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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아트 Feb 27. 2020

전투는 끝났지만…이곳은 여전히 역사 전쟁 중

<34> 중국의 만리장성

기원전 657년 춘추전국시대 때 시작
시황제가 중국 통일 후 하나로 연결
수많은 백성 건축 동원돼 목숨 잃어
길이 5660㎞의 ‘거대한 무덤’ 악명
고구려·발해 성곽도 일부라고 주장
‘中 동북공정’ 역사 왜곡 논란 계속  

                                                        

만리장성 전경. 사진=www.workandliveinchina.com.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중국이 북방 유목민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은 성벽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건축물이다. 중국에서는 장성(長城)이라고 부르고, 서양에서는 ‘중국의 성벽(Wall of China)’ 또는 ‘대성벽(Great Wall)’이라고 칭한다. 춘추전국시대에 북방과 국경이 맞닿은 연·조·진나라는 기원전 5세기경부터 북쪽에 성벽을 건설했는데 기원전 221년 진의 시황제가 중국 통일 후 이를 하나로 연결한 것이 장성의 시작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북방과 남방의 경계선 역할을 한 장성을 강화하기 위해 보수하거나 개축했는데, 명나라 시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의 만리장성이 완성됐다. 장성은 전쟁이 없던 시절에는 교역 시 발생하는 관세를 거둬들이는 장소로 사용됐다가 유사시 병사들의 군사 거점으로 활용됐고, 장성에 설치된 봉수대는 적의 침입이나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통신수단으로 사용됐다.  


초나라가 세운 장성이 기원

장성의 기원은 영토국가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생긴 춘추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장성은 기원전 657년 초나라에서 세웠다. 초나라는 남방에서 광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하남성 등 중원 국가들의 영토를 빼앗으면서 서서히 북진했는데 다른 중원 국가들에 둘러싸인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영토 전체를 둘러싸는 방어용 성벽을 세웠다. 기원전 4세기 연·조·진·한·위·제나라에서 잇따라 영토 보존과 전략적 차원에서 성벽을 건설했다. 이 중 북방 유목민족과 접해 있던 연·조·진나라는 유목민족을 견제하기 위해 북쪽에 성벽을 쌓았다.

작가 미상의 진시황제의 초상화. 사진=www.pinsdaddy.com


진시황제가 기존 장성 연결

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시황제(BC 259~210)가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다. 시황제는 북방 국경을 강화하고자 몽염 장군에게 장성 축조를 명했다. 기원전 214년경 완성된 장성은 연·조나라가 세운 성벽을 수리하고 연결해 동쪽으로 요동(현재 랴오닝 성)에 이르렀고 서쪽은 임조(현재 간쑤성)에 이르렀다.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진 황제 시대의 장성을 ‘임조로부터 요동까지 연결된 것이 만여 리’라고 기록했다. 이때 ‘만리(萬里)’에서 ‘만’은 ‘매우 길다’라는 뜻이다. 장성 축조에 동원된 인원은 죄수를 비롯해 건장한 성인 남성으로 30만~10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많은 인원이 장성을 짓다가 목숨을 잃었다. 결국 민심을 잃은 진나라는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의 봉기로 대표되는 백성들의 난이 벌어진 후, 시황제 사후 4년 만에 멸망했다.

기원전 206년 한고조 유방(BC 247~195)이 진나라에 이어 한나라를 세운다. 유방은 기원전 200년 전차 중심의 32만 대군을 이끌고 장성을 넘어 침입했던 흉노족의 기마 군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결과는 흉노군의 대승이었다. 유방은 흉노와 화친을 맺어 솜과 비단, 술 등의 방대한 물자를 상납했지만 흉노의 약탈은 끊이지 않았다. 제7대 황제인 한무제 유철(BC 156~87)이 곽거병과 위청을 보내 흉노를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장성은 서쪽의 옥문관까지 확장됐다. 기원전 133년 이후 흉노의 침입이 다시 늘자, 무제는 장성 각지에 지휘소와 봉화대를 설치하도록 하고 방어체제를 한층 더 강화했다. 하지만 후한 말 사회 혼란과 분열로 장성은 방치됐다.

