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마존 여전사 얘기를 한 번쯤 들었을 것이다. 생판 처음이라면 지금 당장 검색해 보라. 아마존(Amazon)이 애당초 브라질의 지명(地名)이 아니라 흑해로 흘러드는 강이었다는 걸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스키타이의 용맹한 전사(戰士)였다는 사실도. 그럼에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면 원더 우먼(Wonder Woman)은 어떤가? 어릴 적 만화영화나 미드로, 지금은 할리우드 실사판 영화의 주인공을 모른다고 하면 당신은 대중문화에 대해 소름 끼칠 정도로 무관심하거나 세상 읽기가 지겹거나 귀찮은 건지도 모른다.
얼마 전 외신에 따르면 스키타이 아마존 여전사의 합동묘를 러시아 남부 지역에서 발굴했다고 한다. 러시아 과학원(RAS) 고고학 연구소 발표에 따르면 러시아 남서부 돈강 유역 보로네시에서 스키타이 여전사 4명이 함께 묻힌 묘를 발견했는데 부장품으로 철제 화살촉과 칼, 새 모양 갈고리, 말 도구 등이 함께 묻혀 그녀들이 전사임을 추측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가 트로이 전쟁에서 언급한 아마존 여전사는 전설로 취급해 실재하지 않은 가공의 집단으로 한동안 떠돌곤 했는데 고고학적 발굴까지 하니 전설이나 설화 수준을 뛰어넘어 역사적 사실로 기록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유구한 전통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을 터이지만 모수오족(摩梭族)의 모계 중심 질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까마득한 옛날 옛적에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의 질서였을 거라는 짐작은 그리 어렵지 않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구석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불을 찾아서(Quest For Fire, 1981)’가 장 자크 아노(Jean Jacques Annaud) 감독의 고리타분한 시선인 남성우월주의를 지나칠 만큼 일관적으로 담고 있으나 분위기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참고자료가 될 듯하다.
암튼 결혼에 대한 관념은 고사하고 젠더(gender)로서 남녀 개념 자체가 없는 오로지 본능만이 유일한 생존 기준이었을 그 옛날에도 질서는 있었을 터이고 당연히 모계 중심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알 수 없고 오로지 어머니만 알 수 있었을 터이니.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가 모계 쪽으로만 유전한다는 사실은 뜻밖의 영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가령 이렇다. 자연의 일부로서 사람의 질서는 모계 중심이라는 가설(假設). 일반적으로 남성은 자연에 가까워질수록 나이 먹을수록 사회생활에서 벗어나고 동시에 온갖 결정권을 쥐고 흔들었던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면서 여성이 집안의 중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노년으로 내몰린다. 즉 젊어서는 부계(父系)지만 어느 한순간 모계 중심이다.
“마스크 판대요. 자기야 얼른 약국 가봐.”
‘창동 2020년 봄’에서 아내의 명령에 찍소리도 못하고 궁둥이를 일으켰던 건 모계 중심 질서에서 나름 살아남기 위한 남자의 비굴한 처세술이 아닐까.
그렇다면 사회에서 지위는 어떨까? 우리 동네는 걸핏하면 출몰하는 메시아(messiah)도 문젯거리지만 그녀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인색함은 다른 동네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어떤 사람은 그 이유를 조선의 정치 이념인 유교에서 찾기도 하고 임진왜란 이후의 사회적 변화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있는 그대로 그녀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인색함은 더 가까운 곳에 원인이 있지 않나.
압축성장의 부작용인 천민자본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대표적인 단어가 경단녀라는 걸 고려하면서 생물학적 성과 젠더(gender)로서의 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천박한 인식 또한 덧붙이고, 가장 중요한 근거 없는 남성우월주의를 중심에 놓자. 사실 문명(文明)의 진보(進步)가 백인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백인우월주의만큼 어처구니없는 것이 남성우월주의다. 군대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사회적인 혜택을 주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참고로 아들이 없어서 이런 주장을 하는 건 아니다. 있다 해도 어머니로부터 받은 미토콘드리아를 물려줄 수 없으니 말짱 도루묵이다.
