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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Sep 08. 2023

여진족의 후예

캘리포니아 그녀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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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들판에 작고 낡은 집 하나, 모래 먼지 수시로 불어닥치는 마당에 혼자 서 있는…, 앵글은 여자의 펄럭이는 머리카락에서 점차 조금씩 멀어지면서 작은 집과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담고…, 이윽고 여자도 집도 들판에 묻혀버리는 이미지?"


장욱진은 김선미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씁쓸한 표정까지 지어가며 중얼거렸다.


"너무 잔인하다. 그것보다는 들판의 외길을 픽업트럭 타고 달리는 여자가 더 어울려. 그녀가 캘리포니아로 건너간 것도 설명이 돼. 멜라니를 만나기 전이었으니 히치하이킹하는 금발 여자가 곧 등장하겠지?"


"오히려 그 반대겠지. 히치하이킹하는 그녀가 있겠지."


"어쨌거나 우리는 햄릿 증후군을 갖고 있지 않잖아? 그래서 오히려 더 혼란스러운 게 아닌가?"


저마다 한 마디씩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이내 침묵에 휩싸였다. 비는 그칠 듯하다가 다시 이어졌다.


"인지하지 않아서 그렇지 집단적으로 선택 장애를 갖고 있어. 신랑 놈이랑 이혼까지 가는 길 위에서 엄청 시달렸던 경험에 비추어보면."


김선미는 단호하게 말했다.


"작고 사소한 논쟁일 수 있지만 김철수가 결국 고향 손을 들어줬다는 것은 체제 경쟁과 상관없이 동물적인 본능이 선택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고 한번 빨갱이는 영원한 빨갱이라니까!"


"형은 제발 그놈에 해병 타령은 그만했으면 좋겠어!"


김선미가 눈을 흘겼다. 핀잔에 머쓱해진 김용덕은 비 그칠 기미가 없네…, 낮게 혼잣말을 했다. 작은 우산을 함께 받쳐 든 연인이 카페로 들어왔다. 어깨와 등은 이미 축축했다. 비록 캘리포니아에서 살아가는 그녀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겨우 반나절 가량 함께 있었던 터라 얼굴 마주친 순간에 느꼈던 어색함과 가벼운 이질감을 깔끔하게 털어내고 온전히 그녀를 만났다고 장담하기 어려워 김선미는 말을 아꼈다. 혹시라도 몇몇 단어나 어귀로 그녀를 얼마든지 제멋대로 해석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여자는 촉이란 게 있잖아? 어땠어, 진짜?"


김용덕은 김선미의 찜찜한 표정을 눈치채고 다그쳤다.


"대충해라, 벌써 일 년이 지나가는데 아직도 기억하겠냐?"


장욱진은 괜한 꼬투리를 잡는다는 식으로 투덜거렸다. 너희 둘, 수상해, 보자 보자 하니까! 김용덕은 기다렸다는 듯이 치고 나왔다. 느닷없는 의혹 제기에 장욱진과 김선미는 당황한 눈빛이 흔들렸다. 연애하냐? 그렇다면 보고는 하고 해야지. 김용덕은 아예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렸다.


"콩트 짜냐? 연애는 말이야 자고로 저렇게 하는 거야."


장욱진은 탁자 두 개 건너에 앉은 연인을 눈으로 가리켰다.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는 눈빛으로 남자는 여자의 앞 머리카락을 올려주고 있었다. 김용덕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도로 건너편 신문사 건물은 거대한 성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고문관은 항상 있잖아? 어디든."


나는 느닷없이 떠오른 허스키가 어쩌면 저 신문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허스키라고 고문관이 있었거든. 군대야 계급이 헤게모니니까 졸병 때는 갈굼을 엄청 당했는데 나중에 헤게모니 잡자마자 반란을 일으켰지. 노가다에 대한."


"노가다는 또 뭐냐?"


"고참이었지, 갈구다가 갈굼을 당한."


"어느 직장이든 마찬가지야. 나도 부장이 얼마나 갈구는지 학을 뗄 정도야. 부장은 입으로 일한다니까."


