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동행

by 이순직

1


“추자도 여행이 물 건너갔는데 옥계에 민박 알아볼 수 있나요?”


수락산 그녀였다. 작년에 함께 옥계 다녀온 터여서 부탁이 당연하다 싶어 서둘러 고모에게 전화 넣었다. 여러 번 통화 끝에 민박 구해 느닷없는 책임감에서 벗어나 한시름 놓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름 한낮이 펄펄 끓고 있었다. 타고난 성격이 게을러 어디든 잠자리 바꾸는 여행은 좀처럼 시도조차 하지 않아 아내와 두 딸의 불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휴가는 계획조차 잡지 않았다.


화면에 꽉 찬 해수욕장 볼 때마다 미친 짓이다, 중얼거리곤 하는데 물 반 사람 반이 무슨 휴가냐 싶기도 하고 압축성장의 뒷모습 같기도 해서 씁쓸했다. ‘빨리빨리’와 ‘흉내 내기’가 압축성장의 비결 같기도 하지만 동시에 족쇄 아닐까. 분명한 사실은 남과 다른 나를 찾기보다 남과 비슷한 나를 갖는 것이 행복이라니!


며칠 뒤 단양 부부 빠진 금요일 만남에서 여행 일정표 확인했냐고 수락산 그가 말할 때 좀 의아했다. 지나가는 말로 동행할 수 있을 거라 무심코 말했던 것 같은데 단단히 작심까지 한 표정이었다.


“같이 가야죠. 당연한 걸 왜 그래요?”


뜨악한 내 표정을 읽고 수락산 그녀가 쐐기 박듯 마무리하는 탓에 어떤 말도 궁색한 변명일 수밖에 없었다. 낯선 사람과 여름 여행을 하는 게 어디 그리 쉬운 노릇인가. 수락산 그녀의 친정아버지와 어머니는 몇 년 전 칠순 잔치 때 먼발치에서 설핏 보았고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마흔 넘어서도 낯가리는 고질병이 어디 가겠냐 싶어 은근히 걱정 앞섰다. 조심스러워 섞이지 못하고 보릿자루처럼 마냥 겉돌면 여행이 고행이기 십상이고 수락산 그녀 역시 불청객 데리고 나타난 셈이라 마음 그저 편할 수 없으리라.


“옥계에서 이틀 밤 자고 하루는 함백산에서 캠핑할 계획이라 긴팔 옷 챙겨야지.”


수락산 그가 말하자


“그래야겠죠?”


수락산 그녀가 되물었다.


꼼꼼하고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수락산 그인지라 그녀도 조금씩 닳아가는 듯했다. 어쨌거나 수락산 부부 얘기를 귓등으로 흘려보내면서 내심 옥계까지 동행은 민박 주선자로서 어쩔 수 없다는 판단에, 예정에 없는 휴가지만 나름 재미있을 거라는 쪽으로 생각을 틀었다.


집으로 돌아와 메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7월 31일, 아침 6시 30분에 출발이라니! 지금까지 놀러 가는데 이렇게 일찍 출발한 기억도 없고 일정표에 따르면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수락산 그의 꼼꼼함은 알고 있었으나 나는 무슨 일이든 얼렁뚱땅 대충대충 하는 성격이라 겁부터 더럭 났다.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삼척 해신당에 갈 때도 설악산 콘도에 갈 때도 다른 어디 가더라도 일정표 없이 출발하는 나로선 당연했다. 울릉도에 가자고 했을 때 따라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싶었고 그나마 옥계까지 동행이라는 판단에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수락산 그녀의 친정집 휴가에 볼썽사납게 끼어드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다. 어쩌면 그 감정은 의구심이 아니라 일정표에서 집어먹은 겁인지도 몰랐다.


7월 30일 밤에는 대학시절 민주광장에서 출정식 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교문 밖 전투경찰과 장갑차 같은 페퍼포그 차량에 맞서 지켜야 할 가치들을 곱씹으며 코밑에 치약 바르던 비장함도 되살아나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들었다. 밤잠 없고 아침잠 많은 유구한 습관이 다음 날 아침. 아내의 불호령에 보기 좋게 깨지고 졸음 남은 머리 한쪽이 묵직한 상태로 출발했다.


