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오월. 외사촌 결혼식이 있어 고향에 다녀올 때 안동역 앞을 지나갔다.
기억은 시간보다 장소에 더 붙박여 있는지 역은 변함없어 그해 여름을 더듬는 마음은 더욱 쓸쓸했다. 예식장 로비에서 친척들과 눈인사하거나, 짐짓 과장스럽게 악수를 나누면서도, 신부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 3막 중 혼례의 합창 속에서 가볍고 들뜬 걸음으로 입장하는 걸 보면서도, 주례사 들으면서도 마음은 1982년 그해 여름 안동역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해 여름. 무엇 때문에 홀로 고향을 찾았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짐작해보면 대학생이 되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가 아닐까. 풍산 장터 구석진 지붕 낮은 술집에서 경희와 마주 앉아 짐승의 시대를 글로 쓰겠다고 했다. 그녀가 정확히 뭐라 대꾸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허름한 술집은 그 뒤로 다시 가보지 못했다.
떠날 때 풍산에서 끝내 만나지 못하고 안동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이라 쏟아지는 화살 햇살에 저마다 그늘을 찾아 역 광장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적막하고 뜨거웠다. 신기루 있다는 고비사막이었다. 그녀를 보지 못한 아쉬움과 서울까지 반나절 더 걸리는 기차의 지루함이 뒤섞여 마음은 울적하다 못해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공부하러 모임에 간다고 했다.
지금도 여전히 권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학교와 학원에서 배운 세상을 거부하고 그 밖으로 나가려 공부하는 사람들은 훨씬 적다. 학교와 학원의 지식을 페로몬(pheromone)으로 알고 그 안에 갇혀 사는 사람들은 지금도 내 주위에 많다. 경희는 그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 했다. 고등학생 때 그녀와 주고받은 그 많던 편지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대합실 나무 의자에 앉아 역 광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울기 직전의 마음과 달리 버스와 트럭은 무심히 광장 너머에서 바쁘게 어디론가 달려가고 숨 가쁜 서울 생활 속에서 어쩌면 그녀를 영영 잊고 지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 지났는지 알 수 없다, 고비사막 같던 광장을 걸어오는 경희가 눈에 들어온 것은. 혹 신기루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보고 싶은 것만, 알고 있는 것만 보며 살지 않던가! 안경 벗어 흐릿한 안경알 닦고 쓰자 해맑게 웃는 경희 얼굴이 분명했다.
“먼 길 왔는데 작별 인사는 하라고 하더라, 친구들이.”
공부하다가 잠시 짬을 낸 모양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바보처럼 헤벌쭉 웃으면서도 그녀가 짐승의 시대를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나는 걱정했다. 그때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에 없다. 아니, 말이 필요 없는 만남 아니었을까. 그녀의 안녕과 웃음이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전부가 아니었을까.
다시 안동역을 찾은 것은 입대와 제대를 거쳐 복학하고 난 여름이었다. 어머니와 경희 어머님이 동네 친구로 지낸 터여서 확인할 수 없는 짧은 소문들만 들려왔다. 대구 어디쯤 있다거나 집 나가 연락 닿지 않는다거나 하는 따위들이었다. 나는 역에서 내려 곧장 안동대 사학과를 찾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하는 등의 자세한 그림은 떠오르지 않지만, 다행히 후배 여학생을 만날 수 있었다. 같이 공부했거나 근황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대구 남산초등학교 근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들과 낮은 지붕들만 빼곡히 들어선 동네 구석진 귀퉁이 집에서 경희를 다시 만난 것은 후배 여학생의 정보 때문인지 누나를 통해서인지 기억이 없다.
그때는 겨울이었다. 대구 날씨가 따뜻하다 해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골목길 잔바람에도 삐거덕 덜커덩 소리 내지르는 판자문을 열자 한 사람 겨우 쭈그리고 앉을 공간에 녹슨 수도꼭지와 상처 많은 세숫대야가 있었다. 고개 돌려 한지(韓紙) 바른 미닫이문을 열자 덩치 큰 한 사람 가까스로 누울 방안에 사과 궤짝 책상과 낡은 비키니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경희는 하루치의 노동에도 빠르게 지쳐 있었다.
