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박물관 한글날 행사
10월 9일 한글날. 한국어를 전공하고 한국어 교육에서 일하기 전부터도, 한국인으로서 특별했던 날.
2025년의 10월에는, 런던 영국박물관에서 한글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Why we write: writing systems and human story 라는 제목의 대중 강연/토론 행사를 개최했다. 한글뿐만 아니라 인류 최초 문자라고 하는 Cuneiform 쐐기문자, Greek Alphabet을 같이 해서 세 문자 체계 전문가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였다. 나는 믿을 수 없게도 그 행사의 사회자를 맡는 영광을 누렸다. 담당자가 연락을 해 왔을 때, 이런 대중 행사 사회를 맡아본 적은 한국에서도 없고, (사실 한국에서였다면 경험은 없을지언정 더 쉽사리 해 보겠다고 했을 테지만) 그 유명한 영국박물관 행사에서 각 문자 전문가 교수님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자신은 쉽게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충분히 할 수 있고 내가 제일 적임자라고 하는 담당자 샘의 말에, 그리고 한글이 영국박물관에서, 최고 (最古) 고대 문자들과 함께 다뤄질 수 있다니 하는 마음에, 행사 거의 4개월 전에 승낙을 해 버렸다. 멀게만 느껴지던 행사 일자는 금방 다가왔고, 학기 시작과 집 이사 등 번다한 가운데서 준비를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 가득했던 순간도 많았지만, 늘 길을 예비하시고 능력 주시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그리고 아주 즐겁게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행사는 영국박물관 중앙에 있는 돔형의 reading room (예전에 영국도서관 분리하기 전 도서관으로 쓰이던 곳)에서 이루어졌다. 보통 이런 대중 강연은 10파운드 입장료를 내고 예약하는 식으로 하는데 이 행사는 한국 문체부 지원으로 무료였고 행사 한달 전에 이미 매진이었다.
쐐기문자 Cuneiform 은 영국에서는 워낙 영국박물관에 무려 130,000여 개에 이르는 점토판이 보관돼 있기도 하고 해서인지 영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역사책으로만 봤을 뿐이었는데 여기는 어쩌면 갑골문 Oracle bone 도 그렇고 실제 소장돼 있는 게 많은지, 아니면 케임브리지 도서관 사서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것들에 더 눈이 트였는지 모르겠다.) 무려 3,000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고, 연대를 추적해보면 단연 다른 문자보다 시기가 앞서 있음이 상당히 확실하다고 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꽃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에 퇴적되는 흙으로, 갈대로 위에 써서 굳히면서 점토판에 쐐기문자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국박물관에 대거 소장돼 있는 아직 다 미처 해독할 수 없이 많다고 하는 쐐기문자 콜렉션 덕분인지, 영국박물관 큐레이터 Dr Irving Finkel 은 이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이신 듯하다. 유튜브에 찾아보면 정말 많은, 그가 출현한 비디오들이 나오는데, 그 주제 또한 굉장히 다양해서 성경 노아의 방주와 유사한 홍수 이야기, 인류 최초의 보드게임 규칙, 도서관, 퇴마술 등 쐐기문자를 해독하면서 엿볼 수 있는 고대 문명은, 5,000년의 시간 차이가 무색하게 현대적 기준으로 보아도 다채롭고 풍성하다.
언어학적으로는 쐐기문자의 획들이 처음에 숫자를 표시하기 위해 긋던 선들에서 출발해서,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초기에는 형상을 나타내다가 (Ideograph) 나중에는 소리를 표시하면서 음절 문자 (Syllabic writing)으로 그 면모가 변화했다! 얼마나 효율적인 변화인가. 동아시아에서 표의, 음절, 음소 문자를 접하고 지내온 나로서는 이러한 거대한 변화가 대단히 흥미롭게 여겨졌다. 또한 쐐기문자는 다양한 언어들 - Sumerian, Hitite 등-에 모두 쓰였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그래서 각기 다른 언어마다 다른 쓰기 용법을 발전시켰고, 쐐기문자는 그래서 정말 어마무시하게 복잡한 문자가 되어버리고 Dr Finkel의 의견으로는 그것이 1세기에 더이상 사용되지 않게 된 한 원인으로 여겨진다고.. 그 복잡한 용법 중 한 예는 같은 문자가 때로는 소리로, 때로는 의미로 다르게 사용되는 것이었는데 사실 한국에서 차자표기-향찰, 이두-와도 유사한 발상이라서 이또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쐐기문자는 Dr Finkel의 대활약으로 유튜브에 풍-성한 전문지식 강연들이 제공되고 있다.
