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라는 설레임
광고대행사만 20년 넘게 다니는 동안 나에게 회사생활이란 늘 팽팽히 긴장된 선 위를 걷는 것 같은 위태로움의 연속이었다. 끝도 없이 앞뒤가 물리는 경쟁 PT와 중압감. 행사, 전시, 촬영 등 프로젝트마다의 그 끝없이 다채롭고 날카로웠던 위기들(그 사고들 중 몇은 커리어의 종말은 물론 경찰서 구경까지 가게 할 만큼 무서웠다) 클라이언트의 밤낮 가리지 않는 그 잘난 요청들과 연휴 끝 첫 업무일 까지 제출해야 하는 제안서들. 그게 어디 붙은 나라냐라는 말을 들으며 다닌 출장들과 급기야 6년의 남의 나라 주재 생활까지.
모든 직장인이 비슷하겠지만 업의 특성에 '을'의 업보가 더해져 직장생활에 여유란 그저 소주와 옥상 담배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늘 잠이 모자랐고 휴일에 어쩌다 쉬어도 몸만 집에 있을뿐 머리 속은 복잡했다(스마트워치를 호기심에 샀다가 주말 내내 손목에서 울리는 업무 이메일 알람에 현대판 노예 쇠사슬을 경험하고 버려 버렸다. 유비쿼터스란 트로이 목마같은 단어가 있었더랬지) 자투리처럼 남는 시간은 영업상 중요한 인물의 상가나 결혼식, 골프장에 바쳐졌다. 내가 봐도 X세대 사람들 참 안 됐다. 우리는 위로는 '까라면 까라' 정신으로 고도성장을 이룰 때 보기 좋게 한자리 차지해서 권위로 일하는 상사를 충성으로 모셔야했고 아래로는 한국말은 통하되 영혼은 단절된 MZ의 지독한 개인주의에 상처받는 외로운 중간계였다. 나는 최근에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을 보며 오열했다.
이랬던 내가 무언가를 배우게 되었다. 업무에도 관련 없고 순전히 내가 좋아서 나를 위해서 배운다. 스무살쯤 어린 강사에게 공손히 질문을 하고 그 답을 들으려 귀를 기울이는 내가 낯설었고 동시에 좋아 보였다. 학원 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주어진 숙제를 깊이 고민하고 열심히 연습했다. 수업일에 다양한 변주로 연기를 보여줬고 그 과정에서의 궁금한 것들을 집요히 물었다. 강사 또한 스무살쯤 나이 많은 수강생을 기특해했다. 무엇인가를 깊게 배운다는 것 또 이것이 예체능일 때의 기쁨은 놀라웠다. 이래서 구청문화센터 통창 안에 여사님들이 그렇게 많구나 깨달았다.
수업 주차를 거듭하며 조금씩 감이 잡히고 해보고 싶은 대본 욕심도 많아질 때쯤 강사는 다른 반 수업에 합류를 권했다. 학원 모르게 하는 일이니 주의해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말하자면 한 수업을 더 듣게 된 것이다. 원장의 얄미운 얼굴도 이젠 점점 잊히던 터라(사실 그 자는 내 카드를 받아들었던 이후로 다시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새 반에 들어설 때 무슨 꿍꿍이인가 하는 생각은 덜했다. 또한 강사도 고용주인 원장에 대한 화가 많은 것을 눈치챘던 때문이기도 했다. 우린 귀여운 반항을 하고 있었다.
새 교실에서 간단한 인사를 나눴고 그 반 4명은 원래 수업 진도에 따른 연기를 시작했다. 놀랍게도 다들 너무 잘하는 것이 아닌가. 원래 반의 다른 두 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전 반의 두 분이 같이 수업 듣는 별개의 수강생이었다면 이들은 팀이었다. 서로 단란했고 늦게 들어온 한 명은 커피를 잔뜩 사들고 들어오며 마치 오랜 친구인 것처럼 농담하며 웃었다. 꼭 대학 때 동아리실에 앉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빠르게 그들과 친해졌다.
이 수업은 토요일 밤 수업이었다. 몇번의 수업이 계속됐고 비가 내려 창에 빗물 때리는 소리가 운치 있던 어느 날 내게 주어진 대사는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의 교도소 면회씬에서 이병헌 배우가 아버지에게 한 대사였다. 원래 수업의 강사가 나의 이미지를 구축한다며 주로 기자, 변호사 등의 역할 훈련을 시킨 반면 이 수업 여성 강사가 내민 대사는 새로웠다.
조하(이병헌) : 엄마 만났어요.
아버지 : 그년은 뭐 하고 있디? 병신새끼 하나 아직도 키우고 있더냐?
