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화석 2

by 이순직

“야! 나와라.”


저녁 일곱 시가 훌쩍 넘어 발코니 밖은 어둠 차곡차곡 쌓이는데 받아낼 빚이라도 있는 듯 장욱진은 수화기 너머에서 당당했다.


“여기 길음역 한국 통닭인데 김용덕이랑 이충환 있다! 나와랏!”


신년회 한다고 카톡에 공지 올려도 그룹 채팅에 초대해도 염탐꾼처럼 동태를 파악하는 선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니 딴에는 독이 바짝 올랐을 법도 했다. 하지만 저녁밥까지 챙겨 먹은 뒤여서 포만감을 즐기던 중이라 핑계 만들 궁리부터 했다. 집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보다 게으름이 먼저였다.


“신년회 부부 동반 모임 때도 얼굴 비추지 않고 말이야!”


“진작 전화하던가. 너무 늦어서….”


뒤늦은 연락이라 말하면서도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려 대충 얼버무렸다. 해 떨어진 뒤에 돌아다니는 짓을 탐탁잖게 여기는 데다가 학부생 시절 몰려다니며 술 퍼마시는 유구한 전통 탓도 있지만 오십 줄 넘어서면 사는 모습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만난 지 오래되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짐작에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순직아. 나 김용덕인데 나와라.”


어느새 전화를 바꾸었는지 용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욱진이 말에 물음표를 붙이는 습관은 녀석을 처음 만나던 대학 입학 면접시험 때부터 신문사 교열 기자로 취직해 학교를 떠날 때까지는 물론이고 이후 간혹 만나더라도 이미 몸에 붙은 터라 피할 궁리부터 하는데 용덕이까지 나서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미아삼거리역 3번 출구에서 기다린다. 창동역에서 네 정거장이니까 20분이면 될 거야.”


김용덕은 쐐기를 박고 전화를 끊었다. 게으름이 확 달아났다. ‘압록역을 지나며’에서 풀어놓았듯이 구례에서 시골 버스 타고 압록역 지나 광주 거쳐 목포로 갔던, 입대 앞둔 불안함과 까닭 모를 불만이 가득한 젊음뿐인 그 여정의 끝에 용덕의 집이 있었다. 목포에서 서울로 돌아온 충환과 나뿐만 아니라 욱진과 용덕이도 해가 바뀌자 며칠 또는 몇 주를 사이에 두고 제각각 입대했다.


군 생활하는 동안 문창 동기인 혜영이가 후배들을 이끌고 순례하듯 면회를 다닌다는 풍문이 있었지만 내게는 오지 않았다. 측지부대에 배속된 나는 민통선 안쪽에 부대가 있어 면회가 까다로웠다. 어쨌거나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동네가 엉망진창이던 1987년 봄, 우리는 모두 복학했다. 그리고 ‘시간화석1’에 다소 거칠고 짧게 써 놓았듯이 뜨거운 한 학기를 보냈다.


“여전히 잘 다니냐?”


“백수야.”


미아삼거리역 3번 출구 에스컬레이터 끝에 마중 나와 있던 용덕은 대뜸 묻곤 고개를 끄덕였다.


“난 2년하고 한 달째야.”


폐업하는 바람에 권고사직 당했으나 녀석의 희망퇴직은 을지로 뒷골목 술집에서 만난 지난해 여름부터 넘겨짚었다.


거리는 월요일치곤 한산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젊은 아버지가 풍산 이발소 처분하고 서울살이를 시작한 하월곡동 달동네 옆이 미아삼거리인데 초등학교 입학 전 또래들과 떼지어 뻔질나게 가서 놀았던 지금은 없어진 대지극장이 있던 곳이라 요즘 말로 인기 장소(hot place)임에도 사람들은 드문드문 부표(浮標)처럼 떠 있었다. 마스크 대란(大亂).


