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왜 가이드가 없나요
삶은 예측 불가능이잖아
불금엔 무조건 사람이 많은 곳에 놀러 가서 미친 듯 떠들고,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이번 주도 잘 견뎠다! 이제 알코올로 무거워진 몸을 침대에 딱 붙인 채 자는 거야'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원래 내 일상이었다.
내가 금요일에 '제정신인 채로' 책상에 앉아 잔잔한 노래를 들으며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을 줄이야. 아무도 몰랐겠지. 게다가 대한민국 사람들이 강제 집순이가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삶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다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
일상이 90도쯤은 달라져 무기력을 느낄 때쯤. 바뀐 환경에 적응해야 어른이지? 생각하며 운동을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29년 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내 건강이라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유튜브 채널로 홈트를 했고, 어느 정도 운동할 준비가 된 것 같아 PT를 끊었다. 선생님에게 칭찬받으며 하루하루 재미있게 몸을 불태우고 있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시행되고(!) 헬스장은 문을 닫고 만다. 아. 역시 삶은 정말 예측 불가능하구나!
그런데 요리는 확실해서 좋아
내가 요리에 관심이 생긴 건 이때쯤이다. 헬스장까지 못 가게 되자, 집에서라도 건강 관리를 해야만 했다.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 한다면, 먹는 거라도 제대로 챙겨야 하지 않을까? 비록 멋진 요리는 하지 못하더라도, 내 배를 불려줄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면 나름 소소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유튜브를 켰다. 요즘은 유튜브에 검색만 하면 뭐든 나오는 세상이니. 아니나 다를까, 유명한 백종원 레시피부터 저탄고지 레시피, 비건 레시피까지 다양한 영상들이 나왔다. 그중 마음에 드는 메뉴를 하나 골라 재료부터 주문했다. 택배는 다음 날 아침 도착하니까 바로 해 먹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신나하면서.
다음날. 영상이 시키는대로 재료를 손질하고, 이리저리 볶고, 소스를 넣으니 정말 보기 좋은 요리가 뚝딱 완성됐다! 난 정말이지 요리랑은 담을 쌓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가 이런 멋진 음식을 해내다니. 식재료로 넓은 그릇을 가득 채우고, 마지막엔 데코레이션까지? 묘하게 뿌듯하면서, 나란 사람이 한층 멋져진 기분까지 들었다. 마치 캐시템 장착한 게임 캐릭터가 된 느낌이랄까. 심지어 맛도 나쁘지 않았다. (웬일?)
초코, 설탕, 우유, 노른자를 섞으면 크림이 되거든.
맘이 편해
요리에 관심이 생기니, 덩달아 요리 영화나 다큐멘터리에도 관심이 생겼다. 넷플릭스를 켜도 매번 감성적인 영화만 골라서 봤었는데. 어느 순간 요리 관련 콘텐츠에 손이 가더라. <카모메 식당>, <아메리칸 셰프>, <더 셰프 쇼>, <파티셰를 잡아라>까지 정주행하고 최근엔 <줄리 & 줄리아>라는 영화까지 봤다. 유명 프렌치 셰프와, 뉴욕의 요리 블로거의 성장기를 담은 영화다.
내가 이 영화 얘기를 꺼낸 이유는 다름 아닌 주인공이 초반에 하는 대사 때문이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요리를 하는 줄리아에게 남편이 묻는다.
"힘든 일 있었어?"
줄리아는 대답한다.
"인생은 예측 불가능인데 요리는 확실해서 좋아. 초코, 설탕, 우유, 노른자를 섞으면 크림이 되거든. 맘이 편해."
줄리아의 말처럼 요리는 예측이 가능하다. 정해진 레시피만 잘 지키면 망할 일이 없다. 망할 것 같으면 중간에 소금이나 설탕을 넣으면 되는 일이다. 어떤 변수가 있더라도, 그 해결책까지 명확한 챌린지 같달까.
1. 먼저 끓는 물을 준비하세요.
2. 생새우를 프라이팬에 볶으세요.
3. 그다음 삶은 면을 넣고 소스를 넣으면 완성!
* 혹시 싱거우신가요? 그럴 땐 소금을 한 꼬집 더 넣으면 됩니다!
이 간단한 공식이, 왜 인생에는 없을까.
인생에도 레시피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내가 요리에 유독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바로 이런 이유였던 것 같다. 정해진 방법만 따르면, 어찌 됐든 결과물은 나오니까. 과정은 힘들더라도 마음은 편하니까. 인생에도 이런 레시피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랬다면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생겨도, 덜 당황하게 되지 않을까?
1. 강제로 집순이가 되셨나요? 그렇다면 A를 준비하세요!
2. 헬스장이 문을 닫았나요? 저런. B와 C를 해보세요!
3. 짜잔, 완성...
이었다면 좋으련만. 우리 인생은 그렇지 않다. 돌발 변수에 대응할 가이드조차 없다. 인생이 요리라면, 우리는 스스로의 인생 레시피를 직접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어떤 요리가 탄생할지 모르더라도.
그렇다면 나의 9월 레시피는 어떻게 되는 걸까? 밖에서 운동도 못 하게 되었는데... 어떤 향신료를 추가해야 망하지 않게 될까. 밀린 책 보기? 다시 홈트하기? 영화 보고 리뷰 쓰기? 치팅데이라고 생각하고 맛있는 것 해 먹기? 모르겠다. 일단 가이드가 없으니, 요리 과정을 멋대로 줄여보기로 했다. 9시 전에 기상하고, 12시 전에 잠들면 성공으로! 그럼 내 9월은 조금은 더 뿌듯하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P.S.
과정은 간단하게. 결과는 별 거 없이도 성공으로 세팅해서 살아야지. 마음이 편한 요리처럼.
영화: 줄리 & 줄리아 (2009)
감독: 노라 애프론
본 날: 20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