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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원쌤 Aug 10. 2018

혁신학교와 공교육의 숙명

교사의 탄생

익숙함이라는 함정

일반적으로 우리가 학교라고 말하는 곳의 대부분은 국민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공교육을 말한다. 싫든 좋든 공교육을 받고 자란 국민들이 지금의 나라를 있게 했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공교육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음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진짜 우리의 공(公)교육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아니면 공(숫자 0)교육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시간만 보내는 교육이 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갈림길에 서 있는 공교육에 ‘혁신’이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한 학교가 바로 혁신학교다. 교육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인 교사들이 함께 모여 만든 학교다. 공교육이 다시 자신의 진짜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 주변의 물건들에 맞추어 살아간다. 오랜 세월 세상이 다 변했지만 유독 변화를 비껴간 곳이 있다. 바로 학교다. 왜 학교는 변화하지 못했을까? 학교는 여전히 창과 문사이에 책상과 칠판 그리고 교과서가 놓여 있다. 앞으로의 학교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지 싶다. 물리적인 환경을 하루 아침에 바꾸긴 쉽지 않다. 물리적인 환경이 바뀌기 쉽지 않으니 손 놓고 있어야 하는 걸까? 아니다. 기존의 물리적인 것들을 그대로 두고서도 우리는 변화할 수 있다. 기존의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보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 지난 날을 디딤돌 삼아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미래를 꿈꾸는 학교가 혁신학교다. 익숙함을 버리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교육이 본래 꿈꾸던 모습으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

혁신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여럿 있겠지만 난 슘페터(Joseph A. Schumpeter, 1883 ∼1950)의 ‘창조적 파괴’에 흥미를 가졌다. 슘페터는 자본주의를 냉철하게 바라본 이론가로 자본주의의 기업가들은 ‘부단히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여 끊임없이 내부에서 경제구조를 새롭게 하는 행위 즉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를 통하여 자본주의를 지속적으로 변화시켜 나간다’고 주장한다. 부단히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여 끊임없이 내부에서 새롭게 하는 행위가 우리 교육에도 필요하지 않은가? 내가 생각한 혁신학교의 모습은 이러하다. 서로 대치되는 개념인 것 같지만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단어 ‘창조’와 ‘파괴’ 의 어울림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우리가 해야하는 혁신학교는 이러한 것을 동시에 수행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파괴, 창조 그리고 몰락


혁신학교의 첫 시작에서 빠지지 않았던 행위는 기존의 것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가진 낡은 사고와 고정관념들을 파괴하지 않고선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혁신학교라는 곳은 창조와 파괴가 동시에 일어나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슘페터는 이러한 창조적 파괴가 자본주의를 성장 시키겠지만 결국엔 자본주의가 몰락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슘페터는 자본주의는 결국 사회주의가 될 것이라 보았다. 그 이유가 자본주의가 눈부신 성장을 이뤄서라고 한다. 재미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적인 생각들이 더 이상의 창조적 파괴를 허용하지 않게 되고 (일정수준 이상이 되었으니 더 이상의 모험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 결국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이 혁신학교와 공교육에도 비슷하게 적용될까?

혁신학교의 운명은?

혁신학교의 도약으로 우리 공교육의 질적 수준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교육에 대한 화두에 좋은 영향을 준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혁신학교 일반화 이야기가 나온다. 혁신학교의 일반화는 궁극적으로 공교육의 질적인 성장을 위한 것처럼 보이고 옳은 방향이다. 하지만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처음 대안학교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을 때 대안학교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대안학교는 공교육이 보듬지 못하는 학생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학교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최근의 대안학교들은 어떠한가? 여전히 초창기 대안학교와 같은 의미의 학교도 있지만 새로운 형태의 학교나 자유로운 학교교육을 찾아서 가고 있다. 대안이라기 보다는 다양한 교육수요에 답하는 새로운 형태의 학교종류라는 의미가 더 어울리지 싶다.


상상력이 필요 없는 혁신학교?


혁신학교도 마찬가지다. 혁신의 의미가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을 전제로 펼쳐 질 때 그 혁신은 더 이상의 상상력이 필요치 않은 혁신이 될 수밖에 없다. 교육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말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예전 우리 교육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시대와 어울리면서도 기존의 것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기반이 된 교육의 본질 찾기가 혁신학교의 진짜 모습이다. 그러자면 혁신학교는 무한한 상상력을 실험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대안학교는 정말 대안적인 교육으로 남아있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이러한 것들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어느새 슘페터의 예상대로 자본주의의 합리적인 성격이 자본주의를 무너뜨린 것처럼 대안학교나 혁신학교가 공교육을 오히려 무너뜨리는 결과를 만들까 두렵다. 대안이고 혁신학교고 모든 학교는 다 똑같이 희망이 없는 곳이라고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 한다면 말이다. 이러한 생각이 혼자만의 기우이길 바란다.


대안이 주류가 되고

혁신이 일반화 되기를 바라는 것은

현실을 가장한 대안이고

과거 답습을 위한 혁신일 뿐이다.


대안은 대안이 필요했던 그 당시의

필요가 사라지면 소멸하고

혁신은그당시를넘어

상상력이 필요할 때 제한없이 상상하도록

일정기간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러한 상상력에 영향을 받아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것은

남겨진 사람들의 몫일 뿐!


_2014년 혁신학교 일반화를 보며 생각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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