김용덕은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는 슬그머니 슬금슬금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선미가 버럭 화를 냈다. 군대 얘기할 거면 난 갈래!


"군대 얘기가 아니야. 조직 사회를 얘기하는 거지.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거대한 공감대가 있잖아? 우리에겐. 해방 이후 구불구불이든 똑바로든 흘러오거나 흘러가면서 만들어진 사회적 공감대. 물론 저런 신문사에서 물꼬를 잘못 건드려 엉망이 되기도 하지만."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거야?"


장욱진은 갈피 종잡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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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앞에서 선택 훼방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얘기. 특히 저런 신문사가."


"뜬금없이 무슨 똥방귀 뀌는 소리냐?"


도로 건너편 거대한 신문사 건물을 향해 손가락질까지 하는 나를 쏘아보며 장욱진은 매우 불쾌하다는 말투였다. 자신이 일하는 신문사를 향해 엿이나 먹으라고 내뱉으니 이런저런 앞뒤 사정 더듬어볼 필요도 없이 울컥, 일말의 배신감마저 치밀어 올랐다.


"저마다 자유의지에 따라 산다고 믿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헤게모니에 쉽게 휘둘리지. 지금 너처럼."


"뭐라구?"


장욱진은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어이없다는 표정, 욱진이 밥줄 끊어놓으려고 그러냐? 작작 해라. 김용덕은 슬쩍 눈살 찌푸리면서도 군불 땠다. 요컨대 앞잡이 노릇 한다는 거지? 실실 웃었다.


"선악의 문제가 아니야.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이 누군가의 거대한 이익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거지. 아니면 정말 모르던가."


"원생이 되더니 아주 유치원생처럼 말하는구나!"


단단히 삐진 말투. 그러니까 욱진이의 작은 이익이 신문사의 거대한 이익에 봉사하고 있다는 얘기네? 김용덕은 고개 끄덕였다. 김선미는 갸우뚱거렸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대부분 사람이 그렇게 살아. 원생이면서 그것도 몰라? 난 또 뭐 대단한 발견인 줄 알았네."


김선미는 차갑게 힐난하고서 입술마저 삐쭉거렸다. 탁자 두 개 건너편에 앉은 사랑에 푹 빠진 여자가 꺄르르 웃자 남자는 흐뭇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남자는 여자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 맞는 얘기야. 문제는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거지. 선택 훼방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걸. 선택 앞에 놓이면 누구나 갈등하고 이것저것 따지고 두들기고 확인하고 예측하지. 망설이고 주춤거리다가 결국엔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잖아? 하지만 선택 훼방 증후군은 선택 앞에서 결코 엉거주춤하지 않아. 오로지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선택하지."


"무슨 뜬구름 잡는 얘기야? 알아듣게 말해라."


장욱진은 왈칵 짜증을 쏟아냈다. 뭐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김용덕도 수상하다는 눈빛.


"학교에 총학생회장이 왔었어, 얼마 전에."


"대장이? 요즘 뭐 하길래 갑자기 와?"


모두 호기심과 의아함이 출렁거리는 눈빛으로 입술 굳게 다물고 나를 쳐다보았다. 짧은 침묵 속으로 탁자 건너편 여자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자기야, 그 집 정말 맛집이더라. 해산물 싫어하는데 랍스터 파스타는 정말 맛있었어. 그래? 다음에 또 가지, 뭐.


"정치판에 뛰어든 모양이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은근슬쩍 연락이 통 안 된다고 하면서 인철수 안부를 묻더라."


"프락치!"


"아마도 학교에서 수소문하면 연락이 닿을 수 있다고 믿는 눈치였어. 인철수가 필요하대."


"왜? 대장이 현사반 출신이라 프락치라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다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 어리둥절했다. 실제로 총학생 멤버들은 노골적으로 인철수를 적대시하였고 학생회관 건물 전체에 인철수주의보가 걸핏하면 내려지기도 했다.


"당시에 몇몇 사람만 알고 있는 비선이었대. 그것도 아주 중요한."


