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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Sep 03. 2020

런던 대공습 267일… 음악, 시민을 위로하다

<60> 영국의 런던 내셔널 갤러리

루브르 박물관 개관에 자극
존 앵거스타인 소장품 전시 시작
다빈치·고흐·모네 등 작품 전시 

 
피아니스트 마이라 헤스 공연 기획
6년반 동안 75만 명 시민 즐겨
1985년 세인즈버리관 신축하기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전경. 사진=www.codart.nl.


영국의 수도 런던 트라팔가르 광장 맞은편에 있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는 영국을 대표하는 국립 미술관이다. 13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2300여 점의 유럽 회화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관은 세인즈버리관, 북관, 동관, 서관 등 총 4개 관으로 연대기 순으로 전시하고 있다. 대표작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 반 고흐의 ‘해바라기’, 모네의 ‘수련’ 등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한 달 후인 1939년 10월부터 1946년 4월까지 피아니스트 마이라 헤스의 노력으로 이곳에서 매일 오후 1시에 음악회가 열렸는데, 이는 런던 시민들이 전쟁을 견뎌내는 데 큰 힘이 됐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전경.  사진=픽사베이


1838년 신고전주의 양식의 미술관 완공


1759년 대영 박물관이 설립됐지만, 영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은 없었다. 1793년 개관한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영향을 받은 영국 의회는 미술관을 짓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지만, 미술관 설립을 위한 법이 제정되는 데에 30여 년이 걸렸다. 1824년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빚을 갚으면서 목돈이 생기자 영국 의회는 그림 구매를 위한 6만 파운드(9398만 원)의 예산이 담긴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해 은행가이며 미술 애호가인 존 앵거스타인(1735~1823)의 소장품 38점을 영국 정부가 구입해 팔몰가 100번지에 있는 앵거스타인의 집에 전시한 것이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시초다. 점점 더 많은 회화 작품의 기증으로 전시실이 좁아지자, 1831년 트라팔가르 광장의 왕실 마구간이 있던 자리를 부지로 선정하고 윌리엄 윌킨스가 설계를 맡아 1838년 신고전주의 양식의 미술관이 완공됐다.


웨일스의 성과 대학으로 작품 피난


1930년대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이 급부상하면서 유럽에서 전쟁 위기가 고조됐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내셔널 갤러리의 작품들은 안전을 위해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웨일스의 성이나 대학으로 옮겨졌다. 미술관은 문을 굳게 닫았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작품들을 더 안전한 장소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작품들을 영연방 국가인 캐나다로 옮기자는 의견이 강세를 이뤘지만 윈스턴 처칠 총리는 작품들이 영국을 절대 떠나서는 안 된다는 반대 입장을 고수하면서 작품들은 캐나다 대신 웨일스 북부의 맨노드에 있는 지하 채석장으로 옮겨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열린 음악회 장면. 사진= imfchicago.org.


전쟁 고통 견디게 해준 미술관 음악회


미술관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건 이곳에서 매일 오후 1시 열린 음악회이다. 당시 세계적인 여성 피아니스트 마이라 헤스(1890~1965)는 전쟁이 일어나자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마지막 연주회를 열었다. 그녀의 연주에 깊은 위로를 받은 지인들은 헤스가 연주를 멈추지 않기를 부탁했다. 이에 헤스는 미술관의 관장 케니스 클라크(1903~1983) 경을 찾아가 미술관에서 음악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헤스는 저녁 시간에 열리는 음악 공연은 조명으로 인해 폭격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에 점심시간대로 공연 시간을 정했다.


1939년 10월 10일 미술관에서 음악회가 최초로 열렸다. 클래식 음악을 쉽게 접하길 원했던 헤스의 바람으로 입장료는 겨우 1실링, 한화로 100원이 되지 않았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바흐 등 사람들에게 친숙한 곡이 연주됐다. 첫 공연에만 1000명 이상이 모였다. 전쟁예술가자문위원회(WAAC) 역시 한 달에 한 점씩 회화를 선정해 맨노드에서 미술관으로 작품을 가져와 전시하는 행사를 계속 진행하며 힘을 보탰다.


피아니스트 마이라 헤스의 사진. 사진=www.bbc.co.uk


1940년 9월부터 1941년 5월까지 독일은 영국 대공습으로 런던을 267일간 71회나 폭격했다. 런던을 떠날 수 없었던 시민들에게 미술관에서 열리는 음악회는 전쟁의 고통을 이겨내는 데 큰 위로가 됐다. 미술관은 독일군의 공습이 거셌던 1941년 5월 8일과 9일 단 이틀 동안만 폐쇄됐다. 버킹엄 궁전을 떠나지 않고 시민들과 함께 런던을 지킨 국왕 조지 6세의 왕비 엘리자베스 보스라이언도 여러 차례 미술관에 방문해 시민들과 음악회를 즐겼는데, 이때를 전쟁 중에 있었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 작품들이 다시 미술관으로 돌아오면서 1946년 4월 10일 마지막 음악회가 열렸다. 6년 반 동안 총 75만 명이 음악회를 다녀갔다. 전쟁 중 대중의 사기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은 헤스는 1941년 기사 작위급 훈장을 받았다.


1985년 세인즈버리 가문의 기부금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부서진 뒤 방치된 서쪽의 가구 공장 부지를 매입해 신관을 지을 수 있는 기금이 마련됐다. 미국의 건축가 로버트 벤추리와 그의 아내 데니스 스콧 브라운이 설계한 5층 건물 규모의 세인즈버리관이 1991년 개관했다. 지난 2005년 동관이 재정비되면서 미술관의 전체 전시면적은 4만6396㎡(14034.79평)로 늘었다. 한 해에 약 600만 명이 이곳을 찾는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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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국방일보 2020년 8월 31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kr/newsWeb/20200831/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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