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 동안 창신동을 기록하다
야경이 아름다운 명소로 유명한 낙산 공원. 해 질 무렵 낙산공원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한양도성 성벽선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낙산은 수도 서울을 구성하는 내사산(內四山:북악산·남산·인왕산·낙산)의 하나이자, 주산(主山)인 북악산의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한다.
‘낙타 등처럼 생겼다’는 말에서 유래한 낙산(높이 125m)은 동서남북 어디서나, 남녀노소 상관없이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출발 위치에 따라 산을 오르며 느끼는 재미도 다르다. 혜화역 2번 출구에서 이화 벽화마을을 지나는 길은 경사가 가파르지만 젊은 층에게 인기가 많다. 아쉽게도 이화마을의 포토존이었던 '물고기 벽화'는 이제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창신역 4번 출구에서 이동하는 길은 가장 편하고 빠르게 낙산을 오르는 방법이다. 천 원 남짓의 돈만 있으면 에어컨 빵빵한 버스 타고 낙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지금같이 더운 여름에는 '천 원의 행복'이라고 불러도 좋다. 또, 동대문역 1번 출구를 나오면 여유롭게 한양 성곽을 따라 낙산을 오를 수 있다. 한양성곽길을 따라 걷는 도보 코스는 채 1시간이 소요되지 않는다.
사실 동대문역은 낙산을 오르는 방법이 두 가지다. 동대문역 3번 출구를 출발하여 매운 족발로 유명한 창신시장을 거쳐서도 낙산을 오를 수 있다. 동묘 앞 역 9번 출구에서 출발하는 길과 혜화문이 자리 잡고 있는 한성대역 4번 출구 길도 존재한다.
날이 어두워지면 낙산공원 성곽길에 온화한 불빛들이 들어오고, 서울 시내 도심에도 하나 둘 불이 밝혀진다.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와, 우와”하는 탄성이 들려오는 것은 흔한 풍경이다. 낙산공원 정상에서는 멀리 남산과 북한산이 훤히 보일 만큼, 동서남북으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성벽선과 어우러지는 야경은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장관이다.
하지만, 아름다움만 느끼고 산을 내려오기에는 낙산이 지닌 역사적 가치가 너무 크다. 낙산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양 성곽길을 따라 낙산을 오르다 보면 절개지가 눈에 띈다. 절개지는 일제 강점기 시절 경성부 직영 채석장으로 조성된 것으로 당시 조선총독부, 서울시청, 한국은행 등을 짓기 위해 낙산의 화강암을 채취하며 형성됐다.
이뿐만 아니다. 60년대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무분별한 도시계획으로 인해 낙산의 역사적 가치는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60~70년대 한국 경제는 노동 집약적 산업인 봉제, 섬유, 신발 등의 경공업이 역점적으로 추진되며 높은 고도성장을 이뤘는데, 그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곳이 창신동이었다. 국내 의류산업의 1번지인 동대문의 배후기지가 창신동인 것이다. 지금도 창신동 골목길에는 1,000여 개의 봉제공장이 들어서 있다.
지난해 가을부터 지금까지 창신동을 꽤나 많이 다녀왔다. 창신동을 갈 때마다 새로운 것을 느끼고 발견한다. 그만큼 창신동은 비밀이 많은 동네다. 최근 창신동 꼭대기 장터를 취재하러 가면서 가장 인상 깊게 느낀 점은 주민들의 모습이었다. 주민들은 모두 함께 했다. 혼자 고민하지 않았고, 이웃과 함께 얘기하며 마음을 나눴다. 그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
아프고 힘들수록 창신동 주민들은 똘똘 뭉쳤다. 창신동 주민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뭐든지 도서관을 만들었고, 지역기반 사회적 기업들도 여럿 들어섰다. 이곳에는 마을의 멍석이자 공론의 장인 라디오 방송국도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은 마을 조직들이 참여와 협력을 통해 힘을 모아 만든 결과다.
그들에게서 '슬기로움'을 배웠다. 어렵고 아팠던 과거가 존재했던 창신동. 하지만, 지금은 다 같이 슬기롭게 헤쳐나가고 있다. 마을 공동체에서 함께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관심 가지는 행동들이야 말로 창신동 주민들을 더 가치 있게 만든 힘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