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마이 외숙씨

by 이순직

1


몇 해가 벌써 지나갔는지 머릿속으로 한참 더듬어볼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며 손짓과 몸짓이 흐릿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나마 술상 앞에 불편하게 앉아 쌓은 기억보다 소중한 장면 하나 있어 다행스럽긴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흐릿해질 터.


아마도 선선한 여름 저녁 무렵. 슬금슬금 꽁무니 빼는 해가 어설픈 하늘풍경 아래 번동 사거리 근처 다세대 주택들이 달동네처럼 옹기종기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이로 서툴게 뚫린 좁은 골목길을 손 꽉 잡고 걸었다. 그녀의 손을 처음 잡은 터라 긴장한 나머지 힘을 너무 주고 있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정작 손가락 힘은 빠지지 않고 더욱더 단단해졌다. 마음과 다르게 움직이는 몸을 어쩌지 못하고 급기야 손에 준 힘 때문에 걸음걸이마저 부자연스러웠다. 그녀와 나의 걸음이 엇박자가 나면서 마지못해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들 눈빛 때문이었다.


“큰 잘못을 했구나!”


모두 그런 투의 눈길 던져 나는 얼른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불편한 기색이 살짝이라도 있다면 손가락 힘을 빼지 못할 바에야 아예 손잡기를 그만두는 게 나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불과 서너 달 남짓 두세 번 만난 터라 어쩔 수 없이 당연히 서먹서먹하고 선뜻 무슨 말을 꺼내기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손을 잡고 그것도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싶어 있는 힘껏 손을 잡고 좁은 골목 걸음 엇박자로 걷고 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 터지는 비현실적인 장면.


쌀가게 앞을 지나고 초등생 아이들 단골집 문방구 앞으로 지나고 오래전 국수 공장이었다가 동네 마트로 바뀌어 외상 소주 가져다 먹는 가게 앞을 지나도록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단단히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남들이 보면 영락없이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는데 꽉 다문 입술과 웃음기 하나 없는 굳은 얼굴, 약간 찡그린 미간 따위가 서로를 너무나도 자세히 알고 있어 앙숙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의정부 가능동에서 만났을 때 주고받은 말들이 단답형이라 대화라고 할 것도 없었다. 물론 성격 자체가 말수가 적은 데다가 낯가림도 없지 않아 있어 사람 사귀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은 있어 스스럼없이 다가서지 못한 내 탓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먼저 내게 다가오기도 쉽지 않았을 터. 앙다문 입술로 표정 변화 없이 돌부처처럼 앉아 있으니. 아무리 술상 앞이라고 해도 살갑게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좁은 골목을 벗어나 조금 큰 골목에 들어서면서 사람을 만나 파악하고 말을 건네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평소 같으면 십여 분이면 충분한 버스 정류장이 까마득했다. 엇박자 걸음 탓일 수도 있고 마음과 달리 힘껏 힘 들어간 손가락 때문일 수도 있고 그녀에게 따뜻한 말들로 다가서지 못하고 무뚝뚝한 침묵만을 앞세우는 성격 탓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으로 그녀와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는 막연한 짐작은 하고 있었다. 옷깃만 스쳐도 전생(前生)에 깊은 인연이 있다는 인연관(因緣觀)이 운명론이나 숙명론으로 연결되어 인간의 의지와 신념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비난을 피해갈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녀와 손잡고 골목길 걷는 순간만큼 깊은 인연 있을 거라 믿었다.


사실 밤하늘 별만큼이나 많은 사람 중에서 특정한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롭지 않은가. 인과론(因果論)으로 설명하려 들거나 신전(神殿)의 계시라고 무턱대고 믿어버리는 것은 어째 좀 게으르고 지질하고 불성실하게 느껴진다. 인연을 받는 사람으로서.


큰 골목을 빠져나오자 버스 정류장. 앞에서 걸어오거나 뒤에서 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곁눈질한다. 그렇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손을 여전히 꽉 움켜쥐고서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의정부 가는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아 우리는 초점 잃은 눈빛으로 길 건너편 우체국이나 옷가게와 식당들을 바쁜 걸음 재촉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몇 달 전만 해도 그저 눈에 치이는 평범한 풍경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를 알게 되면서부터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그림처럼 느껴지고 특별함을 인지하는 내가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라는 자의식.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여전히 서먹서먹했으며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나 살아갈 날들에 대한 당부나 격려 따위를 말없이 잡은 손의 온기로 주고받았다. 앞날은 알 수 없기에 어쩌면 더욱 흥미진진하고 설령 좌절이나 희망 없는 절망이 눈앞을 겹겹이 에워싸도 슬퍼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꿋꿋하고 담담하게 살아갈 거라는 믿음 같은 것들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버스가 오고 그녀가 탄 버스는 미련 없이 의정부를 향해 내달렸다. 나는 버스 뒤꽁무니를 한참 동안 보면서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사진 하나를 찍었다.


그날의 사진은 몸속으로 들어와 오랫동안 저 혼자 꿈틀거리다가 흩어지고 모이고를 반복했다.


