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몸에 붙는다. 움츠러드는 살갗만큼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우리는 겨울 앞에서 긴장한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벌판에서, 혹은 지축 기울기에서 온 것이라고도 한다. 불량배처럼 껄렁껄렁 몰려다니는 추위는 설명할 수 있지만, 우리들 마음에 찾아든 겨울은 어떤가. 생각해보라, 겨울 기억들이 지축 기울기에서 혹은 시베리아 벌판에서 왔다고 하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해 겨울은 누구에게나 있다. 마음 조용히 가라앉히고 떠올려보라. 그해 겨울을. 당신의.
당신은 꼬마일 것이다. 일어나 창문 밖을 본다. 세상이 하얗다. 함박눈이 밤 내내 내려 산도 집도 길도 사람들도 하얗다. 일찍 일어난 또래들이 놀이터에서 눈놀이를 한다. 아이인 당신 마음도 바빠진다. 세수도 하지 않고 바지를 꿰차고 놀이터로 달려간다. 또래들과 어울려 멍멍 짖는 이웃집 강아지와 어울려 당신은 눈밭에 파묻히면서도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곁눈질할 것이다. 훔쳐볼 때마다 가슴 저 밑에서 짜릿짜릿 흥분이 돋아났을 게다.
세상은 한번 살아볼 만하다고, 어쩌면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예전에도 했다는 기지감도 들었을 게다. 사실 당신은 몸속에 얼마나 많은 겨울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가. 아득한 빙하기, 먹잇감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냥꾼들의 기억도 눈치채지 못한다. 눈 덮인 테를지(Terelj)를 남하하는 한 무리의 기억도, 이윽고 도착한 쑹화(松花) 강가에서 꽝꽝 언 얼음장 깨고 목 축이는 기억들도 있지만 모른다. 당신은, 이미 알지만 모르는 수많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꼬마인 당신은 눈밭 속에서 자그마한 돌들을 모아 소꿉놀이 탑을 쌓는다. 밤자갈 반듯하게 깔린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귀돌 놓고 견칫돌 얻는다. 뒤굄돌이나 틈막이자갈도 있을 곳에는 있게 없을 곳에는 없게, 야무진 솜씨다.
“고놈 참, 어디서 배웠을꼬?”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있는 서예실로 발길을 옮기던 동네 할아버지가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혀를 내두른다. 할아버지의 낡은 가방 안에는 금석문 책자가 있다. 꼬마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다. 관목 숲으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나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꼬마 표정은, 오래전부터 익히 아는 표정이다.
당신은, 그 겨울도 잊지 못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기를 느껴 흥분과 짜릿함에 벅차 콧노래도 흥얼거렸을 게다. 그러나 자아 찾기에 나서면서 호기심과 의심으로 가득 찬 눈빛, 불쑥불쑥 복받쳐오는 알 수 없는 감정들에 마구 뒤섞이는 코앞에 닥친 현실, 자신 마음도 읽을 수 없어 혼란스러운 얼굴, 부쩍 거뭇거뭇해지는 불알,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들 따위들에 갇힌 당신은, 하나뿐이지만 동시에 세상에 단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에 치를 떨기도 했을 게다.
당신은 블리자드(blizzard) 속에 홀로 서 있는 셈이다. 비로소 마음의 첫겨울에 발을 디뎌놓는 순간이다. 부정하고 거부하고 몸부림치고 반항하고 욕지거리를 퍼부어도 메아리로 돌아오는 첫겨울의 혹독한 고통. 첫겨울은 중무장한 점령군처럼 당신 안에 있는 수많은 당신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백두산 기슭을 내려오는 당신을,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방향 잡아 아리수에 이윽고 도착한 당신들을.
당신 안에 있는 당신들을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씩 잊어버림으로써, 혹독한 첫겨울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다, 몰골스럽게, 가까스로, 당신은.
수학에서 영어로, 국어로 옮겨 다니면서 밥과 이름이 그 안에 있다 믿을지도 모른다. 현실이 토끼몰이하는 사이 학교 성적만큼 삶을 꾸려갈 수 있다며, 바닷가에서 태백산맥을 횡단해 단양 수양개에 도착한 당신들을 까맣게 잊고, 당신은 지금 여기 있는 당신만이 당신이라 믿는다. 느닷없이 떨어지거나 솟구쳐 오른 존재라고 믿는다. 핏줄 안에, 뉴런(neuron) 속에 있는 당신들을 결코 눈치채지 못한다.
당신은 졸업과 진학을 거듭하면서, 혹은 상대성 이론이나 유클리드(Euclid) 기하학, 근대 기점에 관한 논쟁 따위로 상상력을 틀어막으면서 어른에 한발 다가섰다고 여긴다. 직장을 구하고 여자를 만나고 퇴근 후에는 근사한 호프집에 앉아 애써도 되살아나지 않는 첫겨울을 더듬어본다.
그러나 그런 날은 아주 드물다. 날씨를, 주식을, 부동산을 얘기한다. 월급은 저금과 생활비와 용돈과 비자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기지만 실은 상상력을 억제하는 대가도 포함되어 있다. 첫겨울 이후로 기지감을 느끼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이빙처럼, 당신을 삼십 대 중반으로 곧장 꽂아 넣는 시간을 느낄 즈음 결혼을 떠올린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면 결혼할 것이고 그런 여자가 없더라도 사랑할 수 있다며 결혼할 것이다. 첫날밤이 제의(祭儀)라는 걸 당신은 모른다.
첫아이가 태어난다. 아이는 당신을 닮았다. 눈과 코와 성격과 버릇과. 당신은 아버지를 닮았다. 당신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꼬마인 당신은 테를지(Terelj)를 남하하는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본다. 할아버지 눈빛에서 지난한 삶의 내력을 읽어내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꼬마는 돌탑을 손으로 뭉개고 또래들 속으로 뛰어간다. 할아버지 눈에는, 아이들 눈놀이가 금석문 책자 자구(字句)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는 아파트 4층 복도에서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문다. 건너편 아파트 동(棟) 앞에 있는 놀이터에 겨울나무들이 있고 그네와 정글짐과 미끄럼틀과 구름다리와 찬바람이, 꼬마와 또래들과 할아버지가 있다. 놀이터는 작은 세상처럼 보인다. 마지막 한 모금도 깊게 들이마신다. 환영처럼, 아득한 빙하기의 당신들부터 시작된 당신들을 놀이터에서, 나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