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진

by 이순직

집을 나서 거리로 들어간다. 몇 걸음 걷다 뒤돌아본다. 나는 집에서 거리로 나온 것일까? 거리에서 거리로 나온 것은 아닐까? 배수아의 인물들처럼 가족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은 아닐까? 유미리의 ‘가족 시네마’처럼 카메라 앞에서 세련된 혈연적 연기를 하는 위선적 가족이라도 있는 걸까? 도시의 세례를 어설프게 받은 서른넷의 가을이 익어, 터진다. 당신들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말하는 소설이란 결국 세계관의 다른 이름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나의 아비는 숙명의 종도, 그리고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남로당이었다고 외칠 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했기 때문에 나는 또 다른 가슴앓이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아비는 군인이었다>거나 <아비는 악덕 자본가였다>라고 외칠 처지는 더욱 아닌 데 나의 절망은 깃들여 있었다. (김소진의 '개흘레꾼'에서)


아들에게 아버지는 세계 인식의 통로다. 하지만 ‘개흘레꾼’은 90년대에 놓인 아버지라는 우울한 밑그림이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독재자라는 식의 인식은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다. 솔직히 말해 그녀들은 소설을 통하여 남근 선망(penis-envy)의 피해자로 여성을 몰아가고 있다. 가계의 정통성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진다는 유교적 세대교체의 논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서툰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는 남성/여성의 대결 구도로 아버지와 오빠, 어머니와 여동생을 몰아넣을 것이다.


아무튼 테제도 아니요, 안티테제도 아닌 아주 낯선 아버지를 만난다. 그러나 우리들의 아버지와 닮은꼴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테제이거나 안티테제인 아버지를 둔 아들과 딸은 이제 없다. 다시 말해 역사의 앞자리에 나설 아버지들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아니다. 쥐꼬리만한 봉투를 바라보고 사는 월급쟁이거나 명예퇴직의 후보 명단에 올라가 있으며 아내의 눈치 살펴 용돈을 받는 초라한 아버지다.


그 아버지는 아들과 딸들의 21세기적 사유를 이해할 수 없으며 단지 피붙이라는 낡은 사랑법에 얽매여 있을 뿐이다. 부권의 근엄함은 핵가족과 산업화로 몰락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성에 힘입은 페미니즘이 모권, 또는 여성권을 주장하는 틈바구니에 끼여 위태롭게 흔들리는 일상을 견디고 있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이데올로기의 거대함(임철우의 ‘아버지의 땅’)도 아니요, 위험한 시대를 위대하게 살아온 신화(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도 아니다. 여성작가들이 만들어내는 아버지의 제스처(gesture)는 수사학적인 과장에 불과하다.


‘종’‧‘남로당’‧‘군발이’‧‘악덕 자본주’ 등이 지칭하는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아버지, 아들과 딸들에게 세계 인식의 통로가 될 수 없는 아버지, 가족의 중심축조차 되지 못하는 아버지, 자식들의 21세기적 사유와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를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들도 가지고 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을 빌리자면 <여성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어머니일 때이다. 여성이 변화하여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바로 모성 안에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전능한 어머니에 대한 신화는 한편으로는 완벽한 어머니에 대한 환상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비난을 낳기에 여성들에게는 <양날이 선 칼>이다. <<김미현의 ‘가족(假族), 천국보다 낯선 가족(家族) - 최근 여성 소설에 나타난 가족의 질병’, 포에티카, 1997, 여름호.>>


부권 사회는 여성의 권익보다 모성 신화를 독려한다. 한석봉의 어머니나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그것이다. 이때 모성 신화의 속성은 아들에게로의 무조건적인 희생과 봉사인데 그 종착점은 아들의 출세로 보장받는 가문의 번영이다. 장남을 위한 장녀의 희생도 그 변형이다. 그러나 오늘의 여성들은 모성 신화를 거부한다. 부권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부장적 질서)에 종속하는 비주체적인 신화이기 때문이다.


