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와 펭수

by 이순직

역사는 해석이다.


현재의 가치관을 과거에 투사(投射)하는 일. 물론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굳이 설득하거나 논쟁하고 싶지 않다. 우리 주위의 많은 동화가 실은 얼마나 잔혹한 이야기인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팥쥐가 젓갈로 담궈져 먹거리가 되었다는 결말은 권선징악의 가장 살벌한 예시도 아니다. 헨젤과 그레텔 역시 잔혹하다.


그런데 브레히트와 펭수를 같이 묶어놓는 짓도 잔혹할까?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서사극과 마당극을 묶어놓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풀어놓는 것이 잔혹하다? 잔혹과 거리가 먼, 머릿속에 무언가 들어 있는 듯한 현학적 취미를 자랑하는 짓일지도. 그러나 속내를 말하자면 브레히트와 펭수를 묶어놓는 짓은 잔혹하다. 브레히트 쪽이든 펭수 쪽이든 어느 한쪽이 밑지는 장사기 때문이다.


브레히트는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고 펭수는 날로 몸값이 치솟는 캐릭터이다. 이미 죽었으니 살아 있는 캐릭터와 싸움이 되겠냐고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된다. 이미 죽은 공자나 석가모니나 예수나 마호메트가 아직도 살아 생기 넘치게 펄펄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이런 비유가 피부와 와닿지 않다면 당신의 몸속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이, 세포가 살아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있나?


브레히트와 펭수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서사극과 확장된 마당극이다. 서사극이 어떻고 마당극과 확장된 마당극이 이렇고, 얘기하면 재미없다. 그러니 고유명사 브레히트가 아니고 펭수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 주길 바란다. - 욕심인가?


브레히트는 아리스토텔레스 큰형님의 가르침에 저항했다. 저항에 그치지 않고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나면 대체로 피바람이 불기 마련이고 오랫동안 브레히트는 반역자의 대명사로,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악플에 시달렸다.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목소리 크다 싶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좌빨이네 마르크스 쫄따구네 어쩌네 떠들어 댔다.


영화가 있기 이전이라 딱히 소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은 간혹 극장에서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을 보면서, 큰형님의 가르침에 반란을 일으킨 브레히트를 보면서 조중동의 말들이 진실이라 믿어 격렬하게 비난했고 급기야 극장 앞에서 ‘브레히트는 사기꾼이다! 브레히트를 쳐 죽여라!’ 현수막을 국기처럼 휘날리며 시위하곤 했다.


몇몇 사람들은 바로 옆 극장에서 공연 중인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나 강 건너 극장에서 연일 매진 행렬을 일삼는 피터 셰퍼의 ‘에쿠우스’를 관람하는 것이 예술적 품위를 충족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다며 상도덕에 어긋나는 매표 행위를 하곤 했다.


그 무렵 지구 반대편 한 마을, 동네 널찍한 마당에서 놀이가 펼쳐지곤 했는데 탈을 쓰고 양반의 치부를 폭로하고 야유하는 내용이라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며 밑바닥 삶을 조금씩 위로했다. 상상하기 힘들다면 김광림의 ‘달라진 저승’을 기억해보라. 암튼 가난한 삶이 가진 자에 대한 풍자나 야유로 혹은 해학으로 위로받는 풍경은 지금도 낯설지 않다. 요즘은 풍자보다 대리만족이 유행이라 옛날보다 사람들이 뜨뜻미지근해졌다.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거머쥔 왕이 없거나, 있더라도 종이호랑이여서 그런가?


암튼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을 때 ‘남’을 지지하고 환호함으로써 ‘남’의 이미지를 통해 가난하다고 여기는 ‘물질적인 것, 정서적, 혹은 정신적인 것 모두’ 자신이 보상받는다고 믿는다. 손쉬운 예로 연예인에 대한 팬덤 현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와 너를 구분하기 시작하는 유아기 어느 한 지점부터, 빅뱅의 그 시작점부터 이미 불행하다거나 불공평하다는 자의식이 생겨, 굳이 프로이트나 융을 얘기하지 않아도 알지요? 당신들은, 일종의 경쟁의식 혹은 비교 본능이 암세포처럼 자신을 지배한다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펭수의 쓰임새를 보면 캐릭터를 소비하는 양상을 살펴보면 ‘브레히트는 사기꾼이다! 브레히트를 쳐 죽여라!’ 정도까지 격렬하지 않은 사람들의 반응에 오히려 근심거리가 있다. 솔직히 누가, 지금, “펭수는 사기꾼이다! 펭수를 쳐 죽여라!” 구호 외치는가? 설상가상 “내가 펭수다!” 외치는 이들이 더 많다. - 이거 내가 꼰대짓 하는 거 아닌지 몰라?


이런 사회현상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보릿고개가 사라진 지 오래되어도 여전히 먹방이 유행하는 현상을 사회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당연히 독자 중에서 사회학자나 역사학자는 없겠지만. 그러나 펭수 현상을 마당극으로 이해하면, 브레히트의 서사극으로 받아들인다면 펭수를 환호하고 소비하는 이들이 2019년 여름쯤부터 공연을 시작한 이 거대한 연극의 위대한 관객이자 동시에 연기자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삶은 연극이며 동시에, 이때 연극은 배역에, 대본에 충실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의지에 따라 삶을 사는 사람의 내외면(內外面) 총합을 뜻한다, 삶이라는 무대에 서서 주어진 시간을 주체적으로 소비한다는 인식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연극이다.


“연극 얘길 한다면서 무슨 헛소리만 늘어놓는 거야?”


“제4의 벽을 인정하지 않는 서사극의 특성은 왜 얘길 않는 거야?”


“역사는 해석이라며? 왜 그런데?”


“세습무도 사실은 오랫동안 연습생 시절을 거친 세련된 배우인데 펭수와 다른 점은 뭐야?”


“날 가르치려고 하지 마. 건방져. 그냥 살다가 죽으면 끝이야, 돈이 왕이지 뭐 있어? 어차피 한 번 태어난 인생인데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김수영 얘긴 안 할 거야?”


“버스에 치여 죽었다는? 양계장을 하면서 풀을 쓴 그 시인? 이승만을 되게 욕하던데?”


“연극 얘길 제대로 하면 좋을 거 같아요. 가령 연극 한 편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던가 혹은 배우 연습? 배우 하려면 역시 감정선을 잡는 중요점을 포착해야 하는데 그런 노하우를 알려주던가요. 아님 대학로에서 봤다는 에쿠우스 관극평이라도?”


“개소리야. 모두. 연극? 배곯는 소리지. 브레히트가 밥 먹여 줘? 나 죽으면 세상도 죽는 거야. 나 없는 세상 신경 쓸 필요 뭐 있어? 물론 나 말고 다른 놈들이 세상을 살겠지. 그런 세상까지 내가 신경 써야 해?”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면 그 누군가는 계속 살아 있는 거야. 왜 육체 있는 삶만 삶이라고 여겨? 육체 없는 삶도 있다는 걸 몰라?”


“전부 말장난이야. 말을 가지고 장난친다는 거야. 딴 거 없어.”


가난했던 청년 시절. 연극을 했고 지금은 연극에서 벗어났지만, 가난은 벗어나지 못했다. 정말 나는 가난했던 걸까?

이전 24화시간화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