만리장성 전경. 사진=www.journeysinternational.com


수나라 7차례 증축, 명나라 18차례 증·개축

5세기 진나라와 수나라의 중간 시대인 남북조 시대 때 국가인 북주와 북제가 장성의 성벽을 대규모로 축조한다. 중국을 통일했던 수나라의 문제(541~604)는 북방의 돌궐에 대응하기 위해 장성 축조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 장성을 보수하고 오르도스 지방에 새로운 장성을 쌓았다. 수나라 제2대 황제인 양제(569~618)는 장성의 건립에 큰 공을 들였는데, 수나라가 존립한 38년 중 28년 동안 7차례나 증축됐다. 수나라에 이은 당나라는 돌궐 침입을 방어하는 용도로 장성을 증축했지만 실크로드를 통한 활발한 교역으로 포용적인 이민정책을 펼치면서 장성의 역할은 크게 줄었다.

당나라 이후 활용도가 낮아진 장성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중요성이 다시 부각된다. 1368년 명나라 최초의 황제인 주원장(1328~1398)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대대적인 장성 공사를 시작했다. 제3대 왕인 영락제(1360~1424)가 명나라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몽골의 재침략을 막기 위해 장성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명나라는 18차례에 걸친 증·개축을 통해 오늘날의 장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1644년 만주족이 명나라를 무너트리고 청나라를 세우며 장성은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 청나라가 장성보다 더 북쪽인 몽골까지 지배하면서 활용도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청나라군이 베이징에 입성할 당시 장성은 청나라군에게 뚫린 것이 아니라,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농민 반란 지도자 이자성의 반란군을 토벌할 때 청나라군의 힘을 빌리고자 문을 열어줬기에 무혈입성이 가능했다.

우주공간에서도 보이는 건축물?

중국의 거리 단위인 리(里)는 0.5㎞다. 장성의 총 길이는 1만1300리(5660㎞)로 1만 리(약 4000㎞)를 넘는다. 장성의 폭과 높이는 지어진 지형과 군사적 중요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고비 사막이나 북방에 건설된 성벽은 폭이 1~2m에 불과하지만, 베이징의 바다링 지역은 성벽을 모두 2~3중으로 쌓았고 폭도 3~10m에 달한다. 높이의 경우 낭떠러지 같은 곳은 3~4m이며, 주요 요충지는 8m가 넘는 곳도 있다. 한때 ‘우주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건축물’이라는 속설이 있었으나, 지난 2004년 12월 8일 중국과학원은 “사람의 눈으로는 우주 공간에서 만리장성을 관측할 수 없다”고 밝혔다.


1933년 만리장성에 싸우고 있는 청나라 군인들의 모습. 사진=www.thetimes.co.uk


1933년 열하사변 때 산해관에서 벌어진 장성의 마지막 전투

장성이 마지막으로 전쟁사에 기록된 것은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벌인 만주사변 이후의 ‘열하사변(熱河事變)’이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193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후손인 푸이를 내세워 동북부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군은 1933년 1월 30일 일본 본토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인 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을 점령한 뒤, 2월 23일 관동군 스파이 총살사건을 빌미 삼아 열하성을 공격해 만주국에 합병시키고 결국 베이징을 함락했다.

만리장성은 수많은 백성이 건축에 동원돼 목숨을 잃은 건축물로 거대한 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장성에서의 전쟁은 끝났지만 중국은 2000년대 들어 동북공정을 통해 문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 정부는 2004년부터 고구려의 박작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해 호산장성이라 부르며 장성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또한 발해와 만주 등의 북방 왕조의 성곽까지 장성에 포함하며 역사 왜곡 논란을 불러왔다. 중국 정부의 역사 왜곡이 멈췄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20년 2월 24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200224/1/BBSMSTR_00000010008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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