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닿는 마음

Love is the only universal language 사랑한다

by 이비

-소리보다 마음이 먼저 전하는 것

나는 20대 끝자락, 해외 브랜드 매니저로 일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디스플레이에 필요한 물품이 급히 모자라 퀵을 불렀는데, 기사님이 매장을 찾지 못해 한참 동안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오셨다.

나는 약도까지 펜으로 그려 사진을 찍어 보내드리며안내했다. 결국 근처 화장실 앞에서 만나기로 했고, 땀에 젖은 얼굴로 다가온 기사님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제가 영어를 못해서, 읽지를 못해서 늦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너무 죄송합니다“

그분은 내 아버지 또래의 나이로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간판에는 한글보다 영어가 훨씬 많았다.

마치 우리 땅에서조차 우리 글자를 찾기 힘든 풍경 같았다. 그날 이후 나는 다짐했다.

"무엇을 하든, 내 상호명은 반드시 한글로 하겠다."




그 다짐은 3년 후 내 브랜드가 생겼을 때 지켜졌다. 나는 한글 이름으로 매장을 열었고, 결국 그 이름은 내 이름이 되었다.




사실 나는 어린 시절, 한글을 모르는 친할머니께 글을 가르쳐드린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 경험이 내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불편함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작은 손길이라도 건네고 싶게 만드는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청각장애인이기에, 더 잘 보이는 장면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내 작가명은 외할머니의 이름에서 왔다.

출생신고를 하던 날, 이장님이 외할머니를 보고 예쁘다, 예쁘다" 하시다가 '이비'라는 이름이 되었다고한다. 나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개명을 결심했을 때 외할머니의 이름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사연상 쓸 수 없었고, 대신 작가명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할머니의 '이비'는 예쁘다의 이비었지만, 나의 '이비'는 귀(耳)와 코(鼻)의 한자를 담았다. 청각이 약해진 대신, 내게는 후각이 더욱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향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내게 세상은 언제나 냄새로 말을 걸어왔다. 어린 시절, 할머니 품에서 맡던 쑥향의 따뜻한 숨결은 나를 감싸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가 만든 매장을 채운 건 싱그러운 풀향과 시트러스의 산뜻한 향기였다. 그것들은 나의 언어이자, 내 이름이 되었고, 내가전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돌이켜보면, 퀵 기사님이 영어를 몰라 허리를 굽히며 사과하시던 모습에서 나자신을 보았다. 나는 늘 "잘 들리지 않아, 죄송합니다"라고 고개 숙이곤 했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게 잘못은 아니듯, 듣지 못하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다만 세상의 기준이 우리를 더 작아지게 만들 뿐이다.




수어를 배우면서 알았다. 수어는 전 세계 공통어가 아니다. 하지만 오직 한 단어, '사랑한다'는 수어만은전 세계 어디서든 통한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사랑한다라는 말의 수어이다



AI가 눈부시게 발전하는 요즘, 나는 바란다.

언젠가는 눈이 잘 보이지 않아도, 귀가 잘 들리지 않아도, 배우지 못해도, 서로의 언어를 몰라도

단 한 번의 온기만으로 대화가 닿는 세상이 오기를.

그리고 그 세상에는, 말 대신 향기로 기억되는 이름들이 오래도록 남기를.




내 브랜드의 향기는, 불편을 안아주는 따뜻함과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기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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