오늘도 이 땅에 누군가를 남길 이들이 태어나고 누군가 죽고. 햇살 밝다. 눈부시도록.


2


요즘은 유치원에서 읽기를 깨우치는 경우가 많다. 쓰기 또한 마찬가지.


외숙씨는 맏손자가 대학 마지막 학기를 다닐 즈음에 가까스로 읽기와 쓰기를 깨우쳐 의정부 가능동에 가면 시(詩)를 써 자랑스레 내보이곤 했다.


술상을 앞에 놓고 내게도 낯선 대학노트에 꾹꾹 눌러쓴 연필 글씨가 눈에 박혀 마음 먹먹해지기도 했다. 대부분 맏손자에 대한 내리사랑과 할머니를 기억하라는 내용이지만 정작 읽기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있다는 자의식은 별로 없어 보였다. 아니 외숙씨 입장에서 세상은 곧 맏손자이고 맏손자가 세상 전부가 아니었을까.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막냇사위도 좀 생각해 주시지…, 섭섭함을 감추기도 했다.


외숙씨의 육개장과 물김치. 기억이 군침을 돋운다. 지금은 재건축해서 말끔하고 현대적인 가능1동 동사무소이지만 외숙씨를 만나러 가는 무렵에는 낡은 단층 건물이었고 저만치 보일 때부터 군침이 돌았다.


“이서방. 장사는 어때?”


“뭐, 늘 똑같지요.”


당시 작은 오퍼상에 있었는데 네트워킹 하드웨어를 주로 판매했다. 거래처에서 필요로 하는 하드웨어를 주문받아 산호세(San Jose)에 사는 막내가 현지에서 사들여 한국으로 보내면 통관 절차를 밟아 납품하는 형식이었다. 매출이 들쑥날쑥이라 사무실 운영비와 급여 때문에 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그런 마음을 외숙씨에게 굳이 알릴 필요가 있을까?


얼굴에 백년손님이라 써 붙이고 의정부 가능동에 가지 않지만 늘 술상 앞에 앉았다. 사위 셋 중에서 유일하게 무턱대고 술을 즐기는 편이라 아내는 언제나 옆구리를 찌르며


“취할 정도로 마시지 마!”


협박했다.


폐암 말기로 외숙씨가 입원했을 때 일주일에 한 번씩 병문안 갔다. 가도 손님인 사위로 떠밀러나 이렇다 하게 역할은 없었다. 둘째 아들인 수락산 그가 도맡다시피 한 병시중은 늘 안타까웠다. 한 번은 이른 새벽 창동에서 버거와 콜라를 사서 의정부 병원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봉투 속에서 버거와 콜라가 마구 뒤엉켜 엉망진창이 되어버려 수락산 그에게 건네는 것조차 미안스러울 정도였다. 병원 앞에 버거 가게가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외숙씨는 병상에 누워 말수 적어지고 눈인사만 가까스로 나눌 수 있을 정도까지 몸이 허물어지자 내색하지 않지만 이런저런 마음 준비를 하는 듯했다. 나 역시 ‘삶의 저 끝 – 창원기행’을 통해 이미 눈치챘지만 마지막 길은 비장하거나 장엄하지 않고 그저 일상의 작은 소동일 뿐이었다.


삼일장 끝난 이른 아침 외숙씨가 탄 버스는 상주 승천원을 향해 달렸다. 창밖 풍경은 어제와 다름없고 사람들 또한 어제처럼 오늘을 살 뿐이었다. 불현듯 지금 외숙씨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생각. 상주가 가까워질수록 나이는 점차 줄어들어 탯줄이 묻힌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살면서 감당해야 했던 고단함과 슬픔과 분노와 서러움이 사라지면서 갓난이가 되는 건 아닐까. 엉뚱한 생각에 한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길고 지루한 달림 끝에 승천원에 도착했고 외숙씨는 짧은 기다림 끝에 화로(火爐) 안으로 들어갔다.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마지막 절차. 승천원 마당을 자궁 속에서 유영하듯 이리저리 걸었다. 어쩌면 화로에서 나온 외숙씨와 함께 걷고 있을지도 몰랐다. 손 꽉 잡고 손가락에 힘 들어간 탓에 걸음은 엇박자를 내면서 까마득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듯 승천원 넓은 마당을 이곳저곳 살피면서 외숙씨의 마지막 산책을 동행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몸을 벗은 외숙씨와 모동면 이동리로 갔다. 이 산 저 산 흩어져 있던 조상들을 모두 모아 모신 가족묘지. 키 작은 묘비 앞에 한 줌 가루 외숙씨를 모셨다. 그녀를 알고 지내던 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으며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외숙씨에 대한 기억들이 우리를 슬프게 혹은 안타까움에 가슴 저리도록 해도 그녀 탓이 아닌 것을 살아남은 자의 몫인 것을 우리는 저마다 서툴게 짐작하고 있었다.


“야학이 재미있어. 선생들도 다들 착하고.”

“어떤 시를 또 쓰고 싶으세요?”

“문집을 만든다는데 뭘 써야 할지 고민이야. 그런데 나 죽어도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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