휴가철. 대도시 빠져나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서울이 얼마나 거대한 공룡인가를. 몸집과 식탐이며 적대성(敵對性)과 반인간성(反人間性)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나도 그런 서울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에 입안 가득 씁쓸함이 고였다. 그 씁쓸함을 털어내기 위해 사람들은 휴가철마다 자연을 찾아가는 지도.


집결지인 홍천 휴게소 맞은편 공터에 가장 늦게 도착한 사람은 당연히 나였다. 수락산 그녀의 친정 식구들이 낯선 얼굴로 반겼다.


“언니 부분데 잠실에서 왔고요. 이쪽은 동생 부부인데 송우리에서 출발했고. 여긴 아버지, 엄마.”


물론 이렇게 소개받고 인사하지 않았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행임을 짐작하고 눈인사 나누는 정도였는데 수락산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확실히 인사한 것 같다.


“아침 걸렀을 텐데 좀 먹고 가죠?”


공터 안쪽에 돗자리 펴고 수락산 그녀가 김밥을 내려놓았다.


“같이 드시죠?”


“우린 먹었죠, 벌써.”


‘벌써’에 담긴 숨은 뜻을 나는 굳이 찾지 않았다.


꽉 막힌 춘천고속도로를 서울 시내보다 느린 속도로 달려 중앙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조금씩 숨통이 트였었다. 김밥 우걱우걱 씹으면서 교통체증보다 무섭도록 지루한 게 또 있을까. 돌아올 걱정을 앞세웠다. 서울 빠져나올 때나 들어갈 때마다 진저리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호벽이 서울을 감싸고 있다는 맹랑한 짐작마저 들었다. 방호벽이 ‘특별시민’이든 ‘편리함’이든 혹은 ‘서울 이기주의’든.


“내가 앞서니까 따라오면 됩니다.”


수락산 그가 말했다. 내 뒤로 송우리 부부가, 마지막은 잠실 부부로 순서 정해 줄지어 달리기로 했다. 이틀씩이나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 있어 군말 없이 차에 올랐다. 뒤따라가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고 다음 도착 장소를 알지 못해 답답했다. 나를 따르라. 소리칠 용기나 배짱 있어서도 아니었다. 누구든 지금 가는 길이 어느 곳을, 무엇을 향하는지 모를 때 생활은 흔들리고 마음은 갈피 잡을 수 없다. 목표 없이 삶을 꾸려가다 보면 느닷없이 장애물들 불쑥불쑥 나타나 우회전하거나 좌회전. 급기야 유턴까지 한다.


2


앞차가 조금씩 속도 늦추더니 나들목으로 빠졌다. 나 역시 오른쪽 깜빡이 넣으면서 뒤차에 신호 주었다. 사이드미러로 보니 잠실 부부까지 신호가 전달된 모양이었다.


“내가 운전 못 하니까 두 번째에 끼워 넣은 것 같아.”


조수석에 앉은 아내에게 말했다.


“그런 거야?”


수락산 그녀 역시 운전 잘해, 부부가 번갈아 가며 하니 부러울 수밖에 없어 몇 번이나 아내에게 배우라고 다그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요지부동. 겁 많아 운전 배우지 않는다는 장모님 말이 떠올랐고 아내는 그렇구나. 낮게 중얼거렸다.


“잘하는 사람이 앞이거나 맨 뒤야. 수락산 형님과 잠실 형님이 넷 중에서 운전 잘한다는 거지.”


국도는 풍경이 있어 좋았다. 속도에 열중하는 게 아니라 풍경을 즐기는 여유로움에 무게 중심 둔다면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질 수 있다. 가령 남의 것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더 자주 보는 일만으로도 지그시 웃음 지을 수 있다.


앞차는 안흥으로 들어서서 서행하다가 농협 앞 넓은 공터로 들어갔다. 뒤차들은 오리 새끼처럼 줄지어 따라 들어가 주차했다. 까칠한 여름 햇살을 피해 자연스럽게 공터 옆 정자(亭子)로 모였다. 아내와 딸들이 정자 옆 화장실로 가는 걸 줄레줄레 뒤따라가다 나도 정자로 갔다. 눈인사 다시 나누면서 정자 한쪽에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말수 없고 무뚝뚝한 나는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실 부부는 힙합 옷차림의 아들과 송우리 부부는 두 딸과 함께였다. 수락산 부부의 아들 교진은 힙합과 붙어 저희끼리 뭐라 주고받으면서 키득거리거나 또랑또랑한 눈으로 주위 살피곤 했다. 둘 사이에 유대감이 보였다. 나이 많은 사람들 틈에 낀 어린 젊음들이 흔히 갖는 유대감. 엇비슷한 나이가 주는 안도감을 뿌리칠 수 없으리라.


