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순직 Sep 09. 2023

멜라니가 샤워하는 동안

캘리포니아 그녀 23화

69


창문 밖에는 캘리포니아 어둠이 앉아 있어, 쌓이지 않아. 길바닥 불빛 없는 구석에 옹송그리고 있다가 헤드라이트가 나타나면 화들짝 놀라 도망가. 간혹 동네 건달과 한 패거리가 되어 쉽사리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움직이기도 해. 지역 신문에서 조셉을 발견한 순간 안타까웠어.


언젠가 늘봄식당에 허리춤 총 차고 왔던 친구와 나란히 머그샷이 실렸어. 서너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마주쳤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거야. 코앞으로 신문 바싹 끌어당겨 거듭 봐도 역시 조셉이었어. 캘리포니아는 이민의 나라야. 동학혁명이나 3.1 운동 같은 것들은 애당초 있을 수 없어. 권리를 주장할 조상의 땅은 캘리포니아에 없어.


장난기 많고 동양 여자에 호기심 넘치던 조셉이 어쩌다 머그샷까지 찍게 되었는지 과정에 대한 설명은 없었어. 왜 건샵을 털려고 했을까? 은행보다 보안이 철저한데. 멜라니는 옷을 벗지 않았어. 오늘 어땠어? 어쩌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는 슬픈 예감이 들었어. 징징거리고 매달리는 거 딱 질색인데 이제 와서 달라붙으려고 해, 남자들이란! 이런저런 자세를 취하면서 혼잣말처럼 말했어. 맞아, 멜라니는 자유로운 영혼이고 몸이야, 헤어진 애인도 친구가 되는.


친구가 다시 애인이 되려고 한다면 멜라니는 숨 막혀 하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고. 몸 달아올라 안절부절못하면 이미 자기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거잖아? 매력 없어! 멜라니는 싱싱한 남자를 좋아해, 적어도 내가 보기에. 드디어 멜라니는 옷을 벗기 시작했어, 천천히 지겨울 정도로 느릿느릿. 평소 같지 않은 속도여서 알프레드와 헤어졌다는 걸 짐작했어. 바보스러울 정도로 해맑게 웃던 알프레드가 짧게 떠올랐어. 소파에 앉은 유일한 남자였는데 말이야. 그래도 내가 보기에 철이 없어. 너희들 시선으로 봐도 철이 없을 거야


멜라니가 샤워하는 동안 창밖 어둠을 보면서 곰곰이 따져봤어. 당연히 식당에서 서빙하는 것보다 조건이 좋아. 여주인이나 아저씨도 굳이 말리고 싶지 않은 눈치고 이미 당분간은 만나지 못할 거라는 확신에 차 있을 정도니 어느 정도 나를 꿰뚫고 있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그들의 시선처럼 마냥 신나거나 절호의 기회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없어. 떠나온 남쪽 한국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가시지 않아.


여주인 집에서 더부살이할 때, 마치 양강도 혜산 같다고 했던 거 기억나? 그 이질감과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던 겹겹이 눈앞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벽들…. 남쪽 한국인들이 모인 곳에는 남쪽 한국식 사고방식들이 활개 쳐. 일 년 전이라면 그다지 낯설어하거나 거북살스러워하지 않았을 거야. 작은 영화제 할 때만 해도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어. 적어도 심정적으로는 태극기 휘날리며와 인공기 휘날리며 사이에서 한 발짝 더 태극기 쪽에 서 있었으니까.


교육의 효과인지 고향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 때문인지 아니면 아무 생각조차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어. 당장 눈앞에 있는 페이만 생각했을 수도. 멜라니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고 내 앞에 앉았어. 동물원 얘기가 멋지지 않아? 멜라니의 핑크빛 젖꼭지가 살짝 눈앞에서 흔들렸어. 겉보기에 분명 의심할 필요도 없이 명명백백 사람이지만 존재 방식이 동물이라는 거잖아? 어떻게 생각해? 머리가 지끈거렸어. 나는 평양에 가보지 않았어. 간혹 동영상은 봤지만 모든 동영상은 편집해. 숨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


우리가 저항하고 뜨거웠던 그해 유월이 바로 숨은 의도를 까발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오늘 김철수를 만났어. 꽤 흥미로운 대화도 했어. 유익한 시간이었어. 네 생각은 어때? 멜라니의 젖꼭지가 단단하게 뭉쳐져. 김철수는 언제 돌아온 것일까? 늘봄식당에 어김없이 나타났었는데. 김원봉이라는 사람 알아? 약산이라고도 하던데? 멜라니의 옹달샘은 깊어. 얼마나 많은 메기들이 뛰어놀았을까? 미끈한 허리선이 눈에 가득 들어와.