그 밤 경희 옆에 누워 새벽이 가까워지도록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시퍼렇게 날 세운 젊은 날들로 짐승의 시대를 만나 싸우는 경희가 안쓰러웠을까. 그런 그녀 옆에서 글 쓴다는 약속을 영영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을까. 잠든 도로를 서둘러 깨우는 첫차가 달려갈 즈음 슬그머니 일어나 앉았다. 그녀 이마에 입맞춤했는지 아닌지 기억에 없다. 새벽 거리로 나와 동대구역까지 걸었다.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누나와 경희의 언니가 친구라 드문드문 소문을 들었다. 어떤 소문은 귀 밖으로 밀려났고 어떤 것들은 기억하기도 했으나 오래 가지 않았다. 하루하루 힘겨웠고 급기야 이따위 젊음이 삶에서 왜 필요한지 짜증 섞인 의구심에 자학하던 때였다. 그러다가도 식구들이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풍산 사진관 집 셋째 딸 얘기하면 귓바퀴가 곤두서곤 했다.
“풍산까지 찾아와 행패 부렸다고 다시는 마누라한테 손찌검 안 하겠다고 했다는데?”
“애가 꼬챙이야. 바짝 말라서 때릴 구석이 어디 있다고…”
결혼보다 이혼 소식을 먼저 들었다. 그날의 씁쓸함은 잊을 수 없다. 아마도 소주 잔뜩 퍼마시고 취해 곯아떨어졌을 게 분명하다. 이따위 젊음이 왜 필요하지. 연거푸 중얼거리면서.
몇 년이 사정없이 지나가 석사 마치고 인천집에서 박사과정 입학을 준비할 즈음이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몰라도 서울에 왔다가 인천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흥 어디쯤에서 경희를 만났다. 어떻게 연락 닿아 만났는지 기억에 없다. 그녀를 만나 저녁밥 함께 먹었는지 술집 탁자 가운데 두고 얼굴 마주 보았는지 어렴풋하지만, 남산초등학교 근처 지붕 낮은 동네들보다 훨씬 반듯한 집들과 직선으로 뻗은 골목길 초입에서 자정 훌쩍 지난 시간에도 헤어지지 못했다. 사글셋방 룸메이트가 재워주는 걸 거부해서 경희도 손쓸 방법이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골목길에서 손도 잡지 않은 채로 둘이 서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녀는 나를 어서 보내려 했을 터이고 짧은 만남이 아쉬워 나는 발길 쉽게 옮길 수 없었으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흐르고 밤은 더욱 깊어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늘 그래왔듯이 그녀를 떠나는 일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녀가 시흥에 있을 때 왜 다시 못 만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녀가 만남을 거부했을 수도 있고 내가 연락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저마다 삶을 돌이켜보면서 자신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석들을 종종 찾아내 의아해하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듯 나도 예외 아니다.
재혼 소식은 시흥의 짧은 만남 이후 몇 년이 속절없이 지나간 뒤에 들었다. 남자도 재혼이어서 둘 다 실패한 결혼을 겪은 터라 부부 인연 오래도록 함께하기를 바라는 주위 사람들 바람이 있었다, 한다. 나 역시 그녀 만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술잔 기울이기보다 이왕 맺은 부부 인연 오래도록 지켜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젊은 날 맞서 싸웠던 짐승의 시대를 그녀는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관망하고 비로소 맞서 싸우는 나를 보여줄 차례인 것도 같다. 대자연의 순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상식인 이 땅의 하루들.
결혼행진곡 끝나자 식당으로 자리 옮겨 점심 먹고 서둘러 친척들과 인사 나누고 서안동 톨게이트로 차를 몰았다. 추억처럼 그 자리에 늘 있는 안동역을 등 뒤에 두고. 핸들 돌려 당장이라도 역으로 달려가 대합실에서 서성거리면 82년 그해 여름처럼 고비사막 건너와 작별 인사는 해야지, 라며 해맑게 웃는 경희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때 나는 왜 그녀 손목 잡지 않았을까. 낚아채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