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크로아티아의 필레 관문
라구사 공화국 수도 두브로브니크 방어
베네치아 위협부터 유고 내전까지
여러 전쟁 견뎌와…곳곳에 폭격의 흔적
크로아티아 독립투쟁에 도시 68% 파괴
유럽 지성인들 인간 사슬되어 도시 지켜
1979년 구시가지 함께 유네스코 등재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남부에 있는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유럽 최고의 휴양지 중 하나.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지상에서 살면서 과연 천국이 어떤지 미리 맛보려면 두브로브니크에서 살아보라”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두브로브니크가 라구사 공화국의 수도였던 15세기에 지어진 필레 관문(Pile Gate)은 수 세기 동안 도시를 지키는 통로 역할을 했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1808년 이 문을 통과해 라구사 공화국을 멸망에 이르게 했다. 두브로브니크는 유고 내전(1991~2001) 중에 대규모로 폭격을 당했는데, 다행히 필레 관문은 보존됐다. 필레 관문을 비롯한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는 1979년과 2004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1472년 서쪽서 도시 들어가는 문으로 건설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어로 ‘참나무 숲’이라는 뜻이라는 ‘두브라바(Dubrava)’에서 유래됐다. 이곳은 7세기에 도시가 형성돼 9세기부터 발칸반도와 이탈리아의 무역 중심지로 막강한 부를 축적했으며, 11∼13세기에 금과 은을 수출하는 항구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두브로브니크는 십자군 전쟁(1095~1291) 중인 1205년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 아래에 있다가 1358년 독립해 자치 도시국가인 라구사 공화국의 수도가 됐다. 라구사 공화국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10세기에 건설된 두브로브니크 성벽을 증축했다. 성벽은 해안을 따라 도시를 감싸고 있는데, 총 둘레는 총 1940m, 최고 높이는 25m에 달한다.
성벽 동쪽에 플로체 문이 있고, 서쪽에 필레 관문이 있다. 필레 관문을 지나면 두브로브니크의 중심가로 향하는 플라차 대로로 이어진다. 이곳은 아치형의 내부 문과 외부 문으로 구성돼 있다. 1472년 건축가 파스코예 밀리체비츠(1440~1516)가 고딕 양식의 석조로 내부 문을 건축했다. 이 문이 지어졌을 때 다리 아래로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가 있었다. 1537년 외부 문이 세워졌는데, 수로 위로 놓인 도개교(배가 지나갈 때 다리가 한쪽 또는 양쪽으로 들어 올려져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든 다리)를 통해 연결됐다.
매일 밤 수문장이 도개교를 닫으며 도시를 지키는 관문 역할을 했다. 문 위에는 도시의 수호신인 성 블라호(?~316)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0세기에 성 스테판 성당의 스토이코 신부의 꿈에 나타나 베네치아 군대가 침공해오고 있다고 알려 도시를 구한 인물로 전해진다.
나폴레옹이 필레 관문 거쳐 공화국 점령
15세기와 16세기에 베네치아 공화국과 슬라브족, 오스만제국의 위협에 직면한 라구사 공화국은 수도의 방어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1.5m에 불과한 성벽의 두께를 해안 쪽은 3m, 육지 쪽은 6m까지 강화했다.
1667년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총 인구는 3만 명 중 20%가량인 5000여 명이 사망하고 도시 전체 건물의 75%가 파괴됐다. 도시는 서서히 복원됐으나, 더 큰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18세기에 프랑스 대혁명(1789~1794)으로 급부상한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1808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두브로브니크로 쳐들어와 필레 관문을 통과하고 라구사 공화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나폴레옹이 세운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로 편입됐다가 1815년 빈 의회 결의안에 의해 오스트리아 제국에 합병됐다. 시간이 흘러 1918년 세르비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왕국에 편입됐다.
1999년부터 대대적 복원
전쟁의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크로아티아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부터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등과 유고슬라비아 연방(유고)을 이뤘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가 주축이 된 유고군은 이들의 독립을 막기 위해 6월 27일 슬로베니아를 침공했다. 이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 등지로 전선이 커지며 유고 내전이 발발했다. 1991년 10월부터 유고군은 두브로브니크를 완전히 봉쇄하고, 도시에서 가장 높은 해발 415m 스르지 산에서 2000발이 넘는 융단 폭격을 가했다. 도시에 있던 800여 개의 건물 중 68%가 무너져 내렸고, 성벽과 필레 관문도 피해를 입었다.
당시 프랑스의 학술원장이었던 장 도르메종(1925~2017)을 중심으로 유럽의 지성인들이 폭격을 중지시키기 위해 인간 사슬을 만드는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세계 각국의 외교적 압박이 더해지면서 3개월에 걸친 폭격이 멈춤으로써 두브로브니크는 폐허로 전락할 위기를 모면했다. 도시는 유네스코와 국제 사회의 지원으로 1999년부터 대대적으로 복원됐다.
1950년부터 시작된 두브로브니크 여름 축제는 매년 7월 10일부터 8월 25일까지 연극, 오페라, 발레 등 다채로운 공연이 곳곳에서 펼쳐지는데 올해로 71회를 맞았다. 7월 10일이 되면 필레 관문 위에 ‘자유(Libertas)’라는 글자가 크고 선명하게 적힌 깃발이 세워진다.
라구사 공화국 시절에 만들어진 자유 찬가가 축제 시작 때에 불리는 이유도 있지만, 내전의 상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시 여러 곳에는 아직도 파편과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필레 관문은 전쟁으로 억압받았던 자유를 일깨워주며 오늘도 관람객들을 맞는다.
<이상미 문화·예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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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국방일보 2020년 11월 2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20201102/1/BBSMSTR_000000100082/view.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