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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이순직(李順稙).

참여내용 : 이순직은 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충청도 천안 구정리에서 체포됨.

참여지역 : 충청도 천안.

출생‧사망연월일 : 미상∼미상

등록일자 : 2009.11.25.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 회복 심의위원회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을 읽자 숨이 멈추면서 기묘한 동질감과 함께 숙연함이 빠르게 온몸으로 번져갔다. 지금의 봄을 숨 쉬고 있는 나(李淳稙)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에도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하듯 시간을 뛰어넘은 어떤 공간에서 접주(接主) 이순직을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에, 증조할아버지(李用璿, 1889∼1974)가 다섯 살 나던 해 천안 구정리에서 체포되었다는 사실이 온갖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차근차근 현실화하던 무렵이라 겪어보지 않고 알 수 없는 수많은 일이 울분을 쌓이게 하였을 터이고, 봉건적인 제도와 인습을 타개하고자 집단지성(集團知性)의 힘이 모이던 그 땅이 지금 내가 두 발 딛고 있는 이 땅과 다를 바 없으니, 며칠 전에 끝난 총선에 그나마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다.


가운데 한 글자 한자(漢字)가 다르긴 하지만, 돌림자 마지막 글자 직(稙)을 나와 같이 쓰는 이순직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접주이므로 동학의 교리를 이해하는 지역 엘리트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나, 혁명에 참여할 당시의 나이도 생몰년대(生沒年代)도 알 수 없어 상상이나 추측에 맡겨둘 수밖에 없다.


임진왜란 때 논개가 적장(敵將)을 끌어안고 죽었다는 얘기는 유교적 질서가 견고한 사회에서도 신분의 귀천을 넘어 여성의 구국 행위가 있었다는 것인데, 다분히 예외적인 경우라 접주 이순직을 여성으로 보기에는 어렵지 않을까. 왜냐면 접주란 동학 교단 조직인 접(接)의 책임자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일정한 지역을 책임지는 직책이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 역시 접주였다.


그뿐만 아니라 손화중‧김개남‧김덕명‧최경선‧이방언‧김인배‧서장옥‧최시형‧손병희‧김구 등이 접주이거나 통령(統領)이었다. 따라서 접주 이순직은 남성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전봉준은 41세이던 1895년 3월 30일에 처형을 당하여 동학혁명이 미완성으로 끝나는데, 이순직 역시 30대이거나 40대 초로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과 매우 다른 결혼 적령기를 염두에 두면 당연히 한 집안의 가장이었을 것이고, 요즘과 달리 농경 중심의 경제여서 집성촌(集姓村)이 많았던 터라, 구정리는 집성촌으로 유추할 수 있다.


집성촌에서 시작하여 천안 지역의 접주가 되어 혁명에 참여했으나, 전봉준보다 두 달가량 먼저 체포되었으니, 아마도 먼저 처형을 당하지 않았을까. 전봉준이 12월 2일에 체포되어 다음 해 3월 30일에 처형당했으니, 불과 넉 달 차이다. 섣부른 추측이나 1895년 초이거나 늦어도 전봉준과 엇비슷하게 처형당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친일운동가의 자식보다 궁핍하고 모진 세월을 살아온 것처럼, 당시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접주의 가족들 삶이 어떠했는지 유추하기 어렵지 않다. 물론 지금보다 혈족에 대한 애정이 훨씬 많았다고 하더라도 부정(父情)을 대신할 수 없고, 어찌어찌 끼니를 거르지 않는다고 해도 풍족하지 않았을 것이며 조중동 씨가 없었지만, 궤멸한 동학혁명가에 대한 싸늘한 시선을 만들고 부풀려 마치 한국전쟁 이후 연좌제처럼 낙인찍는 왜곡된 사회적 여론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던 무렵이 아닌가. 조선과 비교해 일본이 훨씬 세련되고 합리적이며 우월하다는 인식이 불과 몇 달 전까지 우리의 머릿속에 살모사처럼 꽈리를 틀고 앉아 있었으니.


아비 없는 호래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랐을지라도, 피는 속이지 못해 동학 혁명정신은 항일운동으로 발전해 비록 해양 세력의 도움을 받긴 했으나 광복(光復)으로 이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물론 전광용의 ‘꺼삐딴 리’에 등장하는 이인국처럼 시대적 기회에 올라타 자신의 부와 영달을 쌓아 올린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주춤거릴 수는 있어도 결코 걸음을 멈추는 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근대사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한글을 만들어내기까지 수천 년 동안 포기하지 않은 역사 역시 세계 어느 민족을 보아도 찾을 수 없는 끈질김을 이해한다면, 한강의 기적이 한 명의 기지(機智)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의 숱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으로 만들어낸 기적이지 독재자의 머릿속에서 뚝딱, 떨어진 것은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하고, 기득권 유지를 위해 한강의 기적이라는 포장을 이용하지 않았나.


이순직은 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충청도 천안 구정리에서 체포됨.


처자식이 있는 30대이면서 지역 엘리트로서 동학혁명에 뛰어들었으나, 아마도 불혹을 넘기지 못하고 처형당했을 이순직에게 지천명(知天命)을 사는 후신(後身)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선택은 정의로웠으며 삶 또한 헛되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초연(超然)한 용기는 여전히 핏줄 타고 흘러 이 땅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당신과 함께했던 이름 남김 없는 수많은 목숨 또한 다를 바 없으니 이 땅을 오늘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위대한 무의식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전신(前身)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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