"뭐야?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장욱진은 벌컥 화부터 냈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유월의 그 뜨거운 햇살과 최루 가스는 여전히 생생한데 딱히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심한 배신감이 마음을 쓰리게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철수는 애당초 없었던 거야."


"그렇다면 이중 프락치였다는 얘기야?"


"프락치로 위장한 밀정?"


"분단 앞에서 집단적인 선택 증후군을 앓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울 수 있어. 하지만 자신이 선택 훼방증후군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또 어려워진다!"


"살아 있을 때도 몰랐고 죽어 있을 때도 모른다는 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을까?"


오늘 저녁은 안돼. 가족 모임이 있단 말이야. 다음에 가면 안 될까, 자기야? 밤새도록 하는 것도 아니잖아? 겨우 한두 시간 대실 하는 거잖아? 가자. 탁자 건너편 연인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추적추적, 그치지 않는 빗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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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동대라고 하더라. 캘리포니아 그녀도 일원이고."


"뭐라고?"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대체 뭘 알고 있었던 거야? 이거 미치겠네! 김선미, 넌 알고 있었어?"


"처음 듣는 얘기야, 나도."


분명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얼굴 마주하며 지냈는데 정작 다른 얼굴도 가지고 있었다는 믿기지 않은 폭로 앞에서 다들 화를 내다가도 황당해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게다가 아득한 옛날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대충 얼버무리며 선입관은 바꾸지 않은 채 고개 끄덕일 수 있으나 손에 고스란히 잡히는 불과 몇 년 전이 아니던가. 질 나쁘고 손버릇 고약한 도둑놈인 줄 알았는데 장발장이었더라…, 손가락질하던 자신이 더없이 초라해지고 삶의 목표로 삼았던 것들이 한낱 신기루에 지나지 않다는 처참한 깨달음이 밀물처럼 밀려와 한강의 모래알보다 자신을 한없이 작게 만드는 거대한 숨은 현실….


"편지도 편지지만 이 얘길 하려고 불렀구나. 그런데 네가 걱정했듯이 좀 참담하다."


"죽은 놈을 흔들어 깨워 살릴 수도 없고."


어떻게 할 거야? 아잉, 싫어. 좋으면서 싫다고 말하기 없기로 했잖아, 솔직하기로 했잖아? 저녁 모임은 어떡해? 그전에 끝나지. 우리가 언제 몇 시간씩 한 적이 있기나 했나? 왜 없어? 지난번에 몇 번씩 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잖아? 그런가…. 연인의 목소리가 침묵 속으로 스며들었다.


"캘리포니아 그녀에게 해명하라고 요구해야 하는 거 아니냐?"


"맞아. 이것도 일종의 배신이라구. 작정하고 속인 거잖아!"


"별동대라잖아? 형은 왜 앞뒤 구분을 못 해?"


한동안 제풀에 씩씩대다가 다들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가 갈피 잡을 수 없는 지난 일들이 마냥 아름답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과거가 결코 기억 속에서 얌전히 앉아 있지 않음을 깨닫기까지의 시간은 아프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 보면 캘리포니아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을 거야. 지난 일이니까. 그녀 스타일 알잖아? 과거는 기억하되 내세우지 않는."


"하지만 과거가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있나? 말이 안 되잖아?"


"하긴 우격다짐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결국 우리만 바보 된 거 아니야?"


"오포읍에서부터 시작해볼까 해. 지난 일이지만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산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까."


나는 괜히 말 꺼내 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후회도 잠시 하지만 언제까지 입 다물고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으로 슬쩍 내뱉었다.


"거긴 왜?"


"인철수가 오포리 영산 추모원에 있잖아, 진달래 묘역에."


"시간 많은 원생이 주도해라. 우린 틈나면 합류하고. 모른 채 지나가기엔 너무 찝찝해. 대단하지 않아 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도 기억하는 게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달래는 것이기도 하니까."


"캘리포니아 그녀도 우리가 그러길 바랄지도 모르지."


"이미 끝난 사이인데 바랄 거라고? 너무 앞서 나가는 거 아니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공사 구별 몰라?"


