고 밖으로 나가지도, 누가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는다. 마녀는 아이의 성숙과 독립을 방해하는 엄마다.
아이가 더 이상 나이 먹지 않고 이대로 멈춰줬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막으려 해도 아이가 어른이 되는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온다. 아무리 훼방을 놓아도 라푼젤은 결국 이웃나라 왕자와 함께 탈출한다. 이때 라푼젤의 긴 머리카락이 진가를 발휘한다.
라푼젤에게 풍성한 머리카락이 있다면, '미라클 벨리에'의 폴라에겐 아름다운 목소리가 있다. '미라클 벨리에(Bellier Family)'는 2015년 개봉한 프랑스 영화다. 2021년 개봉해서 아카데미 작품상, 각색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미국 영화 '코다(CODA)'는 '미라클 벨리에'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연출이 좀 더 편안하게 느껴진 '미라클 벨리에'를 소개한다. 몇 가지 설정에서 다르지만, 두 영화의 주제나 줄거리는 큰 차이가 없다.
벨리에 가족의 딸 폴라는 가족 중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엄마, 아빠, 남동생은 선천적으로 청각 장애를 갖고 있다. '코다(CODA)'라는 제목은 'Children of Deaf Adults'의 줄임말로, 청각장애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hearing person) 자녀를 뜻하는 용어다.
사춘기에 접어든 폴라는 등교하기 전 가족을 도와 농장일을 거드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집 안팎의 일을 가족 모두 함께 하지만,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특히 폴라의 역할이 중요하다. 시장에 나가 치즈를 팔 때도, 마을 회의에 참석할 때도, 심지어 부모가 성병으로 병원에 갈 때도 동행해야 한다.
가족들은 서로를 아끼며 똘똘 뭉쳐 살아간다. 모든 상황이 달가운 건 아니지만 폴라도 자신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성장했다. 폴라는 가족과 농장 일을 하는 것 외에 다른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린아이인 동안에는 가족이라는 세계와 폴라의 삶이 충돌하지 않았다.
말하고 듣지 못하는 가족 사이에서 자란 폴라는 어릴 때 말하는 게 어색했다. 자라면서 농장일에 바빠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수업시간엔 졸기 일쑤다. 학교에서 폴라는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며 위축돼 있다. 짝사랑하는 남학생을 따라 우연히 들어간 합창반에서도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한다.
거부당하거나 비난당하지 않으리라 믿을 때 편안하게 목청을 높일 수 있다. 폴라가 말하고 노래하는 건 남다른 의미다. 수어라는 익숙한 틀에서 벗어나 사람들에게 가 닿을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배워야 한다.
움츠러들어 시원하게 노래하지 못하는 폴라에게 합창반 교사는 아무 소리나 내라고, 괴상한 소리를 질러보라고 주문한다.
마침내 갇혀 있던 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교사도, 폴라 자신도 놀란다. 알토인 줄 알았던 폴라의 음색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소프라노였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교사는 파리의 음악학교 진학을 권유하며 '네 목소리를 낼 때가 됐다'고 한다, 폴라는 오디션 준비를 시작한다.
폴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꿈을 꾼다. 자기 목소리로 세상에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는다. 가족 외에 다른 사람들과 이어지는 기쁨을 알게 된다.
가끔 사춘기를 겪지 않았다는 사람들을 본다. 내 맘대로 하겠다고 반행해 보지도, 방문 닫아걸고 시위해 보지도, 부모 뜻을 거역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아이를 인내와 수용으로 지켜봐 주며, 자유로운 대화로 이끄는 성숙한 부모 밑에 자라, 부모와 내 마음이 크게 어긋난 본 적 없는 운 좋은 케이스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부모가 너무 엄격하거나, 집안 형편이 편안하지 않거나, 부모가 불안하고 우울해 보일 때, 마음이 여린 아이들은 제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 사춘기가 되어 부모에게 반항을 한다는 건, 진리인 줄 알았던 부모의 세계관에 의문이 생기고, 최고인 줄 알았던 부모가 시시해지고, 부모가 원하는 삶과 내 꿈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할 때가 왔다는 뜻이다.
사춘기 아이의 변화를 부모 관점에서 바라보면 반항이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분리와 독립의 과제를 수행하는 중이다.
폴라가 난생처음 꿈을 꾸는데, 가족들은 변화가 달갑지 않다. 아이에게 정말 재능이 있긴 한 건지, 헛바람이 들어 상처만 받는 건 아닌지 걱정한다. 그리고 폴라 없이 살아가야 할 날이 막막하다.
