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5일 정오. 마지막 데이트에 나섰다. 내 차는 전기장치 관련 고장이라 아버지 차를 타고 의정부 가능동으로 갔다. 집주인은 도착하지 않았으나 쉽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방과 건넛방 2개에 어마무시한 크기의 거실과 주방이 나를 압도했다. 게다가 천장 높은 구조에 벽은 굴곡진 패널로 덮여있어 난공사였다. 아버지는 천장과 벽을 줄자로 치수 재고 나는 골목으로 나와 담배 물었다.
의정부 가능동. 도로 건너편에 처갓집이 있었다. 이제는 두 분 모두 돌아가셔 맏처형네가 산다. 작년 가을쯤 맏처형을 보았다. 퇴원할 때와 다르게 몸에 살이 제법 올랐으나 투석 탓인지 팔뚝 혈관이 볼썽사납게 부풀어 올랐다.
집주인이 방산시장에서 벽지와 풀, 방습지와 초배지를 사 가지고 왔다. 일이 끝난 뒤에야 알았지만, 집주인은 젊은 날 집 장사를 해서 도배공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값싸게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발품을 팔아야 했지만. 아버지는 벽지 재단을 시작했고 나는 널찍한 화장실에서 커다란 대야에 풀에 물을 섞어 개었다. 여주인은 80대 초반이거나 70대 후반으로 보였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자 아버지와 나는 도배 준비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골목으로 나왔다.
사건의 시작은 장모의 엄지발톱이었다. 장모가 엄지발톱이 기형적인 모양으로 자라 살갗에 파고들어 걷기가 불편하다고 수락산 그에게 투덜거리자 병원에 함께 갔고 며칠 뒤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폐암 말기였다. 복병은 항상 예기치 못한 곳에 있었다. 길고 지루한 여름이 끝나갈 무렵 장모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훌쩍 건너갔고 홀로 남은 장인은 간혹 아버지와 수락산 그녀의 친정아버지와 셋이서 만나는 모임에 참석할 뿐 두문불출(杜門不出)이었다. 결혼생활 50년이 넘어 친구가 혹은 웬수가 되든 상관없이 짝이 없는 때와 있는 때는 천지차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의정부 가능동 단독주택 공사장으로 가서 일을 시작했다. 창동 초안산에서 내려오는 바람 맛만큼은 아니지만 가능동 이른 아침의 신선한 골목 바람이 거실 가득 들어찼다.
“오늘 끝낼 수 있으려나.”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얼추 가늠했다. 해 떨어지기 일보직전이나 골목을 꽤 무거운 어스름이 점령할 즈음 끝낼 수 있을 거라 말하지 않았다. 반드시 그렇지 않지만 부자(父子) 사이는 말이 별로 없다. 게다가 경상도가 아닌가. 가능동 골목 바람을 간간이 느끼며 거실에 쭈그리고 앉아 어제 재단한 벽지에 풀칠을 했다. 아버지는 우마에 올라타 거실 천장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여주인이 어슬렁거리며 거실로 들어왔다.
“사장님은 그래도 성공하신 거네요?”
우마에 올라타 천장 벽지를 바르는 아버지에게 불쑥 던졌다.
“아이고, 뭘요.”
“한일 지물포는 사위까지 잃었잖아요?”
“오과장 말이죠? 딸도 업둥이예요.”
“네? 정말이에요?”
여주인은 사뭇 놀라는 표정으로 아버지의 빠른 손놀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시간들이 여주인의 등을 떠미는 걸까. 여주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몇 해 전 오과장과 둘이서 여러 곳에서 도배일을 함께했다. 나보다 십 년 혹은 그 이상 나이 차이가 있어 꽤 건강하게 보였으나 그로부터 일 년 남짓 지난 어느 날 고향에서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다가 심장마비로 느닷없이 돌연사했다는 얘기. 업둥이 출신이라는 아내는 보지 못했지만 이제 막 골목길 뛰어다니는 딸은 본 것 같았다.