반면 고대 그리스 문자에 대해선, 전문적인 지식을 쉽게 설명한 강연 자료 등은 쉽게 찾을 수 없었기에 차라리 우리 행사 강연자인 Professor Stephen Colvin (UCL)이 지은 고대 그리스어 입문과 같은 책이 좋은 참고가 되었다. Acient Greek이라고 특별히 지칭함은, 현대 그리스어 Modern Greek 과 문법 등 많은 측면에서 큰 변화가 있어서 고어로서 구분을 하는데, 반면에 문자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 또한 놀라운 점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문자라고 하는게 아니라 그냥 그리스 문자, 특히 Greek Alphabet으로 지칭하는 것이 적절한데 왜냐하면 Greek 문자는 Phoenician writing 의 영향을 받아서 음소적 표기로 나아갔고 특히 다섯 개 모음 문자를 도입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2세기 미케네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당시에도 쐐기 문자가 있었다.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문자들이 Linear A, B 등 문자가 있었는데 이러한 문자들 중에는 아직도 해독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쐐기문자를 쓰지 않았고 페니키아 문자에 영향을 받았는데 페니키아 문자는 Semitic 언어를 표시하는 것으로 모음이 없고 자음만 있는 Abjad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 페니키아 문자의 음소들-자음-을 가져와 자신의 언어에 걸맞게 변형했는데 그러면서 다섯 개 모음자를 만들었다. 그리스 문자는 많은 부수적인 문자들을 양산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지금 현재 유럽어에서 대체로 쓰이는 문자 체계인 Roman Alpahbet이다. 영어도 그 덕분에 다섯 개의 모음자만을 가지고 있는데 반면에 이중모음 갯수는 20개 즈음이라서 이 모든 복잡한 스펠링은 사실 그리스 문자의 매우 적은 모음자 수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그리스 문자는 도시 문명에서 매우 실용적으로 다방면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법을 기록하거나 장식적으로 컵에다가 기록을 하거나 등등이다. 당시 그리스에서 발달했던 철학, 과학, 정치 체제에도 어떻게 기여했는지는, 아직 더 증거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한다. 나의 이해로는 쐐기문자가 왕과 전문 기록사 등 지배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것과 달리 그리스 문자는 최소한 도시 국가의 시민들은 모두 이용하게 되는, 보다 민주화된 현대적인 문자 소통으로 사용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대망의 한글. 무려 15세기 문자라서 쐐기문자나 그리스 문자에 비하면 신상중의 신상이다. 세종대왕의 숭고한 뜻으로, 한국어를 표시하기에 적합하게 개발된, 당시 근방에서 최초로 음소문자로 만들어낸, Sampson 학자는 전 세계 유일한 자질 문자 (feature writing)라고까지 했던 자랑스러운 문자 아닌가. 청중 한명은, 대체 세종이 어떻게 음소 문자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인가, 어쩌면 라틴 문자를 접했던 거 아닌가, 이런 이야기도 했다. 다행히 우리 한글 패널로 자리하신 Dr Anders Karlsson 은, 적절하게도, 그랬을 가능성은 없고, 당시 중국 언어학에서는 성모와 운모로 구별하던 것을 세종은 한국어에 맞게 하려면 더 분리해야된다고 생각낸 것 같다, 몽골의 파스파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이 있지만 일부의 의견이고 검증되지 않았다 이렇게 답변해 주셨다. 한국어를 가르칠 때마다 느끼는, 음소문자이면서도 음절을 드러내는 점, 초성과 종성에 같은 자음자를 쓰는 점, 음절 사각형 안에 아름답게 배치한 점, 모음자들에서 재출자로 이중모음자들을 만든 것 등은 감히 내가 보기에도 탁월한 부분들이다.
또한 여성과 하위 계층 백성들이 쉽게 지식, 문화, 예술에 접할 수 있게 한 점, 서민문화를 꽃필 수 있게 한 토대가 된 점 - 판소리 소설을 한글이 아니라 차자표기로도 그리 생생하게 써 낼 수 있었을까?- 등 한글 관련 자랑할 이야기들이 그 짧은 1시간의 강연에 거의 다 다뤄질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정말 카슨 교수님께 감사를 드렸다.
패널들은 이렇게 흥미진진한 문자 세계를 시대와 지역을 넘나들며 풀어내시고, 아마 언어와 역사 덕후일 것이 분명한 청중들도 너무 행복한 표정으로 계속 즐겁게 강연과 토론을 즐기고 있었다. 나 또한 이 시간이 마침표까지 알차고 행복한 시간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진행에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각기 다른 문자 체계를 한 자리에서 다루는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데에 패널들도 너무 즐거워하셔서, 이런 일을 꼭 자주 했으면 좋겠다, 다룰 문자가 정말 많다 이런 얘기가 오갔다. 한글에 얽힌 너무나 매력적인 이야기들을 영국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어서, 또 최고의 전문가들에게 인류 역사와 문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 특별하고 즐거운 시간이었고, 거기에 사회자로 참여할 수 있어서 더없는 영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