외신이 3차 세계대전이라 엄살떨 정도로 지구촌은 온통 야단법석이고 우리 동네 역시 일상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87년 봄에는 숱한 젊음이 보이는 적과 싸웠다면 지금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적을 맞닥뜨려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상관없이 싸워야 할 판국이니 너나없이 난감한 처지로 내몰렸다. 그때는 민주(民主)를 얻고자 했으나 지금은 일상(日常)을 얻고자 하는 점에서 더욱더 절실하고 치열할 수밖에 없는 싸움인 데다가,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다 보니 예측조차 하지 못한 엉뚱한 곳에 수시로 전선(戰線)이 생겨나 한층 힘겨울 수밖에.


“오랜만이다.”


가게 안에는 충환과 욱진만 앉아 있었다. 손님보다 알바생이 더 많았다. 비단 이곳뿐만 아니라 다른 가게도 별반 다르지 않아 장기전으로 간다면 재난 영화에서 볼 법한 장면들을 숱하게 떠올려도 심하지 않을 듯. 한꺼번에 무너지는 건물들. 사정없이 쩍쩍 갈라지는 땅. 막무가내로 들이닥치는 쓰나미 따위의 장면들은 없고 공동체를 움직이는 메커니즘(mechanism)이 멈춰 서서 사람들이 사라진 황량한 거리와 사회적 관계가 끊어지는 끔찍한 상황을 맞닥뜨리는 장면들. 물론 영화적 상상력은 언제나 과장스럽지만.


“삐삐가 용덕이를 좋아했지.”


“무슨 소리! 순직이랑 나는 가난한 편이었고 충환이하고 욱진이가 화려했잖아?”


이제는 아득히 멀어져 얼굴마저 희미해진 여학우의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보면서 우리는 천천히 과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마다 표정은 아련해지면서 하지 말아야 할 실수나 결정을 되새김질하거나 혹은 눈부신 젊은 날의 어떤 하루를 꿈꾸듯 되살아보는 듯했다. 기억과 추억이 뒤섞이면서 그런 하루들은 실제보다 더 부풀려지거나 쪼그라들었다.


돌이켜보면 문학은 고사하고 삶 자체에 대한 이해마저 부족한,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우리가 동아리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습작 토론이나 독서 토론을 하면서 입에 올리던 김수영을 제대로 읽었는지 의심이 든다. 저마다 자신의 삶 속으로 끌고 가 제멋대로 김수영을 읽고 판단하거나 선배들의 어설픈 김수영론(金洙暎論)을 곁눈질하지 않았을까.


나 역시 고등학생 무렵 읽은 ‘달나라 장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한 시인의 평생 멈추지 않은 우물 파기의 수고로움은 외면한 채 그저 우물의 곁만 보면서 우물의 깊이와 너비를 가늠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글자를 글자로만 읽는 것도 벅차서 허우적거리며 씨알도 먹히지 않는 말들을 내뱉었던 건 아닐까. 홍일점 혜영이의 냉소적인 물음들이 사정없이 단검으로 우리에게 꽂힌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요즘도 쓰냐? 쓰지 마라. 그딴 거.”


예전에 통화하면서 정작 자신은 카카오 스토리에 잔잔한 일상을 늘어놓으면서 욱진은 쓸데없는 짓이라며 강조했으나 권고사직을 당하지 않았으면 지금 쓰는 글도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김종삼 시인을 좋아하던 충환은 시 전문지를 통해 등단했지만 시가 밥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터라 생계를 위해 닭을 치던 김수영처럼 밥벌이가 필요했다. 욱진이는 여전히 교열 기자로 출퇴근하고 충환이는 수목 관리 쪽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졸업 후 광고꾼으로 변신한 용덕은 용돈벌이가 있는 백수인데다가 수영이 취직했으니 나와 비교할 수 없었다.


“약 먹는 거. 없냐?”


용덕은 소주잔을 들면서 내게 물었다.


“없어. 난.”


“건강 챙겨라. 욱진이는 혈압약에 충환이는 협심증약 먹는단다.”


“혈압약은 평생 먹어야 한다는데?”


