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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Aug 24. 2020

폐허된 민주주의 ‘투명정치’로 재건

<59> 독일의 연방의회 의사당

독일 제국 위상 확립하고자 1894년 세워져

2차 대전 때 공습·시가전 겪으며 폐허 전락
‘민주주의 상징’ 투명한 유리 돔으로 재건축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 전경. 사진=completecityguides.com


베를린 중심부에 있는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은 독일의 굴곡진 현대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이곳은 프로이센이 보불전쟁에서 승리하고 독일을 통일한 이후인 1894년 완공됐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던 해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히틀러는 공산당의 책임으로 몰아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독일의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화재에서 완전히 복구되지 않고 방치됐던 의사당은 나치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연합군의 베를린 공습과 시가전으로 폐허가 됐다. 1990년 독일이 재통일되면서 재건축됐다. 노먼 포스터의 설계로 재탄생한 의사당의 상단에는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투명한 유리 돔이 있다.


프로이센 보불전쟁 승리하고 국가통일 이후 건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나라로 천 년의 역사를 써내려 온 독일은 1871년 프로이센이 보불전쟁(1870~1871)에서 프랑스에 승리하면서 하나의 국가로 통일했다. 독일제국은 국가를 상징하는 국회의사당을 마련하고자 1872년 설계 공모를 열었지만 무산됐다. 10년 후인 1882년 다시 열린 설계 공모에서 파울 발로트가 제출한 안이 채택됐다. 10년에 걸친 공사 끝에 1894년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의사당이 완공됐다. 건축에는 보불전쟁의 배상금이 활용됐는데, 총 2400만 마르크의 비용이 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전쟁으로 지친 국민을 독려하기 위해 의사당 건물 입구의 박공(맞배지붕의 측면에 人자 형으로 붙인 건축 부재) 아래에 ‘독일 국민에게(Dem Deutschen Volke)’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1933년 2월 27일 의사당 방화사건이 본회의장이 불타고 돔이 철거됐다. 나치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사진=www.britannica.com


1933년 의사당 방화사건, 정치적으로 이용한 나치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독일의 제1당인 나치당의 당수로서 총리에 임명된 후, 한 달 만인 2월 27일 의사당에서 방화사건이 일어나 본회의장이 불타고 돔이 철거됐다. 나치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히틀러는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몰며 공산당을 탄압하고, 힌덴부르크(1847~1934) 대통령을 설득해 수권법(授權法·행정부에 법률을 정립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나치는 이 법을 이용해 반대자를 숙청하고 감금하면서 독재 체제를 완성했다. 그 후 의사당은 복구되지 않았고, 나치는 맞은편에 있는 크롤 오페라하우스를 국회를 개최하는 데 활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베를린 공습과 시가전으로 파괴된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 사진=www.ww2online.org


베를린 공방전으로 의사당 함락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반유대주의 노선을 극대화한 나치가 전쟁 준비를 하면서 의사당을 비롯한 베를린에 위기가 찾아온다. 독일은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하고 이듬해 프랑스까지 점령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우위를 점했다.


1941년 독소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면서 독소전쟁(1941~1945) 초기에도 승승장구했지만, 동부로 지나치게 전선을 넓힌 것이 결국 패착이 된다. 1944년 8월 소련군이 동부 폴란드와 벨라루스에 포진해 있던 독일군을 붕괴시키기 위해 진행한 바그라티온 작전이 성공하면서 독일에 패색이 짙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서부전선에서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해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 본토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1945년 5월 2일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에 국기를 게양하는 소련군을 정훈장교 예프게니 칼데이 중위가 연출해 촬영했다. 사진=time.com


베를린 공방전은 1945년 4월 16일부터 5월 8일까지 독일이 연합국, 특히 소련군에 항복할 때까지 펼쳐졌다. 소련군은 4월 30일 독일의 심장이자 베를린의 상징인 의사당에 도달했다. 의사당 구역은 독일의 제11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독일 제3제국 무장친위대 소속의 외국인 의용군 사단)가 수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적은 병력에도 육박해 오는 소련군에 맞서 12시간 동안이나 의사당을 방어했다. 이는 티어가르텐을 사이에 두고 불과 2㎞ 떨어진 베를린 동물원 자리에 있던 대공포탑의 화력 지원으로 가능했다. 소련군은 대공포탑에 사절을 보내 항복시켰다. 대공포탑의 병력들이 항복하자마자 의사당이 함락됐다. 패배를 직감한 히틀러는 이날 자결했다.


베를린 주둔 독일군은 5월 2일 항복했지만 전투가 계속 벌어져 독일은 5월 8일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하지만 소련이 영국·프랑스·미국에 항복한 날짜라면서 인정하지 않자, 독일은 5월 9일 다시금 항복했다.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의 상징인 중앙의 거대한 유리 돔. 독일의 투명한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사진=www.archdaily.com


노먼 포스터의 돔 설치안으로 1999년 완공


종전 후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면서 의사당은 서독의 서베를린 지역에 속하게 됐다. 서독은 수도를 베를린이 아닌 본으로 정하면서 이곳은 더 사용되지 않고 폐허인 채로 남았다. 재건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이어지다가 1970년대 파울 바움가르텐에 의해 재건됐다. 1990년 독일이 통일한 후에 역사적인 첫 연방의회가 의사당에서 열렸다.


독일은 통일의 의미를 담고 새로운 독일의 지향점을 다지기 위해 의사당의 재건축을 추진했다. 1993년 국제 공모전에서 의사당의 벽을 제외한 건물의 모든 골격을 뜯어낸 뒤 내부의 회의장 천장 위로 유리와 알루미늄으로 만든 돔 설치를 제안한 노먼 포스터의 안이 채택됐다. 1999년 4월 공사가 완료됐다.


이곳의 총면적은 61,166㎡(1만8502평)이며, 최대 높이는 47m이다. 연방의회 의사당은 전쟁과 분단을 딛고 일어선 독일의 상징으로 지금도 불을 밝히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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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국방일보 2020년 8월 24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200824/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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