"난 반댈세. 무덤 파헤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장욱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마구 뒤죽박죽 순서 없이 엉망이 되어버린 기억들을 굳이 되살려 차례 맞춰 펼쳐놓을 필요가 없다는 투였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이미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고 설령 눈앞에 반듯하고 질서 있게 펼쳐놓는다 해도 세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고 선택 훼방 증후군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게 뻔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앞날에 거대한 바윗돌이 길을 막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없지도 않았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기억은 주관적 선택에 따른 선입관이야. 인식 자체가 선택적이잖아?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기억을 아무리 세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프로파간다 노릇하는 김용덕은 잘 알고 있지 않냐?"


장욱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관적인 것들을 마치 객관적인 것들로 속이거나 착각하게 만들어 뒤바꿔놓은 광고장이를 은근히 비꼬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우리 기억 속에 프락치로 남겨 놓는다는 건…, 비겁하지 않을까?"


시간 아깝다, 어서 가자. 알았어. 약속은 지켜야 해. 저녁 모임 전에 끝내기로. 연인은 서둘러 일어나 출입구로 걸어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작은 우산 펼치고 남자는 여자를 갈비뼈 안으로 집어넣겠다는 듯이 와락 끌어안고 추적추적 빗방울 느슨하게 내리는 거리로 나섰다.     


68


안녕하세요? 아, 네. 여주인이 주방에서 나와 일부러 탁자까지 가서 인사했어.


팀장은 무표정에 날 선 경계심까지 내비치면서 대단히 사무적인 마른 말투로 짧게 인사받고 입을 다물었어. 무겁고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단단하게 버티고 있는 딱딱한 분위기, 상대를 배려해서 무슨 말 꺼내야 할까, 그따위 궁리는 없었어. 드물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해서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도 있어 물어볼 수 있지만 팀장은 본능적으로 적당한 거리 유지하는 쪽을 선택했어.


아저씨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표정으로 카운터에 앉아 노려보았어. 지난 영화제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 모양이야. 너희들이 태극기 휘날리며 짓밟을 때 우리는 인공기 휘날리며 피눈물 삼켰지…. 아직도 기억나, 문화원 강당을 나와 거리로 걸음 내딛으면서 낮고 단단하게 혼잣말하는 뒷모습이 잊히지 않아. 아저씨는 법적으로 미국인이야. 하지만 법이 정체성을 말해주지 않아. 살아온 과거를 대변하지도 않고 희망 역시 담보하지 않아. 그저 편리(便利)일 뿐이야.


팀장은 확실히 말 섞는 걸 꺼리는 눈치였지. 낯선 땅에서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말하지 못했어. 팀장을 내가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으니 괜한 참견이야. 영사님도 대단히 만족해서 원장님 입이 귀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6월 한 달 내내 한국전쟁 기념 문화 페스티벌을 기획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예전에 손발 맞추었던 멤버들이 다시 모였으면 하는 뜻으로 왔습니다. 페이는 지난번보다 많습니다. 당연히 페이보다 중요한 것은 애국심이죠.


팀장은 당당하게 말했지만 거북했어. 아직도 애국심을 구걸하세요? 지금이 어떤 시대이고 어떤 땅에 서 있는지 모르세요? 대체 누굴 위한 애국심이요? 말하지 않았어. 영사관에 숙소가 있는데 원하시면 방 하나쯤은 제공할 수 있습니다. 팀장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내 표정을 읽고 서둘러 말했어. 어디까지 뒷조사를 했을까? 더럭 겁이 났어. 누구나 살아온 관성의 법칙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구체적인 기획안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자유세계가 지켜낸 한국의 발전상을 캘리포니아 주민들에게 널리 홍보함으로써 자유의 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암튼 하시는 쪽으로 결정하죠? 팀장은 당당했어, 페이를 주는 쪽이니까. 갑을 관계를 너희들도 알잖아? 그리고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양심은 물론이고 급기야 영혼도 살 수 있다는 기괴한 발상, 너무나 익숙해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당연히 지난번 같은 불상사는 없을 겁니다. 원장님이 약속했으니까요. 그 점은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팀장은 작은 영화제가 끝나고 열렸던 파티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앞으로 절대 없을 거라고 확신했어. 길을 가로막는 방해물은 없으니 와서 신나게 일하면 숙소는 물론이고 넉넉한 페이까지, 그리고 페스티벌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인턴이 아니라 문화원 차원에서 고용하는 현지인 티오가 있는데 법적으로 완벽한 고용관계도 계약할 수 있다며 거들먹거렸어, 사기꾼처럼. 연락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팀장이 적진 빠져나가듯이 서둘러 돌아갔어.


