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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은 Apr 12. 2021

혼자 여행하는 게 좋은 이유는 약속이 없기 때문이다

늦거나 망해도 미안할 대상이 없으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원래는 제주도에 갈 생각이었는데 쫄보라서 서울과 그나마 가까운 충청남도 공주로 여행지를 정했다. 갑작스럽게 여행을 떠난 이유는 예기치 못한 휴가를 쓰게 됐기 때문이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총 4일에 걸친 휴가였다. 주말까지 합치면 6일이나 쉴 수 있는 셈이었다. 4월의 휴가 치고는 길었다. 그래서 어디라도 떠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숙소와 기차표를 예약했다. 근데 문제는 덜컥 일정까지 짜두니 막막해지기 시작했단 거다. 망하면 어쩌지? 무서우면 어쩌지? 재미없으면 어쩌지? 생각보다 별로면....


고작 1박 2일 여행하는 데 별 걱정을 다했다. 왜냐면 혼자 여행하는 것도 처음이거니와 이렇게 급하게 떠난 것도 마찬가지로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나는 날, 기차 타러 가는 길에 혼자 놀기의 대가인 친구 J에게 연락을 했다.


야. 넌 혼자 여행하면 뭐 하고 놀아?


친구의 대답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너 집에 혼자 있을 때 뭐해? 혼자 뒹굴거리다가 집 앞 카페 같은 데 가서 빵 사 먹고, 배고프면 맛집 찾아갈 거 아니야! 똑같은 거지 뭐. 숙소가 너 집이라고 생각해 봐. 동네는 길을 다 아니까 쉬운 것뿐이고, 거긴 네가 잘 모르는 곳이니까 두려운 거겠지. 근데 별거 없어.”


아... 그렇지. 주말에 내가 서울에서 뭘 하나 생각하면 편하겠구나. 숙소가 내 집이라고 생각하면 여행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혼자 서울에서 놀듯하면 된다. 단지 지하철이 없어서 버스나 택시 혹은 두 발로 걸어야 하는 것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첫 관문부터 망했다. 기차를 놓쳤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 출발 시간을 잘못 기억한 탓에 눈 앞에서 열차를  떠나보낸 것이다. 사실 이땐 너무 처참했다. 다음 기차는 무려 두 시간 뒤였기 때문이다. 여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인데... 숙소 체크인이 늦어지면 일정이 꼬인단 말이야. 하는 수 없이(?) J에게 다시 연락했다.



나 처음부터 망했는데... 기차를 놓쳤어.
역시 혼자서는 무리인가?

친구는 이때도 현답을 내놓았다.

“혼자 여행하는 거 아냐? 뒤에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안할 친구도 없잖아. 밥 좀 먹고 다음 기차 타!”

늘 시간에 쫓기며 살다 보니(마감) 정해진 계획이 어긋나면 불안해하던 나에게, 이 말은 꽤 크게 느껴졌다. 맞아... 혼자 놀면 다음 약속이 없지. 늦을까 봐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미안하다고 싹싹 빌 친구도 없고. 일정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망한 건 기차 시간뿐만이 아니었다.

가고 싶었던 가게가 망했거나 휴무일이라 허탕을 치기도 했고,

유명하다는 베이커리 가게에서 빵을 사지 못 하기도 했고(바로 앞에 아저씨가 마지막 남은 세트를 사버려서),

길을 잘못 들어서 같은 길을 두 번 왔다 갔다 하기도 했으며,

에어팟 배터리가 다 떨어져 이동 중에 음악을 듣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망한 건 망한대로 괜찮았다. 일단 망해도 나 혼자 망한 거라 의연할 수 있었다.

만약 남자 친구랑 여행을 갔더라면, 너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서로를 탓했을지도 모른다.

휴무일도 제대로 안 알아봤어? 길을 왜 이렇게 못 찾아... 따위의 날 선 말들을 했을 텐데.

혼자라 나를 탓하기는 싫었기 때문에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앞으로도 그래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사실 망한 건 망한 게 아니었다.


없어진 가게 옆에는 새로운 가게가 생겨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를 알게 되어 기뻤다.

사지 못했던 빵은 다음 날 아침에 일찍 가 구매했다. 오히려 방금 만들어진 빵이라 더 맛있었다.

길을 잘못 들어 같은 길을 다시 걸었을 때는 놓쳤던 포토 스폿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생 샷을 건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음악 없이 오랜 시간을 걸어보니 의외로 좋았다. 흙 밟는 소리, 자갈 소리, 시냇물 소리를 ASMR로 즐길 수 있었다.



J가 맞았다. 혼자 여행하는 건 사실 별 게 없었다.

혼자 길을 걷고 식당을 정하고 타이머 맞춰서 사진을 찍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간다. J는 나에게 혼자인 게 민망한 순간이 오면 카톡을 하라고 했다. 바로바로 답해주겠다고.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 여행 동안 J에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혼자인 시간이 외롭거나 심심하지 않았다는 거겠지. 이것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거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재미있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무계획이 이렇게 짜릿한 거였다니. 이다음에 길게 휴가를 내게 된다면 조금 더 오래 혼자 있고 싶어 졌다. 이번처럼 약속 없이, 정해진 거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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