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진 코미디 코너 봉숭아 학당에 등장하는 캐릭터, 맹구의 명언(名言)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느닷없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하늘에서 눈이 와아요.”
라며 뜬금없이 부르짖고는 자기 자리에 앉았다. 방청객은 맹구의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지는 표정과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와 맞물리지 않는 생뚱맞은 눈 타령에 박장대소(拍掌大笑)하며, 의식하든 못하든 군부정권(軍部政權) 아래에서의 조심스러운 삶살이에 위로받는 저녁 한때를 보냈다.
맹구는 봉숭아 학당에서 한여름에도 눈이 온다고 부르짖었으니 얼핏 보면 좀 모자라는 캐릭터에 안성맞춤 대사인 듯 싶지만, 관점을 확장해서 해석하면 평범하고 지극히 올바른 사실을 말했음에도 웃음거리가 되는 삐뚤어진 사회현상을 꼬집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마당극에서 곧잘 볼 수 있는 해학(humor)의 역할을 하는 대사가 아니었을까. 물론 맹구의 뛰어난 연기력에 의지한 측면이 상당하지만.
겨울에만 눈이 온다는 인식에는 은유나 상징이 없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버린 눈부신 풍경을 잠시 눈에 담아 즐길 수는 있어도, 도시 사람들에게 내리는 눈은 치워야만 하는 골칫덩어리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도시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지 자연을 위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 공화국이란 말이 있듯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그것도 여의도 한복판에서 하늘에서 눈이 온다고 열대야(熱帶夜)가 이어지는 여름날에도 목 놓아 부르짖었으니, 은유나 상징으로 읽지 않으면 헛소리나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꾀죄죄한 한복과 우스꽝스러운 분장이 우스갯소리로 해석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함정이다. 우리 대부분은 기꺼이 함정에 빠져 즐겁게 웃음보를 터뜨렸다.
서슬 퍼런 군부정권 아래, 열대야로 잠 못 드는 밤에도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는 외침이 무엇을 뜻하는지 딱 부러지게 한 마디로 단정 짓기 어렵지만,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기상이변에 대한 예언자적 경고이거나, 혹은 누구도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에 귀 기울이지 않으니, 차라리 신세타령에 가까운 단말마적 외침이거나, 태생부터 정상적이지 않은 정권에 대한 비웃음이거나.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봉숭아 학당의 맹구지만.
생각의 결을 달리하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주둔지(駐屯地) 백의리 광산골이다. 빛바랜 사진 한 장으로 남은 그해 겨울 광산골의 함박눈은 징그럽게도 쌓여 전우들과 넉가래로 줄 맞춰 온종일 밀어도 표시조차 나지 않았고, 주둔지 밖 민통선 너머에서 좀처럼 면회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길고 지루하면서 견딜 수 없도록 갑갑한 몇 해를 광산골에서 보내고 나서야 출소하듯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른 장면은 복학하고 주문진 가는 길, 문막 휴게소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다. 지금은 연락조차 끊어진 여후배와 동기 한 놈과 같이 찍은 사진인데, 강원도라 역시 눈이 만만찮게 쌓여 있다. 사진 뒷장에 덧붙인 설명이 ‘오리나루 가는 길’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여정을 무엇 때문에 시작했고, 하루나 이틀 정도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에 없다. 나를 포함해 동기 놈이나 여후배가 주문진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짐작하건대 겨울 바다 여행쯤으로 작정하고 떠나지 않았을까. 앉은 자리에서 농담 삼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훌쩍 떠날 수 있는 젊음이 내게도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은 좀처럼 믿기지 않으나, 사진은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지난 시간이 눈에 보이자, 마음이 이내 헛헛해지면서 어깨 맞대며 넉가래 함께 밀던 전우들이나, 주문진행을 같이 하던 여후배나, 모두 잘 지내고 있는지 뒤늦게나마 안녕을 묻고 싶다. 아마도 분명 그들도 나와 같이 맹구의 외침을 들었을 터이고, 나누어 가진 함께 찍은 사진 또한 마음 안쪽 서랍에 있을 터. 앞에서 달려오는 시간보다 등 뒤에 남은 시간이 이제는 애틋해지는 가을 언덕 넘어가는 발걸음이 서글프지 않기를.
혹시라도 나처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가난에 시달리거나, 그다지 많이 남지 않은 직장 생활에 변함없이 스트레스를 받아 간헐적 폭주를 일삼거나, 혹은 세상에 대한 심한 배신감에 치를 떨거나, 이제는 얼굴마저 희미해져 손목 잡을 기회를 놓쳐버려 내내 마음 아픈 첫사랑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 영문도 알 수 없는 복받치는 감정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거든, 맹구처럼 목소리 높여 부르짖지는 못할지라도 마음속으로 유쾌하게 질러보자.
“하늘에서 눈이 와아요!”
창밖 오뉴월의 햇살이 눈부시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