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의 장사 기술
학원 원장의 면담을 앞두고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단연 두드러진 것은 기쁘다는 것이었다. 지겹도록 망설이기만을 20년 넘게 하고서 어찌 되었든 학원에 오디션(?)을 봤고 만나자고 전화가 왔으니 뭐가 됐든 시작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설렘도 있었다.
나는 면담에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괜찮은 셔츠를 꺼내 놓고 재킷과의 매치을 고민했고 그중 하나를 골라 다리고 입고 다시 바꾸고 또 다리고 또 바꾸기를 반복했다. 이후 청바지냐 면바지냐를 고민하며 다시 셔츠를 바꾸었다. 이제야 말이지만 4년째 배우 하면서 어떤 오디션에도 그 날 만큼 정성을 다 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전화에서는 그냥 오시면 된다고 했으나 나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뭐라도 하기로 했다. 외장하드를 털어 파묻힌 사진들을 골라 상황별로 정리했다. 별반 이렇다 할 사진이 없어 당황했지만 PPT에 페이지 별로 상황을 제목으로 달아 사진들을 나열했다. 단연 사진이 제일 많은 건 비지니스(정장 착장)였다. 20년 짬바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등산, 여행, 일상 등으로 영화 씬, 광고 장르 등에 어울릴 듯한 사진들을 모아 콜라주로 편집, 출력했다. 말하자면 나는 이런저런 상황에서 이런 느낌이 나오니 가능성을 인정해 달라는 어필이었다. 가장 깨끗한 클리어 파일을 찾아 정성스럽게 넣었다.
두 번째 학원 방문. 나는 첫 방문 할 때와 달리 주저 없이 들어섰다. 이 세상만사 첫발이 제일 어렵다. 한 번 왔었을 뿐인데 이렇게 마음이 수월할 수 없었다.
직원의 안내로 원장 방에 들어섰다. 그는 첫 만남 말미의 거만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를 만나기 전 점심도 먹고 웃으며 전화 통화도 하고 했을 텐데 그날의 거만함 모드로 정확히 싱크 시키는 것도 능력이지 싶었다. 이번에도 나는 배우란 무엇인지 추상적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나 역시 오늘도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는 그날 보다 더 직접적이었다. 40분가량이 이어진 그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년간 수업료 360만 원
- 수업은 3달간 주 1회, 이후 9개월은 월간 1회씩 연기 교정
- 연간 수업료라 한 달에 30만원 꼴이지만 사실상 월 120만 원짜리 3달 수업이라고 보는 게 맞음. 뭐로보나 3달 계약인데 뒤에 명분상 월 1회 교정 9개월을 붙여 12개월로 늘임
- 환불 안됨. 변호사 컨설팅 다 받았고 불공정거래 아님
- 학원이 알선하는 촬영 건에 발탁 시 출연료 중 30%는 학원 몫 (계약 기간은 3년, 전속 아님)
놀라웠던 건 수업료 구조의 맹점을 자신이 설명하면서 변호사 컨설팅받았고 문제없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이었다. 이전 수강생들의 예를 들어 설명하던 그는 광고 몇 편이면 학원비 다 뽑는다. 그러니 절대 손해보지 않는다라고 설명을 이어갔다. 약사 출신 누구는 캐나다 영화에 섭외되어 몇 달째 밴쿠버에 체류 중이며 은행원 출신 누구는 광고에서 아주 잘 팔리고 있으며 공무원 출신 누구는 단편 영화 촬영 중이라고 했다.
나는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내가 광고업계 출신임을 숨기고 최대한 어리숙하게 광고에 대해 질문했다. 광고 프로덕션의 생리, 섭외 프로세스, 대행사들하고의 관계 등등. 그는 자신 있게 술술 답을 했지만 내가 아는 바와는 거리가 먼 답들이었고 두리뭉실했다. 역시 기대했던 신뢰도는 찾을 수 없었다. 나느 어리숙한 얼굴을 보내며 그렇군요 대답했다. 실망스러웠다. 다만 실망할 줄 알았기에 낙담하지는 않았다.
그는 30분이 넘어가는 낚시에 지쳤는지 이제 결과를 내기 위해 낚싯대를 더 깊게 드리었다.
"이제 결정하셔야 합니다"
"일단 말씀 잘 들었고 돌아가서 생각 좀 해본 후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는 자신 앞의 엑셀 표에 볼펜을 슥슥 그으며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돌아가셔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건 자유지만, 저는 바로 다음 후보자에게 전화할 겁니다"
"..."
"전에 말했다시피 이번 기수는 TO가 얼마 없습니다. 선생님 말고도 좋은 점수의 분들이 많이 있어서 빨리 기회가 닫힐 겁니다"
그의 표정은 이제 거만을 넘어 귀찮음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회사를 20년 넘게 다닌 중년 남자에게 그것도 수십, 수백억의 스폰서 계약을 협상하며 오대양육대주 다양한 문화권의 잔기술을 겪은 내게 이 정도 말장난이 먹힐 리 없다.
나는 신용카드를 건넸다. 6개월 카드사 할부로 해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는 카드를 받아 들며 놀라울 정도로 아이처럼 방긋 웃으며 연신 굽신거렸다. 신기했다. 원래 반대여야 하는 것 아닌가? 친절하게 꼬시다가 결재하고 나면 흥미 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의아했지만 낚시라고 생각하니 그도 그럴듯했다. 중얼중얼 매번 하는 말 옹알이처럼 반복하다가 잔잔한 수면 위 갑자기 흔들리는 찌처럼 먹이감의 눈빛이 변할 때 민첩하게 낚아채는 손맛을 카드 단말기 거래 승인 전자음에서 느끼리라. 쾌감이 있겠구나.
그는 카드 영수증을 건내고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짧은 인사를 남기고 굽신 굽신 사라졌다. 이제 결재했으니 그 다음의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했으나 정말 순식간에 그는 나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원장이 말한 어느 한 대목도 신뢰가 가지 않았고 진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었었으니 거절하고 다른 학원을 알아봤어야 했다. 그러나 처음 이 학원에 들어설 때 심리적 문턱은 다시 넘을 수 있을 거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내가 그때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돌아 섰다면 다른 학원의 문턱을 다시는 넘지 못했을 것이다. 잘해서 넘었다 하더라도 비슷한 얘기 끝에 결국 '그럼 그렇지' 학원 등록을 포기했을 것이다. 다른 학원이라고 크게 다르랴.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이미 인스타그램 광고를 클릭 했을 때, 이 학원에 처음 찾아왔을 때 안전하고 보편적인 삶의 중력을 벗어나는데에 에너지를 다 써버린 터였다. 특히 이 상황의 나에게 '그럼 그렇지', '배우는 무슨', '포기해' 라고 말하는 나에게 나는 물러나 수 없었다.
그가 그의 화려한 낚시 기술로 나를 낚았다고 생각했을 것이 제일 아쉽다. 내가 그의 바늘을 집어 내 코에 깊이 찔러 넣은 것임을 그가 알지 모르겠다. 안다면 정말 프로인 것으로 하자.
다른 말로 서울 가면 눈뜨고 코 베인다고 하던데 나는 기꺼이 내 코를 내어 주었다.
뒷걸음치지 않기 위해.
테이블 위 그가 떠난 자리엔 내가 건넨 PPT 자료만 남아있었다. 미팅 초반에 그에게 건네었으나 그는 표지조차 넘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제야 인지했다. 쓰레기 통으로 들어갈 것이 걱정되어 다시 가방에 고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