수락산 그녀가 종이상자에서 찐빵 꺼내 건네면서,


“안흥찐빵. 먹어봤죠?”


말했는지 정확하지 않다. 두 달 넘게 지나 기억 분명하지 않아. 군것질하지 않지만 덥석 받았다. 출출 하지만 지금껏 수락산 그녀를 만나본 경험 통해 권하면 받는 게 좋다는 걸 체감했는지도.


요즘도 금요일 오후 느닷없이 만나 술자리 끝나고 수락산 그녀의 집으로 갈 때가 있다. 그날도 불콰하게 취해 수락파크빌로 갔다. 입가심을 맥주로 하는 탓에 고집부려 얻어내 마시다가 오줌 누러 화장실로 갔다. 시원하게 볼일 보고 나와 그때까지 주방에 있는 수락산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분명 어제저녁 집까지 찾아와 케이크를 건네주었는데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요.”


“뭘, 이걸 가지고요.”


손아래 시누이를 위로하는 마음이 보였다. 누군들 상처 받은 유년 없으랴 싶지만 빌려준 돈 갚지 않는 채무자 맞닥뜨리면 심장 쿵쾅거려 먼저 피하는 아내인지라 위로받을만하지 않은가. 아무튼 수락산 그녀의 배려로 예정에 없던 케이크와 촛불, 생일 노래로 아내는 살짝 기쁜 모양이었다.


찐빵 받아 한입 물었다. 저만치 제멋대로 뻗은 길들을 어쩌면 한 번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추측과 입안 가득 고이는 찐빵 맛이 낯설지 않다는 느낌에 일행이 조금씩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삼십 분 가까이 정자에 앉아 있으면서 한 마디 꺼내보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까칠한 여름 햇살 속으로.


측지부대 측지병(測地兵) 출신이면서도 내비게이션 지도 보는 건 젬병이라 엉뚱한 길로 빠지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앞차 따라가면 되니 운전이 조금 싱거웠다. 더구나 지방도로여서. 새벽에 일어난 탓에 졸다가 자다가 하는 뒷자리 두 딸을 힐끔거리며 건너다보고 내비게이션 지도 읽을 필요 없는 옆자리 아내의 졸음도 훔쳐보면서 지방도로의 느린 속도를 즐겼다.


돌아보면 나처럼 느린 이가 있을까. 나를 앞서 세상 버린 사촌동생이나 조카 떠올리지 않더라도 동갑내기 수락산 그가 알콩달콩 신혼살림 꾸릴 무렵에도 철들지 못해 책에서 책으로 뜀박질하며 잡을 수 없는 무엇을 위해 하루들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날들은 나에게 무엇일까.


3


앞차는 정선 읍내로 들어섰다. 장날도 아닌데 휴가철이라 사람도 차도 많았다. 경찰까지 도로에 나와 교통 정리할 정도. 저마다 주차 공간을 찾았다.


“점심 먹고 갈 모양이네?”


아내가 말했다. 일행과 멀찌감치 떨어진 하천 주차장 끝에 주차한 터라 서둘렀다. 하천 둑 위로 올라서자 수락산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터는 가까웠고 풍물패 놀이는 막 끝나고 있었다. 낯선 장소에 도착한 설렘과 호기심이 나이 어릴수록 얼굴에 가득 피어났다.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삶의 항목들을 하나씩 거쳐야 한다. 길고 지루한 그 길 위에서 나침반은 선택과 집중을 가리킨다 해도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다. 나침반.


장터로 들어서자 곤드레 곰취 황기 더덕 등이 눈에 들어왔다. 일행이 열 명 넘어 수락산 그녀의 눈길은 갑절로 바쁘면서도 수락산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물었다.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나요?”


