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ot and leaf 아빠와 나
-그는 내가 기대는 침묵이고, 나는 그에게서 끝없이 머무는 메아리입니다.
한 번도 아빠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아빠는 청각장애인이었지만, 누구보다 단단한 사람이라는 걸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내 귀가 잘 들리지 않아도,
긴 다리와 닮은 눈매를 물려받은 건 축복이라 생각했다.
그건 세상이 내게 건넨, 갓 지은 밥냄새 같은 따뜻한 선물이었으니까.
아빠의 삶은 언제나 묵직한 인내로 익어 있었다.
청소년기의 폭풍 같은 시절을 지나,
엄마와의 결혼, 그리고 우리를 키워내기까지.
그 어떤 순간에도 아빠는 자신을 탓하지 않았고,
나는 그런 아빠를 탓할 수 없었다.
아빠는 내게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부심이었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던 멋진 아빠,
자상하고 똑똑한,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내 아빠.
그 품엔 언제나 햇볕에 말린 이불 냄새처럼 포근한 온기가 배어 있었다.
그런 아빠와 함께 청각진단을 받던 날이 있었다.
의사실 문을 나서자, 아빠 얼굴에 낯선 그늘이 드리워졌다.
나는 일부러 웃으며 말했다.
“아빠, 여기 알밥 맛있대! 우리 가자!”
그날 아빠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손끝엔 칡향처럼 진한 마음이 묻어 있었다.
나는 웃었지만, 아빠의 눈빛엔
젖은 흙냄새처럼 깊고 눅진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시간이 흘러, 18년 뒤.
나도 아빠처럼 청각장애인이 되었다.
그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빠, 나 드디어 청각장애인이 됐어. 너무 행복해.”
그 말을 듣는 아빠의 얼굴은
예전에 판정받던 날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그 표정엔 안도의 미소와 오래 참아온 눈물이 함께 비쳤다.
아빠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 딸이 장애인이 된 걸… 아빠가 축하해도 되는 걸까?”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응, 축하해도 돼. 내가 행복하니까.”
아빠도 귀가 안 들리고 싶어서 안 들리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의 아빠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가,
어쩌면 나처럼 절실히 필요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제야 알겠다.
아빠도, 나도 서로에게 향기였다.
때로는 갓 지은 밥냄새처럼 마음을 채우고,
때로는 칡꽃이 피는 밤처럼 은은히 이어지며,
우리는 서로의 침묵을 이해했다.
한 번은, 씻고 나온 나를 부르던 아빠가
내가 여러 번 불러도 듣지 못하자
옆에 있던 엄마에게 말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평생 지켜주자.”
그 말은 넓은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나무의 향기처럼
묵직하고 고요하게 내 마음에 남았다.
그날 이후 나는 알았다.
바람에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나의 아빠는
내가 덩굴이 되어 평생 곁에 머무르고 싶은,
나의 기둥이자 나의 세계라는 걸.
아빠, 미안함도 죄책감도 고마움도 가지지 않아도 돼.
그냥 지금처럼 사랑해 줘.
아빠의 장애는 나와 아빠를 이어주는
향기 같은 연결고리야.
나는 오래도록 아빠와
녹차 한 잔의 여운처럼 조용히 머물고 싶다.
삶이 천천히 식어가도,
그 향이 오래도록 남았으면 좋겠다.
사랑해요,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