캘리포니아 영웅들은 항상 승리하잖아? 그런데 너희의 영웅들은 하나같이 패배해. 비참한 죽음을 맞아. 배트맨이나 슈퍼맨, 스파이더맨…, 그런 이름을 빌린 수많은 영웅은 모든 사람에게서 갈채 받고 오랫동안 기억하지. 하지만 너희의 영웅은 뭐랄까, 애매해. 뜨뜻미지근한 박수와 분명하지 않은 어중간한 기억,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 멜라니는 대체 무슨 얘기를 들었던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김원봉에 대해. 아니 김철수가 바라본 김원봉에 대해. 거의 예외 없이 모든 나라는 소중한 기억을 묘지로 만들어. 국립묘지가 그렇지. 그런데 김철수가 말하길 묘지가 뒤죽박죽이라며? 아예 없는 이도 하다며? 브라질리언 왁싱을 한 멜라니의 옹달샘이 살짝 꿈틀거렸어. 총 쏜 사람과 총 맞은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묻혀 있다며? 고문한 사람과 고문당한 사람이 사이좋게 나란히 옆에 있다며?


멜라니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눈길은 자꾸만 수건을 살짝 삐쳐 나온 금발 몇 가닥과 부드러운 어깨선과 늘씬하게 아래로 뻗은 허리선과 한껏 부풀어 오른 풍성한 유방 꼭대기에 매달린 핑크빛 젖꼭지와 은밀하게 숨어 있는, 그러나 브라질리언 왁싱 덕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옹달샘과 가느다랗고 윤기 흐르는 다리에 빠져들었어. 조셉아, 왜 건샵을 털려고 했니? 캘리포니아에 네 조상의 땅은 없어….


70


벌거벗고 있는 멜라니 앞에서 정작 부끄러운 것은 왜 나일까? 코앞에서 꿈틀거리는 손 뻗으면 고스란히 잡히는 핑크빛 젖꼭지가 암갈색 젖꼭지보다 당당한 것은 왜일까? 멜라니 앞에서 벗는다 해도 정말 온전하게 완전히 벗을 수 있을까? 벗어도 벗어도 끝내 벗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아무튼 서울과 평양은 이상하고 신기한 나라야. 그래서 김철수가 매력적으로 보이는지도 몰라. 멜라니는 천천히 일어나 천천히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갔어. 소파에 혼자 남아 딱딱하게 굳어진 피자 조각을 혼자 씹으면서 그때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잡고 싶지만 결코 잡히지 않는 많은 영감들은 우리를 외면해, 잔인하도록.


시(詩)는 나를 지나쳐 저 혼자서 즐겁게 사람들을 구경해, 콧노래 부를지도. 그러니 너희들에게 부탁해, 가만히 놓아둬. 비겁하다고 욕해도 상관없어. 인철수를 가만히 놓아둬.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인철수는 영웅이 아니야. 그해 유월에 닿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분노가 쌓여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었는지 이제는 중요하지 않아. 아무도 누구도 기억하지 않아. 멜라니가 신기하고 이상하다고 여겨도 쉽게 잊어버리는 일을 멈출 수 없잖아? 덮어두고 모른 척하고 외면하면서 문화원 팀장의 제의를 끝내 거절할 수 없는 나처럼 너희들도 그렇게 살게 될 거야.


그러니 가만히 놓아둬. 샘이 말했어. 우리는 모두 흐르는 물처럼 살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따위는 없어. 진실 앞에서 비참해지는 너희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딱딱해진 피자 조각이 이빨 사이에서 저희끼리 춤춰. 고문이 얼마나 잔인하게 시간을 엿가락처럼 늘어놓는지 굳이 알 필요는 없어. 벗어도 벗어도 끝내 벗겨지지 않는 것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어. 멜라니는 벌거벗은 채로 잠들었어…. 이만, 총총총.


버스는 쉬지 않고 덜컹거렸다. 조금씩 등 뒤로 밀려나는 도시가 벌써 그리워지는 늦은 오후, 김선미는 신랑 놈의 만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시간이 쌓여 점점 거리가 멀어질수록 관계는 흐려지고 나쁜 기억들은 틈틈이 새로워졌다.


"여자가 용서할 수 없는 게 뭔지 알아?"


