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오디션
방에 들어서자 젊은 심사 위원이 펑퍼짐한 레게바지와 후디를 입고 앉아있었고 표정은 심드렁했다. 바닥에 표시된 위치에 서라고 하길래 그렇게 했다. 광고대행사를 20년 하고도 몇 년 더 다닌 사람으로서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수도 없이 많은 프레젠테이션을 해왔다. 그러나 포디움도 없이 온몸을 드러내고 화면도 리모컨도 없이 몸 둘 곳, 손 둘 곳 없이 온몸을 관찰당하는 느낌은 새로웠다.
'준비되면 시작하세요'
심사위원은 종이를 한 장 무성의하게 건네며 말했다. 나는 다가가 두 손으로 공손히 종이를 받았다. 경력이 없어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배운 게 없는데 어떻게 시작부터 오디션을 하나?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이 뭔가 대화를 할 표정은 아니었다. 노란 깃발 아래 수백 명의 단체 관광객을 받아들이는 입국심사대 직원의 표정과 다를 바 없었다.
사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오디션이 아닌 '인터뷰'였다. 나는 어떻게 살았고 연기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어떤 영화와 배우를 좋아하는지, 연기를 언제부터, 왜 하고 싶었는지, 왜 지금 배우가 돼야 하는지 등
현실을 너무나 과대평가한 고급스러운 나였다.
'환자분 또 술 드셨네요. 지난번 진료 때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자꾸 이러시면 저 진료 못합니다. 댁 근처 병원으로 가시거나 다른 곳 알아보세요'
받은 종이에 있는 대사였다. 몇 초 정도가 흘렀는지 모르겠다. 속으로 몇 번 읽으니 리듬이 좀 잡히는 듯했다. 입을 떼었다. 심사위원을 환자라고 생각하고 그의 눈을 보고 반쯤은 외워 대사를 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프로 배우들의 오디션 장면을 보며 경 외로움을 느꼈던 사람으로서 느닷없이 닥친 이 경험은 놀라웠다.
놀랍도록 짜릿했다.
어린 시절 막 칼라티비가 나올 때쯤이었나. 미국의 어떤 박사 할아버지가 초능력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 초능력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과학으로 증명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우리는 모두 유리겔라의 숟가락 구부리기 초능력에 노예였기에 그의 등장은 흥미로웠다. 이윽고 이 박사님은 한국 TV에 나왔고 검증 대상은 대만에서 온 자석 맨이었다. 자석맨이 본인의 가슴에 숟가락, 다리미를 가져다 대자 턱 하고 붙는 초능력을 선보였다. 동생과 같이 보며 나는 '우와'입이 벌어졌다. 그런데 잠시 후 이어진 박사의 설명은 놀라웠다. '누구나 붙는다' 이게 무슨 말인가. 누구나 자성이 있다는 뜻인가? 결론은 가슴은 완만한 경사가 있고 땀을 비롯한 분비물은 적절한 마찰과 점성을 일으키기 때문에 웬만한 철은 붙는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실제로 패널로 나온 코미디언들의 가슴에 수저 정도는 여지없이 붙었다. 박사는 말했다.
<사람들은 해보지도 않고 놀라워하며 자신은 안된다고 생각한다>
박사 할아버지의 이 말은 너무도 강하게 각인이 돼서 이후 살면서 이따금씩 생각이 나곤 했는데 이 대사가 끝나자마자 박사 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놀라웠다. 심장이 터져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차분했고 대사에 나름 감정도 실어보았으며 짜증 섞인 표정도 내보였다. 이럴 수가. 생각보다 쉬웠다. 물론 초심자의 체험 연기 정도 될 뿐이지만 남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짜릿했고 그 짧은 대사에 나는 놀랍도록 큰 재미를 느꼈다. 몇 초의 대사 순간 동안 붕 떠있는 것 같았다. 1분도 안 되는 순간에 그간의 의심과 불안은 간데없고 찰나의 나는 배우로서의 성장을 꿈꾸고 있었다.
'네, 잘 봤습니다. 다음 분이요'
심사위원은 잠시의 공백도 없이 내 대사가 끝나자마자 그의 '대사'를 했다. 나는 셀프 만족을 끝내고 재빨리 현실 의식을 찾았다. 아마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나왔는 듯하다. 대기실로 돌아와 다른 지원자들의 순서를 다 치르고 난 뒤 학원의 대표라는 사람이 들어왔다. 나도 나름 자유롭다는 광고 업계 출신이어서 그렇게 보수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차림은 신뢰와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그에게 신뢰란 중요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저 나의 경험적 선입견일 수 있다. 그의 드레스코드는 대부분의 지원생들과 다르지 않았다. 한 사람의 아웃핏 안에 어떻게 저렇게 다채로운 색이 들어갈까, 세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는 칠판을 사용해 가며 40여분 간 홍보를 이어갔다. 자신들의 학원 수강생 출신 중 누구는 광고를 하고 있고 누구는 드라마에 출연 중이라는 성과 홍보로 문을 열었고 자신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인지 과시가 이어졌다. 어렸을 적 학교 앞 봉고차에 끌려들어 가 강매당하던 날의 그 아저씨와 다를 바 없었다. 한참의 이야기를 돌리고 돌리다 그는 그날의 참석자들 이름과 복잡한 메모가 적힌 리스트를 들어 보였다. 참석자 중 실력이 우수한 소수만 뽑아 학원 수강생으로 받고 키우겠다는 공지였다. 지난주 오디션 때는 그럭저럭 좋은 원석들을 찾았지만 성적을 보아하니 이번 주는 그렇게 많이 뽑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미 자리도 많이 찼다고 했다. 그는 오랜 광고 기법인 위협소구를 하고 있었다. 이 학원에 뽑히지 못할 수 있구나 하는 공포를 주며 유인하는 기술에 알면서도 넘어가고 있었다. 어렵게 학원 문턱을 넘어 들어왔기에 이찌됐든 이 기회에 '연기'라는 것에 시작은 해야 했다. 원장은 지원자 중 상위 20%에게만 전화를 따로 할 예정이고 전화가 없다면 너무 기본기가 안되어서 당장 학원 수업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이니 연락 기다리지 말고 다음 기회에 다시 응모하라고 말했다. 그의 등장 시 잠깐 보였던 친절과 공손은 점차로 옅어져 말미에 그는 오만한 갑이 되었고 참여자들의 표정은 의심에서 시작해서 간절함이 되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다른 세상에 발을 들이고 신경이 바짝 곤두섰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입으로 '또 술드셨죠?..' 오디션 대사를 반복하고 있었다. 여러 다른 투로 해보고 소리의 양도 달리 해보았다. 재미있었다. 또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미 원장의 저렴한 태도와 메시지에 대한 걱정은 잊은 상태였다.
다음날 나는 점점 몸이 달아왔다. 연락이 오늘 오려나?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오후 3,4시가 넘어가자 점점 불안했다. 떨어졌구나 하는 낙담이 고개를 들쯤 익숙한 목소리의 직원이 전화를 해왔다.
'원장님께서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근데 좀 바쁘셔서 내일 오후 2시밖에 안된다고 하시는데 시간 되실까요?'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