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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Sep 07. 2023

선미의 신혼여행

캘리포니아 그녀 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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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가 쇼를 시작했어. 창문을 이젠 신경 쓰지 않아. 허겁지겁 커튼 치는 내 꼴이 우습기도 하지만 누군가 호기심에 불타 엿보고 있다 해도 이곳에선 흔한 풍경이니까 그러려니 해. 응옥찐처럼 나도 캘리포니아 사람이 되어가는 걸까? 어쩌면 아마도 철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어, 약간 비웃는 듯한 표정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멜라니가 말했어. 방울방울 물기 남아 있는 멜라니의 어깨와 등에 금빛 머리카락이 출렁거렸어. 하지만 정말 멋진 비유야. 동물원이라니! 멜라니는 거울 속의 자신과 눈 맞추었어. 브라질리언 왁싱을 한 멜라니의 옹달샘은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싱싱했어. 분명 나와 같은 사람인데 동물이라니 놀랍지 않아? 그리고 누구도 자신이 동물이라고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니 조지 오웰도 입 딱 벌어질 거야. 어떻게 입 다물 수 있겠어? 그저 막연하게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것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무릎 치면서 놀라워할 거야.


풍자나 비유라고 여겼던 것들이 현실이 되어 있으니까. 멜라니의 말들이 화살처럼 마음에 정확하게 꽂혀. 잔인하게 박혀 아팠어. 너희 동네도 만만치 않아! 말하지 못했어. 나는 단지 이 사람들 참 다르게 살고 있구나. 참새처럼 이쁘게 지저귀는 아이들도 참 다르게 살고 있구나…, 신기하고 이상하고 놀라웠어. 별 볼 것 없는 창광거리를 왜 그렇게 자랑하는지 의아했지만.


전신 거울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없는 멜라니의 포즈는 늘 새로웠어. 드넓은 끝없는 바다 같고 도저히 범접조차 할 수 없는 험악한 산악 같기도 하고. 나조차 이런데 알프레드는 어땠을까? 응옥찐의 남자 친구는 아무 잘못도 없어. 태어나 보니 남자이고 베트남이고. 선택할 수 있는 게 뭐겠어? 어쩌면 네가 평양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어.


참다못한 내가 멜라니에게 한마디 했어. 맞아.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그건 현실이 아니야. 가정이야. 있을 수 없는 일들을 마치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건 비겁한 거야. 남자로 태어났다면 지금 이 거울 속 여자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는 허무맹랑한 다짐 같은 거야. 어쩌면 너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사우스 코리아와 노스 코리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걸.


멜라니의 엉덩이는 매혹적이야.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그냥 하는 말투가 귀에 거슬렸어. 하지만 난 구분해, 정확히. 널 룸메이트로 받아들인 것도 사실은 서울보다 평양이 먼저 떠올라서야. 지금도 모르겠어, 널 보자마자 고려호텔 로비에 마네킹처럼 서 있던 젊은 여자가 왜 떠오르는지. 부드러운 눈빛과 다른 딱딱한 말투, 맞아. 마네킹 같다고 여겼지 동물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오해하지 마. 널 사람으로 생각하니까.


멜라니의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유방이 흔들려. 너희들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약탈했는지 알아? 그걸 자랑질하잖아? 루브르 박물관에 모아놓고. 말하지 못했어. 캘리포니아는 자본가들의 낙원이야. 멜라니와 논쟁하고 싶지 않았어. 대꾸 없는 중얼거림도 싫증 나는지 멜라니는 거울 앞에서 크게 기지개를 켰어. 나는 나를 즐겨, 사랑하니까. 멜라니는 거울 속의 여자에게 윙크했어. 고려호텔 여자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뜬금없이 얼굴도 보지 못한 그녀가 궁금했어.


김철수는 보나 마나 중앙당 간부 딸이 분명하다고 말할 거야. 응옥찐이 걱정돼, 겉으로 아직은 씩씩하지만. 하지만 정작 걱정하고 안타까운 건 내가 아닐까? 팬티만 입고 멜라니는 침실로 들어갔어. 몸뚱이 작고 말수 적은 동양 여자. 가진 것 하나 없이 아무렇게나 캘리포니아 낯선 거리에 내팽개쳐진 동양 여자. 여전히 아침이 두려운 동양 여자. 살아온 날들 한 뭉텅이가 싹둑 잘린 눈 찢어진 동양 여자…, 인철수 소식은 그런 나를 보여줘.


