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뚝, 끊어진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 빅뱅 이전처럼. 서둘러 정신 차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늘 보이던 건물들과 멀찌감치 물러앉은 산들과 초여름 하늘과 구름 몇 장. 허겁지겁 눈을 껌벅거리고 온몸의 근육을 당겼다가 늘였다가. 끊어진 시간과 시간 사이에 서 있는 걸까. 찰나에. 나는.
어쩌면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을 앞에 두고 두려움에 짓눌려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며칠 전 ‘종로3가역 5번 출구’로 나오라는 장욱진의 전화에 대뜸 손사래 쳤지만, 김용덕의 생일이라며 사족을 붙이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섰다. 저녁이었다. 지하철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내려 1번 출구로 나와 5번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걸어도 어디에도 5번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뚝, 끊어졌다. 돌아보니 당연했다. 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 5번 출구는 있으나 2호선 5번 출구는 없었다.
녀석들과 만남보다 느긋하게 서울 중심지 한복판을 회사원들 모두 퇴근하고 거리 쓸쓸해져 어스름 내려앉기 시작하는 한복판을 걷다가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생각했다. 마음 느긋해지고 걸음도 느려져 첫눈처럼 내려앉은 어스름을 즐겼다. 젊은 날 어떤 여자를 만나 종로 거리 걷기도 했고 저승 사람이 되어버린 친구를 만나기 위해 땀 뻘뻘 흘리면서 걷기도 했다. 가볍고 한없이 무거운. 먹은 나이만큼. 지나온 날들은.
장욱진은 기다리다 지쳐 전화했다. 1번 출입구에서 종각까지 걸었노라, 5번 출입구는 없더라,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도 좋더라.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른다. 결국 1번 출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장욱진과 김용덕이 확인시켜준 5번 출입구는 은밀한 곳에 있었다. 대로변이 아니라 골목 끄트머리에 있었다. 예상 밖이었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의외성에 누구나 호기심을 곧추세운다. 왜 여기 있대? 어째서?
형식의 새로움 없이는 내용의 새로움도 없다는 판단은 이제야 문자화한 것이고 실은 그전부터 생각해왔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담론의 변화가 이야기의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인데 그리 새로운 발상도 아니다. 다만 단순히 구조의 변화뿐만 아니라 문맥을 만들어내는 문장의 변화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는 생각. 무슨 일이든 욕심이 앞서면 되는 일도 망가진다. 손쉽게. 그래서일까.
젊은 날은 자의식이 강해서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긴다. 이익과 손실을 따지고 타인과 비교하여 자존감을 가지려 한다. 그러나 임계점에 닿아 시간이 뚝, 끊어진다. 끊어진 시간과 시간 사이에 서서 바라보면 내 안에 얼마나 많은 앞서 산 사람들이 있는가.
몸뚱이는 시꺼먼 불덩이에 불타 없어지거나 땅속에 묻혀 흔적조차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은 부활해 지금을 사는 건 아닐까. 의문과 의혹. 짙은. 돌이킬 수 없는. 집단무의식이 유전된다는 점에서 아주 맹랑하지 않은. 아버지의 피톨이 내 몸속을 돌고 있다고 생각하면. 또 아들의 아들로 피톨은 이어지니.
종로3가역 5번 출구 골목 ‘한국 통닭’에서 시시껄렁한 얘기와 우리를 지나간 여자애들 얘기와 얼마 남지 않은 정년 이후를 걱정하며 맥주를 마셨다. 새로울 것 없는 근황과 골목 파라솔마다 내려앉는 어스름과 파라솔 의자에 앉아 하루를 털어내는 사람들과 함께. 물리학에서 시간이 있네, 없네 말은 많지만 뚝, 끊어진다. 시간과 시간 사이에 자신이 있다는 걸 얼마나 많은 이들이 느낄까. 빛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니 시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문제는 관념이라는 것. 관념의 절대 기준이라는 것. 중세의 어리석음(예를 들어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든가, 지구는 평평해서 바다 끝으로 가면 세상의 끝으로 떨어진다든가, 인간의 삶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든가 하는)을 시간이 없다면 비웃을 수 있는가.
한글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향찰이나 구결, 이두의 유구한 발걸음 없었다면 결코 만들어질 수 없을 거라는 판단 역시 시간이 없다면 가능한가. 말하자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차이를 무시하고 시간이 있네, 없네, 떠드는 것 자체가 난센스. 코미디.
우리는 살짝 취한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리에는 어둠이 언제나처럼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살아내야 할 삶의 무게를 억지로 가까스로 감당하며 이미 지나간 일들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물론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젊은이들은 세렝게티보다 잔혹한 도시의 생리를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연애이며 서로의 몸에 대한 속궁합이며 죽음 따위는 개나 줘버려라, 하는 패기이며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무지였다. 연애 중인 많은 젊은이 사이를 걸어 우리는 종로3가역 5번 출구로 들어갔다. 다음에 또 만나자며 헤어졌다. 5호선 출입구인 탓에 1호선으로 갈아타고 또 4호선으로 옮겨 타야 했다. 미로를 걷고 또 걷다 보니 참 애매한 곳에서 만났다는 생각. 물론 장욱진에 대한 배려 때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중간 지점에서 만났으니 괜찮은 거 아니냐?”
김용덕은 투덜거리는 나를 핀잔했고 4호선이나 1호선에 익숙한 나는 지하철 출입구의 의외성에 골몰했다. 글쓰기는 결국 삶의 의외성에 주목하지 않나. 도무지 꼼짝하지 않는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 퍼뜩 떠올랐다. 언론이 어떻게 삶을 파괴하는가.
김용덕은 길음역에서 내렸다. 헤어진 뒤에도 장욱진은 카톡을 날렸다. 즐거운 자리였느니 다음에 또 보자느니 하는. 창동역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진으로 삶을 기억하지 말 것. 관계로 기억할 것.’ 나도 녀석들에게 카톡을 날렸다. ‘가볍고 한없이 무거우니’는 문자 보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