“막걸리 사다 드릴까, 사장님?”
“좋지요.”
“그나저나 애 못 낳는 여자를 지금껏 데리고 살았네요?”
“누가 압니까? 남자가 못 낳는 걸지도.”
“하긴, 어릴 때 인삼을 많이 먹으면 정자가 안 생긴다고 그럽디다. 난자도 그렇겠지요? 우리 둘째 며느리도 아이가 안 생겨서 인공수정인가 뭔가 해서 딸을 낳았는데 발가락도 안 닮았답디다.”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가 떠올랐다. 여주인도 소설의 주인공 M처럼 눈물겨운 안간힘을 쓸까. 궁금했다.
“꼴도 보기 싫더라고요. 발가락도 안 닮았으니.”
여주인은 혼잣말처럼 내뱉고 밖으로 나갔다.
삼일장이 끝난 이른 아침 외숙씨가 탄 버스는 상주 승천원을 향해 달렸다. 창밖 풍경은 어제와 다름없고 사람들 또한 어제처럼 오늘을 살 뿐이었다. 불현듯 지금, 외숙씨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주가 가까워질수록 나이는 점차 줄어들어 탯줄이 묻힌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살면서 감당해야 했던 고단함과 슬픔과 분노와 억울함이 사라지면서 갓난이가 되는 건 아닐까. 엉뚱한 생각에 한참 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길고 지루한 달림 끝에 승천원에 도착했고 외숙씨는 짧은 기다림 끝에 화로(火爐) 안으로 들어갔다.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마지막 절차였다. 승천원 마당을 자궁 속에서 유영하듯 이리저리 걸었다. 어쩌면 화로에서 나온 외숙씨와 함께 걷고 있을지도 몰랐다. 손 꽉 잡고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탓에 걸음은 엇박자를 내면서 까마득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듯 승천원 넓은 마당을 이곳저곳 살피면서 외숙씨의 마지막 산책을 동행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바닥 가득 쌓아둔 천장 벽지에 풀칠하는 일은 단순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라 허리부터 슬그머니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특히 풀솔 잡은 오른손 손가락 마디에서 얇고 긴 통증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지렁이는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무렵 첫 데이트에 맞닿아 있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방학동 어디쯤 3층 단독주택이 도배 공사장이었다. 난생처음 풀 개고 벽지에 풀칠하는 노동을 겨울바람이 자꾸만 집적대며 방해했다.
사람의 마을에서 뿌리내리기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눈치채기 어려운 중학생인 나는 참을 수 없이 지루하고 단순한 노동에 쌓이는 짜증을 함부로 풀어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벌방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고마울 뿐이었다. 구청 사람들이 몰려와 지붕 슬레이트며 벽을 해머로 부수어도 혼자 집을 짓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위로가 되었다. 거실 천장 벽지를 거의 마무리할 즈음 불현듯, 어쩌면 첫 데이트였던 단독주택 집주인이 지금 이 집주인일지도 모른다는 어설픈 추측. 젊은 날에 집 장사를 했다 하니.
“막걸리 사다 놨어요, 사장님. 드시면서 하세요.”
여주인은 검은 봉지를 내려놓았다. 막걸리는 노동주(勞動酒)다. 아득한 옛날이나 지금이나.
“요즘 젊은것들은 그이 고마운 줄 모르고 있어요. 그렇지요?”
“그이라뇨?”
“있잖아요? 그이!”
거실 천장을 끝내고 주방과 방들의 천장을 모두 마칠 때쯤 여주인은 조금은 불편한 몸짓으로 여기저기 들락거리더니 나를 힐끗 쳐다보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이가 막판에 유신(維新)이 어쩌구 하면서 죄 없는 사람 많이 죽이기도 했지만, 이만큼 살게 만들어 주었는데 고마운 줄 알아야지, 염치가 없어요.”
“암요.”