남성우월주의는 그녀를 파편화(破片化)한다. 잘게 쪼개서 자신의 입맛대로 재구성한다. 특히 자신의 삶을 전혀 보여주지 않을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 젠더로서 그녀를 인식하지 못하고 생물학적 성(sex)만 본다. ‘이쁘니까 모든 걸 할 수 있어’라는 말이 남성우월주의에서 왔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남성우월주의는 결혼과 동시에 조금씩 천천히 허물어지긴 하지만 문제는 반평생 걸린다는 점이다. 거의 삶의 끝자락에서 남성우월주의를 벗으니 그전까지 얼마나 많은 그녀들을 파편화하겠는가. 남성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다.
백 년을 내다보는 원대한 계획. 교육만으로 남성우월주의를 씻을 수 없다. 제도(制度)를 시스템을 촘촘하게 다듬어야 한다. 천민자본주의의 관점을 버려 경단녀라는 말 자체를 소멸시키면 출산율의 상승은 당연하다. 문제는 사람들이 천민자본주의의 유혹을 뿌리치기 대단히 어려워 동네가 앞장서야 한다는 사실인데 이게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세상은 오직 돈으로 움직인다고 믿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지 않은가.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라 돈이 사는 세상이 아닌가.
무엇보다 먼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를 실천해야 한다. 4.19가 나던 1960년 4월 26일 이른 아침에 김수영 시인이 바람을 담아 쓴 시(詩)를 반세기가 넘은 2020년 봄 아직도 실천하지 못했으니 나 역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멀뚱멀뚱 먼 산만 바라볼 수밖에.
“비약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대뜸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면 ‘육법전서와 혁명’을 읽어보길 바란다. 검색하면 금방 찾을 수 있으니.
아아, 오지랖이 넓다. 말이 많으면 실수도 잦고 입방아에 오르내릴 가능성도 크다. 그렇다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전전긍긍하면서 화병(火病)을 키우는 것도 영리한 침묵은 아니다.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침묵이야말로 묵직하고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신데렐라가 생물학적 성(sex)에 충실한 캐릭터라면 아마존 여전사 출신인 원더 우먼은 사회적 성(gender)에 가깝다. 태생(胎生)과 역할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칼로 물 베기처럼 둘을 완벽하게 나누어 논의할 수 없다, 왜냐면 사람은 H₂O처럼 단순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기에. 상황에 따라 순간순간 바뀌는 감정과 정서적 변화는 이성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그에 따라 원하지 않은 경험을 하면서 판단 준거(準據)가 되는 선입관을 만들어낸다. 그뿐만 아니라 의지 또한 중요한 변수다. 요컨대 한 사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다, 저승 사람일 때는 전혀 다른 문제지만.
아무튼 태생이 역할을 구속하지 못하고 역할이 태생을 한정할 수 없다. 생물학적 성이 사회적 성을 정의하거나 사회적 성이 생물학적 성을 규정할 수 없다. 단순한 이 사실만 깨닫는다면 남성우월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남성은 생물학적 성이기에 그녀를 생물학적 성으로 규정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욕구는 본능을 채우고자 하는 검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구분 이전에 사람이라는 보편적인 인식이 남성들에게 필요하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페미니스트(feminist)라고 점찍지 않길 바란다. 대자연을 경외(敬畏)하는 인본주의자일 뿐. 두 딸이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이루고자 하는 일들을 해내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를 바랄 뿐이다. 신데렐라와 원더 우먼이 적절하게 융합하여 우리 시대에 맞는 새로운 캐릭터로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그녀에 대한 깊은 오해가 우리 동네에 남성우월주의가 차고 흘러넘치기 때문이라는 진단은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아직도 많다는 뜻이고, 당신들의 손끝에서 비로소 해야 할 일들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