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때?
누구도 묻지 않아 퇴근길 버스 차창에 눈길 붙박고 풍경은 보지 않은 채 중얼거린다.
형편과 본질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더 중심을 잡느냐에 따라 의지와 상관없이 얼굴과 눈빛이 바뀌어 하루를 산다는 걸 막연히 짐작했으나 몸 어느 구석에선가 도둑처럼 숨어 있다가 오십 고개를 훌쩍 지나자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명제에 전율이 돋아 깜짝깜짝 놀란다.
가령 이렇다. 정신없이 페달을 밟다가, 맞바람을 뚫고 양주에서 동두천으로 내달리는데 이제는 죽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지 않나. 느닷없이 뒷덜미 서늘하게 만드는 명제 역시 그런 경우다. 자전거 도로가 공사 중이라 둑길로 올라 달리는데 두 달 남짓 자란 푸른 벼들의 출렁거림에 정신을 반쯤 놓은 상태에서 느닷없이 치고 들어오는 명제에 나는 또 악착같이 페달을 밟았다. 정강이에 달라붙어 꼼짝달싹하지 않는 거머리를 떼어낼 듯이.
하루들을 의지에 따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젊은 날들이 지나자 의지보다 더 독한 놈이 있는 걸, 운명이라는 거창한 말로 표현하든 말든. 아무튼 그런 놈이 있다는 걸 조금씩 눈치채는 걸까. 꿈꾸지 않아도 이미 꿈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이런 경우일까. 허무하다던가 혹은 살아온 시간들이 통째로 무의미하고 이를 데 없이 푸석푸석해서 낯선 사람의 콧바람에도 쉬 흩어져버릴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는데 형편과 본질이라니!
반년 전에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꽤 절박한 문제에 부딪혀 엄청나게 골몰하다가, 옷깃처럼 스쳐 지나간 형편과 본질의 명제가 요즘 다시 떠오른 건 아무래도 어쭙잖은 직장생활 탓일 게다. 집에서 학교로 쳇바퀴 돌던 만년 시간강사를 때려치우고 민낯의 사람들과 부딪치는 직장생활을 하루씩 쌓아가면서 생긴, 삶에 대한 서러움 같은 힘이 울컥, 명제를 몸 밖으로 게우게 하지 않았을까.
이유나 과정이야 어떻든 요즘 들어 그 비슷한 구역질을 자주 느낀다. 당연히 몸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명제들을 좌판에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다. 구구절절 설명 많으면 말의 힘이 약해지기 때문.
눈길을 처음으로 돌리자.
나는 결정의 순간에 형편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나?
의구심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들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누구나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가지 않은 길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가지 않은 길은 몸 어느 구석엔가 너무나 꼭꼭 숨어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고 설령 찾는다고 해도 지금의 나에게 생판 모르는 낯섦으로 다가올 게 분명하다. 익숙하지 않다는 것과 다르다.
어쩌면 존재조차 모르던 생물체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 경계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기묘한 감정들이 솟구쳐올라 판단의 잣대가 흔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저마다 몇 십 년 동안 쌓아서 본능처럼 가지고 있는 가치 기준을 마구 흔들어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것만큼 무서운 놈이 없다.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리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을 살아왔지만 정작 빈털터리라고 여기면 초라하다 못해 햇볕조차 들지 않는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 싶거나 과격하게 삶에 대한 복수로 죽음을 염두에 두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을 여기까지 밀고 나갈 필요가 굳이 있을까? 제아무리 행복한 삶이라도 미다스의 손(Midas touch)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기억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 아니던가.
어쨌거나 형편과 본질을 고민하는 동안 또 다른 명제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은 너무나도 오래되어 물린다는 느낌마저 들어 눈에 들어오는 동두천 신천의 풍경보다 지루하고 천변에 작은 파라솔을 받치고 앉아 낚싯대를 드리운 몇몇 사람들을 찾아내는 일만큼 시시하고 선업교 다리 밑 쉼터에서 한정판 카본 자전거를 자랑하는 노년의 사내만큼 찌질할 수 있다.
그것은 델포이(Delphoe) 아폴론 신전의 앞마당에 새겨져 있던 ‘너 자신을 알라’이다. 수메르의 쐐기문자 이후 페니키아 알파벳에서 고대 그리스 알파벳으로 진화하기 훨씬 전에, 음성만이 존재하던 가늠조차 하기 힘든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낸 시간의 두터운 층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아폴론 신탁(神託)이 손끝에서 문자로 드러나는 순간은 아마도 인식의 빅뱅이 아닐까.
아무튼 신탁과 명제는 한동안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내 머릿속에서 따로 놀다가 추상명사인 관계를 끌어들이고서야 비로소 제 무게를 갖게 되었다. 가령 이렇다. 관계 속에 놓인 너 자신을 알라. 여기서 쉽게 페르소나(Persona)를 떠올릴 수 있지만 전혀 다른 개념이다.
페르소나는 자신보다 관계에 방점을 찍고 있으나 신탁은 자신에게 방점을 찍어 관계를 재설정 또는 개선하거나 파기하는 용기를 북돋는다. 사회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자신과 삶의 관계. 혹은 어떤 관념이나 신념 따위와의 관계 등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주장일 뿐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가치 기준에 묶여 살아가지 않던가.
자전거 도로가 끝나고 상패교 건널 때쯤이면 집에서 멀어진 거리만큼 자신이 가벼워진다. 삶의 중심이 온통 가족에게 몰리는 중년도 막바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내일에 대한 암울과 부질없는 욕망을 상대로 힘겹게 싸우던 젊은 날들을 아이들도 고스란히 겪을 짐작에 입가로 씁쓸함이 번진다. 뒤돌아보면 의미 없는 헛발질이 얼마나 많았던가. 비록 그것이 연륜을 쌓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일지라도.
생각이 샛길로 빠지고 있다. 바로 잡자.
상패교를 건너 다시 시작하는 자전거 도로를 타고 소요산으로 달린다. 철로를 가로질러 오르막이 시작되면서 종아리에 힘이 들어간다. 숨이 거칠어진다. 돌아갈 길은 여전히 남았지만 가야 할 길 끝이 가까워질수록 신탁과 명제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저마다 중요하다고 믿는 무엇과의 관계 속에서 형편과 본길을 구분한다는 깨달음. 그래서 사는 모습이 서로 다르지만 ‘중요하다고 믿는 무엇’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확신이 불러오는 물음 – 너는 제대로 살고 있냐?
자신에 대한 조롱과 비아냥에 가까운 물음 앞에서 길 끝을 향해 페달질 멈추지 않는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명제처럼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 어디 있는가.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 하여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고 좌절하고 물음을 자신에게 던지지 않는가.
길 끝에 <反共犧牲者慰靈塔>이 있다. 아직도 거리 곳곳을 점령한 지난 시대의 구호가 괴벨스(Joseph Geobbels)의 선전물처럼 느끼는 이는 오직 나뿐인가?
자전거를 석재난간에 기대여 세우고 계단에 쭈그려 앉아 커피 한 모금 마시면서 끊지 못한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면서 등 뒤에 선 위령탑을 올려다보며 드는 생각들이 아침 햇살을 받는다. 아무리 싱싱한 햇볕을 받아도 생각들이 상식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눈물과 아픔을 흘리고 느껴야 할까. 짐작조차 아득하다.
퇴근길 짙어진 버스 차창 밖 어둠에게 다시금 물어본다.
요즘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