천장 작업이 끝나고 벽들이 남았다. 우마에 올라탄 아버지가 벽 윗부분에 벽지를 바르면 아랫부분은 내 몫이었다. 천장보다 속도가 빠른 이유였다. 언제부터 약속이나 한 듯이 그런 식으로 작업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문젯거리로 골머리를 앓는 한일 국교 정상화는 집권 과정에서 생긴 취약성을 감추기 위해 경제개발이 필요했고 종잣돈을 마련하기 위해 식민지 36년의 피를 헐값에 팔았다는 걸 여주인은 알고 있을까? 애당초 만주군관학교 졸업하고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으니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으니라. 아무튼 마셜 플랜(유럽부흥계획, European Recovery Program)까지는 아니더라도 미국 입장에서 공산당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한국 물건을 사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까?
구로공단에서 청계천에서 전국 곳곳에서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가쁜 숨 가느다랗게 내쉬며 일하던 핏기 없는 수많은 사람의 노동 뒤에 숨어서 궁정동 안가에 숨어서 젊은 여자 끼고 앉아 시바스 리갈을 마시고 수출주도형 경제 구조를 만들기 위해 일삼은 수많은 특혜가 결국 재벌이라는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형적 괴물을 만들었다는 걸 여주인은 알고 있을까?
다시 상주 승천원에 갔다. 승천원 마당에는 변함없이 천상병의 '귀천'이 바위에 붙어 꿈쩍하지 않았다. 거실에서 느닷없이 뇌출혈로 쓰러졌던 장인은 병원으로, 병원에서 요양원으로 옮겨다니가 결국 징검다리 건너듯 저승으로 갔다. 언젠가 나는 장인과 아버지와 수락산 그녀의 친정아버지의 첫 만남을 마련한 자리에 함께한 적이 있었다. 수락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한방 닭백숙집이었는데 평생을 살다가 비로소 처음 만나는 동년배들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을 빼면 공감대가 없었다.
서로 다른 성격만큼 살림살이 형편도 다르고 삶의 궤적 역시 달라 서먹서먹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세 분끼리 연락해 간혹 만나 살아온 세월과 그 무게를 가벼운 침묵으로 눈빛으로 나누곤 했다는 얘기를 몇 번 들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한 번뿐인 생애인데 모진 마사오(正雄)를 만났어도 이럭저럭 평안하게 살아왔다는 얘기를 혹은 여기저기 상처 입으며 견뎌왔다는 얘기를? 지금은 세 분 중 유일하게 장인만 상주 모동 고향 마을 가족 묘지에 묻혔다.
“살다 보면 실수도 하는 거지 그걸 꼬투리 삼아 욕질이나 하고, 요즘 젊은것들은 싸가지가 없다니까, 그렇지요, 사장님?”
“그럼요.”
“그이 덕분에 잘살게 되었다는 걸 알아야 하는데 말이죠.”
생관(生觀)이 경험에 갇히는 사람을 워낙 많이 봐온 터라 여주인이 쓸쓸하다는 생각에 잠겼다. 살아온 삶의 기준이 자식들에게조차 비웃음거리는 아닐지라도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일까. 여주인에게서 단단한 고집이 느껴졌다. 우스갯소리처럼 나이 들면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어야 한다는 지혜가 떠올랐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어울려 살기 위해서.
이윽고 도배 작업을 끝내고 풀솔을 비롯한 여러 연장들을 물에 깨끗이 씻고 작업복을 벗고 천장이며 벽들을 둘러보며 미흡한 부분이 있는지 점검했다. 하루 반나절을 일했던 셈이다. 골목으로 나오자 조금씩 얇은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집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여주인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짐작에 이어 몸 여기저기서 비로소 통증들이 아우성쳤다. 내일 아침은 온전히 일어날 수 없을 테지만 아버지와 마지막 데이트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손가락 통증은 일주일 지난 오늘 대부분 사라졌지만, 통증의 기억이 마음 안쪽을 아프게 파고들고 있다. 언제나 상처 입는 쪽은 그이가 아니라 우리라는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