아저씨는 출입구에 소금이라도 뿌릴 기세였어. 아저씨는 전형적인 북쪽 한국 남자 스타일이야, 직설적이고 다혈질이지만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어주는. 이것저것 따져가면서 결정하겠지만 늘봄식당은 늘 자리가 있어. 여주인은 섭섭한 표정이면서도 흔쾌히 보내줄 수 있다며 내 손등을 토닥거렸어. 물론 여주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알바니까 그만둔다고 하고 냉정하게 뒤돌아서면 끝이야.


하지만 속속들이 알지 못해도 일 년 넘도록 부딪치면서 서로를 알아 왔던 터라 쌓인 정이 없겠어? 아저씨는 여주인 뒤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어. 응옥찐은 팀장이 다녀간 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듯 눈치 보다가 다가왔어. 무슨 일이야? 아까 그 남자는 누구야? 망설이는 표정 풀지 않고 말했어.


베트콩이야. 뭐? 응옥찐은 화들짝 놀라며 손까지 가늘게 떨었어. 피식 웃음이 나왔어. 어떻게 해? 다시 못 보는 거야, 우리? 응옥찐은 귀여워. 온실 속 화초야. 모든 행동 규율과 신념은 할아버지에게서 나와. 조금이라도 삐딱선 타지 않아. 비록 북쪽 베트남이 남쪽 베트남을 점령해버렸지만 너희는 그러지 않길 바래. 응옥찐은 통일이란 말을 쓰지 않아. 점령이라고 해. 어느 쪽이 베트콩인지 모르겠어, 북인지 남인지. 의혹을 말하지 않았어.


응옥찐은 신념에 가득 차 있지만 단순하거든. 삶을 바꾸는 사랑과 결혼까지 염두에 두었던 응옥찐이지만 냉정하게 뒤돌아섰잖아. 식당 영업이 끝나고 응옥찐은 아파트까지 태워주면서 내내 걱정했어. 사람은 바뀌거나 변하지 않아, 베트콩은 영원히 베트콩이야. 계속 중얼거렸어. 걱정하지 마. 아주 가는 건 아니니까. 여주인도 아저씨도 언제든 다시 받아준다고 했거든. 응옥찐을 달랬어.


헤어짐을 예감한 응옥찐은 이별보다 베트콩이 더 신경 쓰였나 봐. 나를 내려주고서도 한동안 차는 움직이지 않았어. 어서 가라고 손짓까지 했지만 응옥찐은 내내 나를 살폈어. 한참 뒤에야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기어를 넣더니 차가 움직였어. 엘리베이터는 없어. 4층 꼭대기 층 현관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자 변함없이 멜라니는 전신 거울 앞에 서 있었어. 금방 돌아왔는지 외출복 차림이야.


하지만 옷을 벗지 않고 마네킹처럼 서 있기만 했어. 불길한 예감이 스쳤어. 설마 알프레드와? 아무리 수많은 이별을 거치면서 마음 단단해졌다고 하더라도 늘 처음처럼 다가와. 여자에겐 더욱 그래. 멜라니의 전신 거울 앞에서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조용 움직였어.


느닷없이 허쯔가 생각났어. 나의 첫 룸메이트, 잊혀진 여진족의 후예, 중앙당 간부의 외동딸, 하루아침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린…, 이유도 없이 왈칵 눈물이 났어. 온갖 도전을 받아들이며 쌓아 올린 삶의 가치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허쯔 부모의 망연자실. 멜라니처럼 나도 급격히 우울해졌어. 캘리포니아에는 비가 오지 않아, 웬만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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