“중학교 때 알던 사이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짜잔 나타났어요. 그런데 그뿐이었어요. 직장생활이 바쁘잖아요? 까맣게 잊을 무렵 또 짜잔 나타나고.”


수락산 그녀가 말했다. 당신도 그러하듯 수락산 부부의 내밀한 연애 역시 모든 언어를 뛰어넘는, 그래서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로 가득했으리라. 감정 이끄는 길로 걷다 보면 결혼은 당연하지 않던가. 하지만 모든 결혼생활이 그렇듯 쿵꽝쿵꽝 있을 터. 막막하고 먹먹하던 그 순간들을 무사히 걸어 나온 사람들만 아는 서로에 대한 편안함을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장터 이리저리 휘젓다 석곡집 식당으로 들어갔다. 곤드레밥과 콧등치기와 메밀전병과, 운전 하지 않는 이들은 토속 막걸리도 먹었다. 왁자지껄 시장통 식당이라 말수 적은 내가 덩달아 떠들어도 누구 하나 눈길 주지 않을 듯싶었다. 예상대로 교진과 힙합은 저희 둘이 한 발짝 떨어진 의자에 앉아 고개 맞대며 수군거렸다. 사오 년이 이십여 년 차이보다 마음 편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여행이 끝나는 순간까지 둘은 어느 때보다도 많은 친밀감 나누어 가질 것이다. 어쩌면 둘은 이십여 년 이상 차이 나는 일행들을 제외하고 저희만의 동맹 맺었는지도 모를 일. 서로 심심하지 않게 할 것. 서로 챙겨줄 것. 서로 사랑할 것까지?


왔던 길 되돌아가는 시간은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빠르다. 길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 두셋씩 짝지어 떨어져 이곳저곳 좌판 기웃거리다가 해야 할 일이 떠올라 어쩔 수 없다는 투로 걸었다. 주차장은 금방이었다. 내가 가장 먼 거리에 주차했기에 모두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다시금 차량 행렬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차인 잠실 부부는 역시 깜빡이 켜고 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들 깜빡이 켜고 삶을 달려고 있었을까.


이 차선 지방도로는 능선을 닮아 달리는 마음 포근하다. ‘빨리빨리’를 떠올리는 고속도로가 아니어서. 사실 ‘빨리빨리’는 목적지가 있는 행동이지 목적지를 만들어내는 행동은 아니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목적 있는 행동보다 목적 만들어내는 행동이 아닐까. 따라쟁이가 일가(一家) 이루었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


능선 닮아 이리저리 굽은 길은 한 시간 넘게 이어지고 그 끝에 옥계가 있었다. 옥계. 눈가 촉촉해지는 그곳. 옥계가 여전히 거기 그 자리에 있었다. 내 마음 다시금 슬픔에 머무는 그곳. 옥계. 피하고 싶은. 피할 수 없는.


대학원 다닐 무렵,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게 먹었다. 고모부가 잠시 자맥질하더니 동그랗고 시꺼먼, 온통 가시뿐인 성게를 내 앞에 한 아름 내려놓았다. 밤송이보다 조금 큰 것이 고슴도치처럼 가시로 온몸 중무장한 놈이 수상하기도 하지만 먹거리라니 놀랄 수밖에.


“이렇게 칼로 자르고 노란 알만 먹는 거야.”


고모부는 먹는 방법 알려주곤 다시 자맥질했다. 태어나, 직장 때문에 떠나기 전까지 여기서 살았으니 바닷가 구석구석이 앞마당이리라. 그 앞마당 어디쯤 첫째 묻은 고모부 마음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성게알 떠먹는데 울컥 얼굴 희미한 고종사촌이 가슴 안으로 들어왔다.


4


골목 첫 집, 민박집 마당과 해변도로가 맞닿아 있고 금진항구와 옥계 해수욕장이 길 양쪽 끝에 아스라이 매달려 있다. 수락산 그녀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였다. 우리는 주차하고 짐 옮기는 부산한 움직임 끝에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이방인들에게 풍경이나 놀이터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과 얽히고설키면서 수십 년 수백 년 쌓아온 애증의 얼굴.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는 오아시스 만난 여행자처럼 바닷가로 몰려갔다. 바다가 놀이터로 내어준 만큼에서 나이와 상관없이 화살 햇살에 쫓겨 저마다 달콤한 물놀이에 빠져들었다. 바닷가에 서면 날마다 다른 풍경을 맞닥뜨려 엄청난 공허에 이르는 이도 있지만 자기 삶에 갇혀 있는 우리 대부분은 눈치채지 못한다.