하지만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로 했어. 응옥찐처럼 씩씩하기로 했어. 지난밤 꿈에선 뒤포에서 너희들과 어울리는 나를 봤어. 어쩌면 토굴 같던 방 안에서 꾀꾀한 인철수의 얼굴을 보았을지도. 문화원 팀장이 내일 늘봄식당에 오겠다며 전화가 왔어. 무슨 프로젝트인지 몰라도 이것저것 따질 형편이 아니잖아. 살아 있을 때까지 열심히 씩씩하게 살다 보면 마음도 단단해지지 않을까? 고원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서는 룽다와 타르초처럼. 너희의 하루들도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룽다처럼 보이기를. 이만, 총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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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고 있었다. 편지를 다 읽은 장욱진은 김용덕에게 건네주면서 씁쓸한 표정, 잠시 허공을 초점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김선미는 아직 오지 않았다.


"넌 지겹지도 않냐? 뭐 그리 대단한 게 있다고 학교에 똬리를 틀고 있냐?"


김용덕은 편지를 탁자에 내려놓고 대뜸 쏘아붙였다.


"그녀가 캘리포니아로 떠난 것처럼 다들 자기 몫을 사는 거지. 그뿐이야."


"하긴…, 엄청 외롭다는 거잖아? 오죽하면 뒤포 꿈을 꾸냐?"


장욱진은 어깨에 잔뜩 빗방울 적시고 들어왔다. 의자에 앉자 머리칼에서 빗방울 하나가 탁자 위로 뚝, 떨어졌다. 비는 우리 마음에도 내리고 있었다.


"외롭다기보다는 잘살고 있다는 거잖아. 살아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잖아."


"그렇게 보면 또 그렇고."


"샘도 그렇지만 조셉 얘기를 왜 하지 않는지 그게 수상하단 말이야."


장욱진은 능글맞은 표정을 애써 지으면서 말 못 할 무언가 대단한 사건이 있을 거라는 투로 말했다. 동네 건달이면서 마약도 한다는 조셉이 캘리포니아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라는 짐작은 저마다 하고 있지만 섣불리 꺼낼 수 없는 호기심이었다.


"정작 문제는 식당 식구들이야. 정체성에 혼란을 불러오잖아. 고려호텔의 여자? 멜라니가 그녀를 보고서 평양 여자를 떠올렸다면 나름 충격 먹지 않겠어?"


"우리가 서양 애들 얼굴 구분하기 어렵듯 서양 애들도 우리 얼굴 구분하기 어려운 것뿐이야. 다른 뜻은 없어. 더구나 오래전에 봤을 테니 그때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을 뿐이겠지."


노란 장화에 노란 우산을 쓰고 횡당보도 앞에서 신호 기다리고 있는 김선미가 보였다. 그녀 뒤로 신문사 건물이 버티고 있었다.


"다들 왔네."


"우리한테 몸값 올리려고 매번 지각이냐?"


김용덕이 괜스레 핀잔하자 김선미는 두 눈 흘겼다.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않냐? 시꺼먼 놈들만 모여봐라, 할 게 뭐가 있냐? 근데 오늘은 노란색이야. 너무 확 띄는 거 아니야?"


"비도 오고 기분도 좀 꿀꿀해서. 편지 왔다면서?"


김용덕은 편지를 내밀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김선미가 다 읽을 때까지 입술 굳게 다물고 허공을 바라보거나 건너편 탁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훔쳐보거나 저마다 딴짓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비는 빗방울 하나마다 사람들 냄새를 하나씩 물고 아래로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갔다.


"적어도 언니는 남이냐 북이냐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엔 있지 않네."


김선미는 스스로 고개까지 끄덕였다.


"하지만 또 모르지. 우리는 일종의 압박감을 가지고 있잖아? 오죽하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며 노래까지 만들어 부르겠어? 요즘 애들은 시시하다고 느껴. 어쩌면 우리 세대가 마지막일 거야, 압박감 느끼고 사는. 선택 장애잖아?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할 수 없어."


"난 선미 말이 정확하다고 봐. 식당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고 느껴. 오죽하면 멜라니한테 얹혀살겠어?"


"그런데 돌아오긴 할까? 아예 캘리포니아에 눌러앉아 버릴 수도 있잖아?"


"그거야 알 수 없지. 향수병도 다스리면 다스릴 수 있을 테니까. 이참에 우리 계나 하나 할까? 까짓거 캘리포니아에 한 번 가보지 뭐. 어때?"


"예전에 금문교에 갔을 때 식당 사람들 만나보지 않았어?"


모두 김선미를 바라보았다. 지우개로 아무리 지워도 여전히 남아 있는 연필 자국처럼 김선미의 신혼여행을 애당초 없던 것으로 기억할 수 없었다. 김선미는 미간을 찡그렸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받쳐 든 우산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조금씩 비에 젖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햇살은 따가웠다. 그녀는 김선미와 신랑을 데리고 코리아타운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이상하고 신기한 듯 김선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서로 다른 피부 색깔과 서로 다른 말들을 하면서 거리 걷는 사람들 풍경이 대단히 낯설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인종의 용광로라고 하더니 진짜구나! 신랑은 혀를 내둘렀다.


