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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sang Oct 07. 2019

저는 손쉬운 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단상 - 당신도 임산부가 불편한가요?

"저...죄송한데요. 제가 임산부라서요."

자리에 앉은 누군가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 '아, 네. 앉으세요.'라며 일어난다.

아무리 임산부라지만 앉아 가는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는 것만 같아서

'죄송'이라는 단어가 꼭 말머리 앞에 붙는다.

솔직히 정말 죄송하다기보다 인사치레에 가깝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건네는 말이 "저 임산부예요."라는 것도 좀 뜬금없지 않은가.


'어차피 한 번 보고 다시 안 볼 사람인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자리를 양보받고 앉으면 살짝 얼굴이 화끈거린다. 지치고 힘들어 보여야만 할 것 같다.

아, 매번 자리를 양보받을 때마다 나는 죄송해야 하는 건가.



지하철에는 일명 '핑크카펫'이 있다. 임산부배려석이다.

2013년 12월부터 서울시 여성 정책의 일환으로 서울시 버스, 지하철 등에  만들어진 공간이다.

교통약자석(노인/장애인/임산부를 위한 자리)이 있지만 앉기 어렵고, 임신 초기라 배가 나오지 않은 여성을 위한 정책이다.


지하철 1~9호선 한 칸당 임산부 배려석은 2개이고,  일반적으로 지하철 1칸 좌석은 66개이다(7인용 6줄, 교통약자석 3인용 4줄 기준).

그러니깐 지하철 전체 좌석 중 임산부 배려석은 3% 정도 차지하고 있다.

교통약자석은 제외한다. 개인적으로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교통약자석에 앉아 있는 임산부를 본 적이 없다.

그곳은 할아버지들끼리도 '넌 몇 살이냐, 내가 몇 살이니 네가 일어나라'를 외치는 전쟁터이다.


임산부 배려석은 정말 임산부를 위해 사용되고 있을까?

지난 6월, 서울교통공사는 '임산부 배려석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1~8호선 지하철 이용객 6,179명(일반인 4,977명, 임산부 1,202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일반인 중 39.49%가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봤다고 답했다.

중요한 것은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서 목적지까지 무엇을 하며 가냐'는 질문에

'스마트폰을 본다' 33%, '졸면서 간다' 9%, '주변을 무시한다'가 7% 등으로 나타났다.

위 통계에 국한해 보자면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사람 중 50%가 임산부가 주변에 있는지 없는지 신경을 안 쓴다는 것이다.


약 두 달 전 출산한 친구는 교통약자석에 앉았다가 할아버지한테 호된 소리를 들었다.

"저 임산부인데요."라고 말해도 "그럼 임산부배려석으로 가!"라는 막말을 했다고.

눈이 있다면 꽉 찬 자리를 봤을 텐데,

임산부는 체력적 약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손쉬운 싸움의 대상이라도 되는 건가.

친구의 친구는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었는데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임신한 게 무슨 유세라고...ㅉㅉ"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읭? 내 귀를 의심함)


임산부 배려석이 시작되자 비하와 조롱은 쏟아졌다.

임산부 배려석을 만들었으니 '직장여성 배려석', '육아여성 배려석', '생리통여성 배려석', '하이힐 배려석'도 만들고 남자는 다 서서 가자는 그림 짤을 보기도 했었고,

왜 똑같은 돈 내고 탔는데 여자한테 자리 양보하라는 역차별을 당해야하는지 모르겠다는 글도 봤다.

진짜 임산부인지 어떻게 확인하냐는 글을 봤을 때

이렇게 미개한 의식 수준이 공론화되는 것에  화가 치밀었지만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었는지 임산부를 증명하는 '임산부 배지'가 만들어지는 원동력이 됐다는 말도 있다.

'성인지 감수성'이 어느 수준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 사회가 유독 노인이나 장애인보다 임산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가 뭘까.

우리는 모두 노인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장애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임산부는 다르다. 전 세계 인구의 반 정도인 여성만 겪는 일이고, 가임기 여성 중에서도 임신하는 사람만 임산부가 된다.

또한, 임신 기간은 전체 일생(80년으로 가정) 중 1%(10개월) 정도에 못 미친다.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니 간과하기 쉽고, 공감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지난 2주간 4번, 임산부 배려석을 양보받았다.

처음에는 정말 고민했다. 자리에 앉아있는 아저씨 앞에서 몇 분을 주춤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뗐다.

왜 그리 가슴이 쿵쿵대던지.

괜히 험한 말 들을까 봐 무서웠지만, 다행히 '더 일찍 말하지 그랬냐'며 '미안하다'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오늘은 진한 화장을 하고 카고바지를 입은 채 임산부 배려석에서 열심히 휴대폰 게임을 하는 여성에게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했다.

임산부 배지를 가방에서 꺼내 보이기도 했지만,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아 손가락으로 '쿡' 허벅지를 살짝 찌르기까지 했다.

결국 '죄송한데요'라고 하며.


임산부가 왜 사람 빽빽한 공간에서 서 있기 힘든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 당신도, 그 자리를 비켜달라고 해서 앉는 임산부도 서로 마음 불편한 건 매한가지이니,

임산부 배려석은 되도록 비워 두시고

만약 임산부 배려석에 앉으면 주위를 둘러봐 주시길.

적어도 눈을 감고 있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휴대전화 보는 비매너는 없어지길 바란다.


플랫폼으로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이 달려 들어올 때면

가방 고리에 달아둔 '임산부 배지'를 밖으로 꺼내며 준비태세를 갖춘다. 나에겐 작은 전쟁이다.


'제발, 임산부 배려석아, 비어있어라.'




참고자료.

- Seoul Metro Newsletter Vol. 6, '지하철의 수송력'

- 여성시대, 2019년 7월 25일자, 정의정 기자, '서울시민 40% "임산부 아닌데 지하철 임산부석 앉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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