설령 우리 중 누군가, 사람은 대자연의 일부이며 낙엽이 땅으로 돌아가듯 우리 모두 그럴 거라 확신해도 자기 삶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대자연에 온몸 맡기지 않는 탓이다. 항상 서너 걸음 떨어져서 맞서 싸우거나 아주 가끔 순응하지 않았나.


한낮의 시끌벅적한 물놀이가 끝난 늦은 오후. 바닷가 모래밭에 앉아 아랫배처럼 은밀하게 꿈틀거리는 바다를 보고 있으면 마음 서늘해지면서 지나간 많은 사람이 떠오른다. 별 헤아리듯 하나하나 얼굴들 더해가다 보면 신기하기도 하지. 살아온 날들이. 거짓말처럼 만나고 헤어진 얼굴들이 등 뒤에서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들, 사이로 헛헛함과 먹먹함이 뒤섞인 기묘한 감정이 꿈틀거린다.


뭐지? 누구지?


목젖 안으로 말해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생겨나기 오래전에 바닷가 휘돌던 바람이었는지도. 혹은 그 바람결에 바람 올려놓은 사람이 미처 살지 못한 날들인지도. 그래서일까. 어스름 내린 그 바다 바라보며 내내 골똘했다. 알 수 없는 것들과 설명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가령 사는 것과 존재한다는 일은 어떻게 다른가. 선악은 어디까지 사람의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지금 있는 자리는 누가 있었고 떠나면 누가 이 자리에 있을까. 혹은 사람의 시간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일행이 잠든 깊은 밤까지 꺼이꺼이 숨 할딱거리며 나는 골몰했다.


5


아침은 도둑처럼 왔다.


흥겨웠던 어제. 물놀이와 조개잡이와 만찬과 웃음과 서로에 대한 호기심까지 차곡차곡 트렁크에 챙겨 넣었다. 옥계 바다에 올 때처럼 맨 앞에 수락산 부부가, 다음에 내가, 그리고 송우리 부부. 마지막은 잠실 부부였다. 흐린 날씨 뚫고 산으로 차는 올라갔다. 태백산맥. 올라갈수록 조금씩 구름에 갇히고 태백시에 이르자 익숙해져 짧은 시야도 불편하지 않았다. 용연동굴 주차장에 도착하자 어디에도 바다 냄새는 없었다.


“저 열차 재미있겠다!”


딸아이가 주차장 안쪽 후미진 곳을 가리켰다. 놀이공원에서 볼 수 있는 열차는 산 위로 뻗은 철길에서 내려와 천천히 유턴했다. 객차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내리자 기다리던 이들은 서둘러 올라탔다. 가파른 오르막을 거친 숨소리도 없이 열차는 조용히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 넓은 공터에 멈추었고 안전모 눌러쓴 사람들이 동굴 입구에서 쏟아지듯 나왔다. 그들 모두 천진난만한 표정이어서 아이처럼 보였다. 동굴 밖 세상에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 이리저리 굴리는 새끼곰처럼 신기해했다.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저 깊은 땅속에서 귀환한 기쁨일지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동굴이고요.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 왔고요.”


안전모 눌러쓰자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뜬금없이 왜란이라니! 엉뚱하다는 생각도 잠시 두 발 딛고 서 있는 땅이 나 태어날 때 생겼으랴 싶어 마음이 숙연해졌다. 저마다 앞으로 걷고 있다 여기지만 실은 제자리 맴도는 건 아닌지. 서러움이 뒤이어 복받쳐왔다. 살아낼수록 물음표는 점점 쌓이는 걸까.


동굴 입구에서 90도 경사로 밑으로 뻗은 철제 계단을 내려간다. 젖은 옷처럼 살갗에 달라붙는 오래된 습기들. 오래된 숨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며 걸음 내디딜 때마다 눈앞을 가로막는 <지옥의 문> <용의 침실> <드라큐라성> <염라대왕> <나살리도> <이무기의 눈물>. 석순이나 종유석, 혹은 석주의 이름만으로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꿈틀거렸다. 작명가의 의도가 어떠했든 나와 다르지 않으리라 하는 짐작에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관통하는 전율. 그것은 내 속에 있지만 내 것만은 아닌. 까마득한 옛날부터 사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 내려오는. 무의식이 자신을 꿰뚫어 보는 전율(戰慄)이었다.