'너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피부병까지 생겼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 네가 떠나버리면 어떡하냐'라고 붙잡는다.
때로 부모들은 자녀가 성장하는 걸 두려워한다. '모두가 다 너를 위한 것'이라지만, 실은 자녀를 통해 부모의 욕구를 대리 실현하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녀를 지나치게 통제하려는 부모는 자신의 높은 불안을 투사하고 있을지 모른다. 완벽한 부모가 되려 애쓰다 자녀를 과잉 보호하기도 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로 자녀에게 부채감을 지우기도 한다.
자녀의 독립을 방해하겠다고 작정한 부모는 없다. 걱정돼서, 서운해서, 의식 중에,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일이다. 라푼젤을 기른 마녀도 라푼젤을 키워서 잡아먹겠다는 건 아니었다. 내 품에서 아이를 떠내 보내지 못했을 뿐이다.
독립은 아이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아이에게 물리던 심리적 젖을 떼는 과정은 부모에게도 진통을 동반한다.
아이가 자라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건 익숙하고 안락한 세계, 즉 가족으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가족들만 폴라에게 의지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폴라 또한 낯선 곳에서 혼자 적응하는 게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가족 때문에 망설이던 폴라는 어쩌면 용기 내지 않을 이유를 가족에게서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학교 합창대회가 열리는 날, 무대에 선 폴라가 빛난다. 폴라의 노래에 눈물 흘리며 기립박수를 보내는 관중들을 가족들은 지켜본다. 대회가 끝나고 혼자 생각에 잠긴 딸에게 아빠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한다. 딸의 목을 손으로 만져 성대의 울림을 느끼고,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한다.
'노래하는 걸 사랑하는구나.'
가족들은 폴라의 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폴라는 가족의 응원과 지지에 용기를 낸다. 폴라는 오디션 무대에서 '비상'이라는 곡을 선택해 가족을 바라보며 수어와 함께 노래한다.
'사랑하는 부모님, 두 분을 사랑하지만 저는 떠납니다.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날아오르는 거예요.'
('비상' 중에서)
'코다'의 주인공 로지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Both sides now'를 부른다.
'이제 사랑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주는 쪽과 받는 쪽에서.
눈물과 두려움. 사랑한다고 말할 때의 벅찬 느낌.
매일 살아가면서 뭔가를 잃고 뭔가를 얻기도 하지.
난 이제 인생을 양쪽에서 보게 됐어'
('Both sides now' 중에서)
'좋거나' 혹은 '나쁜(마녀)' 엄마로 한쪽 면만 보던 아이는 자라 그 모두가 '내 엄마'임을 받아들인다. 내 날개가 움트고 자라게 도와준 사람 또한 엄마였음을 폴라는 안다.
'내가 좋은 엄마가 아니었어. 아니면 왜 벌써 우리를 떠나겠니.' 하며 우는 엄마에게 폴라는 말한다.
'좋은 엄마예요. 그래서 내가 떠날 수 있는 거예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카로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가다 밀랍 날개가 녹아 추락한다. 아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면서 아버지 다이달로스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날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너무 낮게 날면 바닷물에 날개가 젖어 가라앉아 버리고, 너무 높이 날면 태양에 날개가 녹아 추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성장하여 자신의 날개로 날 수 있을 때까지 부모와 적당한 거리에서 이어져 있어야 한다. 너무 밀착해서 부모 품을 벗어나지 못하면 깊은 바다, 즉 무의식의 심연에 삼켜져 심리적 혼돈에 빠질 수 있다.
반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 부모 품에서 급격히 멀어지면 자칫 추락해 버릴 수 있다. 아직 날개가 충분히 튼튼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세상에 나가면 실패를 겪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럴 땐 다시 가족 품에 돌아와 회복하고, 마음 곳간을 든든히 채운 뒤 나시 떠나면 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비로소 훨훨 날 수 있다.
폴라는 가족을 안전기지 삼아 조금씩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됐다.
폴라가 떠나고 나면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 변화에 적응하느라 처음에는 혼란을 겪겠지만, 결국 방법을 찾을 것이다. 가족을 도울 사람을 고용할 수도 있고, 가족들도 폴라가 하던 역할을 배우게 될 것이다. 폴라 친구의 말처럼, 폴라가 있기 전부터 부모님은 살아왔다.
가족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한 명이 변하면 다른 구성원도 함께 변한다. 한 사람이 떠나면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좋거나,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
동전처럼 인생의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