64


후라이 까지 말라우! 그녀 일행이 늘봄식당에 들어섰을 때 아저씨가 여주인에게 소리쳤다. 점심시간 지난 한가한 오후였다. 며칠 전부터 아저씨는 그녀에게 방 하나 내줄 수 있다며 적극적인 반면 여주인은 못마땅한 이유를 이것저것 갖다 붙이는 중이었다.


김선미와 신랑은 낯선 억양에 멈칫거리며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맛있게들 드시라우. 신혼여행을 여기까지 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여주인은 살갑게 대했다. 나 때는 김일성 동상에 참배하는 게 전부였는데…, 신랑은 뻣뻣하게 몸이 굳어졌다. 경계심이 눈빛 가득 넘실거렸다.


옥류관에서 30년 요리 경력 있는 분한테서 직접 배운 평양냉면인데 맛있게들 드시라우. 여주인은 신랑의 경계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에 와서 평양냉면이라니 믿어지지 않아. 김선미는 감탄까지 했다.


그런데 언니, 아직도 허쯔는 오리무중이야? 김선미는 갑자기 생각난 듯 묻고 사뭇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허쯔 부모가 짐을 모두 챙겼어.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그러니 허쯔의 묘연한 행방도 그중에 하나일 뿐이지. 보름 정도 여유 있지만 아파트를 빼줘야 할 것 같아.


어디로 가려고? 아저씨네로 갈까 생각 중인데 여주인이 은근히 눈치 주잖아? 아직 모르겠어. 평범한 오후였고 김선미와 신랑에게 흥미로운 음식이었다. 김철수가 나타나기 전까지 둘은 색다른 신혼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초면인데도 스스럼없이 다가온 김철수는 급기야 위스키를 가져왔다.


함흥의 거리 풍경과 험난하고 고단했던 혜산까지의 꽃제비 여정 따위들을 신랑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법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싸우면 이길까요? 북쪽이. 신랑의 느닷없는 물음에 김철수는 잠시 망설였다. 무슨 쓸데없는 얘기야? 그만둬요. 김선미가 끼어들었다. 싸우더라도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점령할 수 없을 겁니다. 제자리에서 치고받는 지루한 소모전이 전부일 테니까요.


김철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랑은 발끈했다. 모르시는 말씀, 일주일이면 끝납니다. 물론 어느 정도 피해는 피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빠르게 북진할 겁니다. 김철수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산과 들판이 여지없이 파괴되고 엉망진창이 되는 참담한 짐작이 앞서서 감정이 격해졌다. 그렇게 간단하진 않을 겁니다. 모든 싸움은 실제로 하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아무리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해도 끝내 파악하지 못하는 것들 또한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오랜 세월 싸움만 준비했어요, 오로지. 정작 문제는 싸움이 끝나고 난 뒤가 아닐까요? 점령군 노릇을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싸움으로 인한 상처는 또 어떻게 합니까? 엄청난 후폭풍에 휘말릴 겁니다. 김철수의 말에 신랑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북진은 당연한 사실이라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어린애 말싸움하는 것도 아니고 그만들 하시죠? 그녀가 두 사람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제야 김철수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남자들은 정말 이상해. 쓸데없는 일에 자존심 걸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김선미가 쐐기를 박았다. 떨어져 지낸 세월도 억울한데 싸움까지 해서야 쓰나…, 아저씨가 지나가며 슬쩍 말참견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난 자유 조선입니다. 김철수가 그녀를 향해 뒤늦게 웃으며 말했다.


일정이 어떻게 돼? 그녀가 김선미에게 물었다. 내일 앵커리지에 갔다가 사흘 뒤에 들어가. 설마 들어가고 싶은 건 아니지? 아련해지는 그녀의 표정을 읽고서 김선미는 약간 슬퍼졌다. 서울에서 늘 봐왔던 씩씩하고 당당한 모습을 금방 찾아낼 수 없었다.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묘한 낯섦과 어색함이 되살아나 그녀도 캘리포니아를 닮아간다고 여겼다. 어쩌면 하루하루 살아내는 일들이 힘겹고 퍽퍽해서인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들어 괜한 안타까움마저 들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쌓이는 고향에 대한 애틋함이야 떠나온 자들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김선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들어가거든 잘 있다고 안부나 전해. 괜히 생뚱맞게 허튼 얘기 하지 말고. 언니는 참…, 없는 얘기 지어낼 것도 아닌데 괜히 신경 써. 늘봄식당을 나와 그녀는 김선미와 깊은 포옹을 했다.


여주인과 아저씨와 김철수와도 어색한 이별을 하고서 김선미와 신랑은 택시를 탔다. 그녀는 택시가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제 자리에 서서 마음 하나가 툭, 떨어져 나간 느낌에 휩싸여 어금니 질끈 깨물었다. 맹렬했던 햇살은 풀 죽어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한층 길어진 그림자가 그녀 발밑에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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