은희경의 ‘빈처’, 차현숙의 ‘나비학 개론’, 전경린의 ‘새는 언제나 그 곳에 있다’ 등에서 여성작가들의 입장은 남편의 아내이기보다 여자이기를 바라는 여성 심리에 더욱 관심 가지고 있다. 왜 그럴까? 시몬 드 보부아르의 지적처럼 ‘여성이 변화하여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바로 모성 안에서이기 때문’일까? 여성작가들이 사회적‧제도적으로 가부장 제도에 맞설 논리적 이론이나 삶에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일까? 어쨌든 아내이자 동시에 여성이고자 하는 눈물겨운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고 그녀들은 불륜으로 빠져든다.


이런 이유로 정신적인 허기에 시달리는 여성들은 마치 마약에 빠지듯이 불륜에 빠진다. 그래서 중독성을 보이는 여성 소설 속의 불륜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통해 해방감을 느끼려는 것(서하진), 정열을 통해 삶의 질을 고양시키려는 것(전경린), 추락이나 타락을 통해서라도 생존을 확인하려는 것(차현숙)과 통하는 본능적 방어기제가 된다.<<김미현의 '가족(假族), 천국보다 낯선 가족(家族) - 최근 여성 소설에 나타난 가족의 질병', 포에티카, 1997, 여름호.>>


오늘날 가부장 제도는 망령일 뿐이고, 사랑이 지나가자 남편은 아내의 버팀목이 되지 못한다. 아내 역시 심리적‧육체적‧정신적 순종을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심리적인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는 아내들은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가출한다. 아쉬운 것은 여성작가들에 의해 남성/여성의 대립 구도의 바탕에서 일방적으로 여성을 삶의 피해자로 몰아간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기본적인 착상의 미숙함인데, 가족 구성원의 하나로서 여성을 얘기하지 않고 가족과 관련 없이 여성을 얘기하고 있는 점이다. 가령 가족을 얘기의 중심부에 놓고 여성과 남성을 주변부에 위치시킬 때 이야기의 흐름은 가족의 해체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후기 산업사회에 걸맞은 가족제도로의 변화과정 또는 가부장 제도의 와해와 산업사회에 알맞은 가족 질서의 재정립 양상을 가질 것이다.


어쨌든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무관심으로 밀려난다. 프로이트의 삼각형 구조에서 사회악에 대한 저항력이 가장 약하고 주체성이 확립되어 있지 않기에 아이들은 사뭇 심각한 양상을 보인다. 피터 팬 증후군(Peter Pan Syndrome)에 시달리거나 장선우 감독이 만든 ‘나쁜 영화’의 등장인물이 되기도 한다. ‘난 우리 엄마처럼은 되고 싶지 않아(배수아의 ‘엘리제를 위하여’)라든가,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애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김소진의 ‘자전거 도둑’)라는 독백도 수사학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결국 ‘개흘레꾼’ 아버지와 모성 신화를 거부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내동댕이쳐진 당신들과 나에게 모아진다. 문학이 현실의 예민한 징후라는 판에 박힌 명제를 떠올리지 않는다 해도, 살아감이 가장 무거운 것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당신들과 나다. 가족공동체가 무너진 자리에 서구적 사고가 21세기적 사유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 배수아의 소설에서 지겹도록 나타나는 외래어는 우연이 아니다.

가족 해체 또는 가족의 붕괴를 배경으로 삼고 있거나 앞자리에 내세운 소설들이 던지는 물음은 무엇일까?


개인 존중을 토대로 하는 서구의 가족주의에 급습당해 갈팡질팡하는 동양의 전통적인 가족공동체의 기형적 파괴인가? 그것은 산업화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더 나아가 가족의 해체는 사회와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들과 나는 가족의 해체를 점검하고 나선 작가들의 목소리를 믿어야 할까? 아니면 고개를 돌려 살아온 것처럼 살아갈 것인가? 일상이 무거운 것은 반복의 각질 속에 스스로 숨기 때문이다.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 퇴행을 가져온다. 그래도 지금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을 것인가? 절망의 늪지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고 멸망의 성터에서 신생국가의 솟구치는 기운을 만들어내는 건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아무리 가족이 해체되고 붕괴해도 결혼식은 줄을 잇는다. 당신들도 나도 그 줄 어디쯤엔가 서 있다.


까치 소리 고즈넉한 창밖은 일요일 가을, 북악 파크호텔에서 사랑의 실천을 맹세한 후배의 결혼식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돌아와 책상에 앉은 지금, 나는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 한 토막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 이름 붙여 주섬주섬 얽어보고자 한다. 자, 이제 당신들은 무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