나는 욱진을 보면서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82년 그해 봄이 손 닿을 수 없는 곳으로 훌쩍 넘어가 버렸다는 짐작과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잘못된 결정을 만회할 그 무엇도 더는 남아 있지 않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에 눈 깔고 잔을 가만히 흔들었다. 출렁이는 소주처럼 마음 안쪽에서 무언가 꿈틀댄다. 오랫동안 쓰지 않던 소설 하나 써볼거나 어쩔거나….


“운동해야지. 이젠. 몸 생각해서.”


용덕은 광고국 국장 시절 골프 치던 얘기를 주섬주섬 늘어놓기 시작했다.


“운동은 등산이 최고야.”


욱진은 카카오 스토리에 늘어놓았듯이 등산이야말로 운동과 여가를 즐기는 데 안성맞춤이라며 고집을 피웠다. 아닌 게 아니라 풍선처럼 마구 부풀어 오르던 녀석의 배가 제법 꺼진 건 사실이었다, 얼굴 살이 빠지지 않아 두 눈이 거의 매몰 직전이긴 하지만.


“자전거 여행이 좋아. 등산처럼 하산해서 막걸리 마실 일도 없고 골프처럼 내기도 아니고. 혼자 하기에 딱 좋은 게 자전거 여행이야.”


“자전거? 창동교에서 어디까지 가냐?”


“소요산까지. 양주 지나서 동두천 신천부터 확실히 공기가 좋아.”


“근데 둘째는?”


“신입생이지.”


“벌써 그렇게 됐어? 순직이네 둘째 나이 때 우리가 만난 거네?”


용덕은 신입생이던 그해 봄을 애써 떠올려 아련한 기억을 더듬는 모양인지 입가에 엷은 웃음을 지었다. 욱진과 충환이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의 동시에 욱진과 충환의 스마트폰이 울렸고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순직이가 와서 말인데….”


말끝을 흐렸다. 눈치를 보니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다그침에 변명을 늘어놓는 모양이었다. 열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잔이라며 신입생처럼 부딪쳤다. 그러나 손끝에 여전히 남아 있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난 먼저 들어갈 테니까 너희들은 한 잔 더 하고 헤어져.”


충환은 가게를 나오자 아쉬운 표정을 읽었는지 대뜸 말하고 혹시나 붙잡힐까 싶어 부리나케 미아삼거리역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넷이 있다가 하나가 빠지니 허전했다. 하지만 욱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구한 전통이 어디 가겠느냐는 듯이 맥줏집을 물색했고 용덕은 잔치국수에 소주 한 병만 하자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졸지에 미아삼거리에서 미아(迷兒)가 되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하긴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길을 잃어버렸던가. 의지와 상관없이 형편에 따라 결정하고 순응한 것이 한두 번인가. 욱진이나 용덕이도 마찬가지일 터.


“다음에 마시자. 백수니까 언제든 연락해라.”


욱진과 용덕이를 억지고 끌다시피 해서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서로 반대편에서 타야 하기에 남은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헤어졌다. 용덕은 못내 아쉬워하는 욱진을 붙잡고 남가좌동까지 가려면 지금 가야 한다며 어르고 달랬다.


창동역으로 가면서 하루의 끄트머리에서 만난 친구들이 반갑기도 하지만 마음에 구멍 뚫려 찬바람이 마구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몸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장작처럼 절정의 불꽃을 만들어내다가 이윽고 조금씩 사그라드는, 열기도 차츰 없어지고 밝기도 희미해지는 몸뚱이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 겨우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지만 살아갈 시간들이 많지 않아 도전할 기회들을 잃어버렸다는 깨달음 때문일까. 나는 과연 삶을 제대로 살았다. 말할 수 있을까.


창동역에서 내려 이마트 지나 아파트 단지 안으로 그 옛날 풍기 장날의 할아버지처럼 저벅저벅 걷는 발걸음에 맞춰 휘젓는 손에 막걸리 두 병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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