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린 친구에게 바치는

by 이순직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은 쓸쓸하다. 특히나 저승 사람이라면.


그 기억은 그림자처럼 발길 닿는 곳곳에 함께 하기에 눈치를 보거나 어떤 의견을 가지는지 짐작할 때도 있다. 가령 이렇다. 중국집에 들어가 뒤늦은 허기를 감추기 위해 부랴부랴 짜장면을 입안으로 구겨 넣을 때 불현듯,


‘그 친구라면 당연히 짬뽕이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 당신은 아직 이승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어쩌면 행동까지 필요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너무 일찍 저승 사람이 되어버린 이들의 몫까지 살아내야 한다는, 마음 깊이 숨겨둔 부채감(負債感)이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불쑥불쑥 들기도 할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듣거나 부를 때 제아무리 만만치 않은 이승살이라 할지라도 이미 저승살이 하는 이들에 대한 부채감을 뜨거워지는 가슴으로 느낄 것이다.

물론 그보다 작고 소박한 부채감도 있다.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이 그렇다.


재성이가 2016년 6월 15일 오후 8시 36분에 건국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합니다. 미망인께서 늦게나마 어렵게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이에 알립니다. 현재 재성이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오포리 211-49분당 영산추모원 진달래 묘역 5구역 318호에 쉬고 있답니다.


어젯밤 문자다. 읽는 순간 당연히 소소한 기억들이 되살아났고 뒤이어 먹먹함이 몰려왔다. 위치는 정확히 모르지만 강남 어디쯤 그의 집에 갔던 날의 으리으리한 저녁. 고급스러운 칵테일 바에 가서 눈이 번쩍번쩍했던 순간들. 속초 아파트에서 보낸 회 잔치의 며칠. 등단을 축하하기 위해 정릉골 숱한 술집을 순례하다 오래된 여관에서 맞았던 낯선 아침들. 세종문화회관 계단참에서 만나던 게으른 오후.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어도 그림 하나는 또렷하다. 환하게 웃는 얼굴. 좀처럼 속내를 보이지 않아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받았을 마음의 상처 하나 없는 듯한 착한 웃음이 떠오른다.


그가 떠나던 작년 초여름의 한복판에서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늘 만나던 사람을 보고 걷던 길을 가고 먹던 음식을 씹으면서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이거니 하며 정신줄 놓고 살지 않았나. 지나온 시간 속에 갇힌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자신을 안심시켜 소식도 주고받지 않고 소문도 없이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땀만 뻘뻘 흘렸나. 요구하는 것 없이 사람을 만나던 자유로운 시간들이 훌쩍 지나서였나. 씁쓸함이 입안에서 가득 고여있다.


입술을 조용히 닫고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가만히 고개를 숙여본다. 먼저 보낸 선배와 후배. 그리고 조카. 아, 조카 녀석. 누나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은 놈! 그 흔한 무덤조차, 이 땅 어디에도 유골함조차 없는 놈! 바람 속으로 흩어져버린 놈! 마음 한쪽이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고 눈이 맵다. 촉촉해진다. 삶이 담아내야 할 슬픔은 왜 이리 많은지. 슬픔도 힘이 된다는데 나는 왜 이리 아플까.


‘떠나는 우리 님’을 듣는다. 문득 죽어서야 비로소 사는 시간이 더 고통스럽다는 짐작.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되기에. ‘벤저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영화가 겹쳐진다. 늙어서 태어나 갓난아이가 되어 죽을 때까지 ‘떠나는 우리 님’은 한없이 느리게 들려온다. 내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감정의 찌꺼기들이 조용조용 잦아든다.


이윽고 슬픔과 기쁨의 찌꺼기들도 제자리로 돌아가고 눈앞에 나타나는 견고한 일상, 이승살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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