동굴은 우리 삶처럼 넓어지다가 좁아지고 오르막이다가 내리막이고 굽어지다가 곧다가를 반복했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 반응이었다. 동물원이기라도 한 걸까. <염라대왕>에서 <지옥의 문>에서 손가락 브이(V)를 짓고 사진 찍는다. 여행에서 남는 것은 기억뿐이라는 믿음만큼 가벼운 삶이 또 있을까? 그러나 가만 더듬어보면 가벼움만큼이나 유쾌한 것이 또 있을까?


6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함백산 8부 능선 캠프장에 도착하자 하늘은 부쩍 흐렸다. 텐트 배정을 받고 서둘러 늦은 점심 준비에 들어갔다. 옥계 바다에서 해수욕하며 건져 올린 조개 삶아 라면을 끓였다. 타프(Tarp) 그늘 안에 모여 앉아 한 입 먹을 때마다 소백산 깊은 골짜기 속으로 그 바다가 들어왔다.


“역시 맛이 달라!”


“그렇지? 정말!”


누군가 감탄하자 여기저기 맞장구가 터졌다. 나 역시 발바닥에 잡히는 모래바닥 숨은 조개를 잡기 위해 연거푸 자맥질하며 짠물 훌쩍거려야 했다. 저마다 수고로움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국물 맛에 골짜기 물소리 나무들 바람 소리 더해져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연고 없는 이곳에서. 비로소.


지하수 수돗가에 쭈그리고 앉아 수락산 그와 잠실 형님을 도와 설거지 끝내고 배당받은 텐트 앞에 앉았다. 한두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텐트 안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펼쳤다. 타닥타닥. 텐트 치는 빗방울 소리가 조금씩 굵어졌다. 노트북 화면이 살아나자 자판을 치기 시작했다. 빗방울 소리에 맞춰.


3월에 시작한 이 글은 8월인 지금, 중반을 넘어섰다. 함백산 7부 능선 야영장 텐트 안에 누워 빗방울 소리 듣는다. 시작할 때만 해도 지금까지 붙잡고 있을 줄 예상 못 했으니, 더구나 수락산 그와 그의 처갓집 식구들과 여름 동행할 줄은 더구나 추측 못 했으니 살아갈 시간을 내다본다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몇 달 동안 쓰지 못한 세 줄을 단숨에 쓰고 나자 졸음이 밀려왔다. 노트북 밀쳐놓고 벌러덩 누웠다. 텐트 때리는 빗소리. 두런두런 얘기 소리. 조금씩 멀어졌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핸드폰 외침에 깨어났다.


“고한역에 왔는데 야생화 축제에 간 유선일 데리러 가야 할 것 같아서요. 난 소미가 와서.”


수락산 그였다. 고등학생이라 학원 일정 끝내고 뒤늦게 출발한 딸을 역으로 마중 간 모양이었다. 수락산 집에 가서도 소미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삼 시절 나도 저랬을까 싶어 지나온 시간이 새삼 아득하게 느껴지는데 유선이라면 아내가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디요?”


“정상으로 올라가면 됩니다.”


부랴부랴 텐트에서 나왔다. 캠프장 마당을 가로질러 주차장까지 단숨에 달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캠프장을 빠져나와 정상으로 핸들을 돌렸다. 산안개 자욱한 길 올라가며 느닷없이 내 삶은 몇 부 능선에 있을까. 골몰했다. 올라갈수록 인기척도 없고 산안개 두터워지는 능선 끄트머리에 서 있을까. 제멋대로 걷다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잠시 서 있을까. 천방지축 날뛰는 생각을 좇는데


“다 좋다, 괜찮다.”


췌장암 말기로 이승 떠난 김목한 선배 목소리가 들렸다. 늦은 결혼에 짧은 신혼을 남겨놓고 ‘다 좋다, 괜찮다’ 했다.


정상에 도착하자 한 무리 사람들 속에서 아내와 딸 둘이 야생화를 보며 산안개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 좋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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