조하 :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아버지 : 뭐라고?
조하 : 후회 안 하세요?
아버지 : 뭔 후회?
조하 : 매일 엄마 때린 거. 나 때린 거.
아버지 : 지랄하고 자빠졌네. 내가 나가면 그년 편하게 살게 해 줄 거 같냐?
조하 : 아버지 이제 아버지 안 할게요 나도 자식 안 하고. 여기서 나오지 마세요 실수로라도 나오지 마세요. 아버지 만나면 엄마 맞은 만큼, 나 맞은 만큼 하루동안 다 때려줄 거예요. 그 얘기해주고 싶어서 왔어요. 꼭 해야 될 거 같아서.
아버지 : 이 새끼가 돌았나?
조하 : 그냥 거기서 죽으라고! 엄마 곁에 얼씬도 거리지 말라고! 내가 가만히 안 놔둘 테니까.
감정을 잡고 대사를 하다 눈물이 터졌다.(내가 아동학대를 당했기때문인가 하는 궁금함은 내려놓으시길) 처음으로 밤에 했던 탓에 가슴이 말랑했던지 터진 눈물은 멈춰지지가 않았다. 속도를 조절해가며 마지막 라인까지 대사를 마쳤다. 빗소리가 처연했고 내가 눈물 연기를 하다니 희열이 느껴졌다. 강사는 눈물을 흘렸다. 여린 사람이었나 보다. 한참 콧물을 닦던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잘하셨는데 대사가 잘 안 들려요'. 여린데 할 말 하는 성격이었다.
우리는 수업을 마치고 처음으로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드럼통 연탄 삼겹살 집에서 수다를 떨었다. 울어서 그런지 출출하고 기분은 체증이 내려간 듯 후련했다. 고기는 맛있었고 소주는 달았다. 경영 컨설팅 회사를 다닌다는 여성 수강생은 상량했고 나와 동갑이었던 은행 다니시는 두 아이 엄마는 씩씩했으며 젊은 프리랜서 아나운서 명랑했다. 분당에서 인테리어 사업한다는 청년은 할리우드 배우 '제이슨 모모아'처럼 되고 싶다고 했는데 장발과 몸만큼은 이미 '제이슨 모모아'였다. 그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서 하고 있다고 했다. 형의 죽음 이후 형을 기리기 위해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우린 건배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잘 될 거라고 응원해 주었다.
군 입대 할 때 동네 어른이 이런 말을 했다. '혼자 하라면 못하지만 같이 고생하는 사람들 틈에 있으면 어떻게든 한다'. 연기를 배워보겠다는 생각을 품을 때부터 오랫동안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친구도 아내도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지 못했고 행동은 철저히 숨겼다. 안 그래도 나도 내가 의심스러운데 단 한 명이라도 빈정거리는 날엔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철딱서니 없이 니 나이에 무슨 주책이냐’, ‘니 얼굴로 무슨 배우냐’, ‘니가 배우 하면 내가 이병헌이다’ 등 돌려 말하거나 착하게 말해도 결국 메시지는 똑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동료가 생긴 것이었다. 사랑스러웠다.
새 수업에서는 이전과 다르게 혼자가 아닌 두 명씩의 주고받는 대사 수업이 이어졌다. 혼자의 연기와 다른 점은 반응이었다. 상대 대사에 반응을 언제, 어떻게 할지 내 대사에 상대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연구와 실습이 이어졌다. 몸 또한 바빴다. 혼자 움직일 때와 달리 동선과 동작에서 상대를 계산해야 했다. 반복이 계속 됐다.
살면서 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나는 춤이 그렇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단체로 춤추라고 시키는 것에 어른들 보기 좋자고 이 고생을 시키다니 생각했다. 노래는 곧잘 하니 박치는 아닐 텐데 팔다리는 내 것이 아닌가 보다 했다. 방송댄스 학원을 다니는 친구(심슨이라는 별명의 프로 회사원으로 40대 후반이다)를 보며 어찌 몸이 저리 움직일까 했고, TV속에서 탱고를 추는 남녀를 보면 어떻게 저렇게 두 몸이 서로 호흡하며 하나의 개체처럼 아름다울까 부러워했다. 더 정확히는 그 춤을 출 때 댄서가 느낄 희열을 부러워했다.
연습이 반복되며 이제 댄서를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상대와 대사를 주고 받고 한 페어로 흐름에 맞춰 온몸으로하는 연기는 탱고 댄서를 보며 상상했던 희열을 가져다 주었다. 마음 속엔 내맘대로 탱고 음악이 흘렀다.
배우는 즐거움에 행복했다.
배우가 될 수도 있다는 기대에 설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