"어려운 숙제 내지 마. 차라리 임화의 이식 문화론을 떠들라고 해라."


나는 단칼에 잘랐다. 장욱진이었다면 장단 맞춰 손뼉까지 쳤을지도 모르지만, 애당초 반대했던 터라 동행을 거부했다. 뻘짓이야. 교정할 일거리가 산더미야. 장욱진의 전화기 목소리에서 엷은 야유마저 느껴졌다. 글자만 교정할 줄 알았지 정작 교정해야 할 것들은 무시해? 그러고도 친구였냐? 나는 말하지 않았다. 이제는 피붙이 같은 사이여서 악착같이 달려들어 시시비비 가리는 일조차 의미 없는 일이었다.


"미친놈이 막 가는 거야. 침대에서 다른 여자 체취를 발견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거 같아?"


"그 정도였어?"


"빨강 머리카락은 흔하지 않아."


"임화도 그런 짓을 했어, 실제로. 제 딴에는 인텔리인 척 무진 애를 썼지. 자신을 군계일학쯤으로 여겼으니까. 사실 닭이 없으면 학도 없는 거잖아?"


"무슨 말이야? 내 얘기 듣기 싫어? 남자라고?"


김선미는 눈을 흘겼다. 차창 밖으로 푸른 들판이 여전히 지나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돋보기 들고 샅샅이 훑었어.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니까. 그런데 괜한 짓이었어. 끈적한 정액이 여전히 미끈거리는 콘돔을 발견하자 무너지는 건 미친놈이 아니라 나였어. 분노는 망설임이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거였어. 망설임조차 사라져 버린 비참한 기분이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한없이 떨어지는 추락하는…."


김선미는 덜컹거리는 버스 낡은 의자에 앉아 조용히 울먹였다. 나는 차창 밖 여전히 쉬지 않고 지나가는 들판에 눈길 꽂고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 잡지 못했다. 걸핏하면 붙어 다니는 장욱진에게도 하지 않은 말들을 왜 내게 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물음만 떠올렸다. 가로수 잎사귀들이 일제히 흔들리고 있었다.


71


"저러고 싶을까? 짜증 나네."


김선미는 금방이라도 한 송이 국화를 빼앗아 땅바닥에 패대기칠 듯이 화를 냈다. 왁자지껄 졸업식 열리는 학교, 교문 앞에서 매대 가득 꽃을 늘어놓고 호객 행위하는 풍경은 익숙하지만 추모 공원 입구에서 마주친 호객행위가 도무지 마뜩잖아 얼굴을 찡그렸다. 추모하는 마음이야 눈에 보이지 않지만 꽃은 보이잖아? 나는 말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아주 오래된 바람이 불어왔다. 산도 없는 들판 한가운데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서 있는 건물들은 을씨년스러웠다. 경건한 마음을 강요하는 클래식 음악이 눈처럼 발에 밟혔다.


"죽어서 살아도 아파트네."


김선미는 건물 안으로 들어와서도 기분이 채 풀리지 않았다.


"왜 자꾸 삐딱하게 나가? 이제 와 신랑 놈을 씹은들 무슨 소용이야?"


"마음이 쓰레기 버리듯 쉬워? 형도 마찬가지야. 안 선배만 불쌍하지."


김선미는 말과 다르게 걸음은 한없이 느려지고 주춤거렸다. 진달래 묘역 5구역 318호. 살아서 수없이 호명되었을 이름 대신 숫자로 멈춰 선 유골함들 속에서 이매 탈을 쓴 인철수는 슬프게 웃고 있었다. 아직 시들지 않은 국화 한 송이가 유리 벽에 찰지게 붙어 있었다. 나는은 그 옆에 국화를 이름표처럼 붙이고 짧은 묵념을 했다. 유골 항아리 앞에 모형으로 만든 소주와 담배와 밥상이 놓여 있고 맨 뒤에 모형 아닌 노트가 병풍처럼 서 있었다.


"저건 뭐지?"


"왜 저걸 넣어놨을까?"


떠난 사람의 물건은 남김없이 화장하는 유구한 관습을 피해 노트는 멀쩡히 살아서 항아리를 지키는 듯했다.


"일기 같은데?"


김선미는 살짝 보이는 노트의 속살을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꺼낼 수 없을까?"


"어떻게? 어림도 없어."


"여동생한테 얘기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건 알 수 없지."


"궁금하지 않아?"


"부채감 때문에 궁금해하는 거지?"


"어쨌거나."


추모관을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천천히 걸었다. 노을이 장미보다 붉게 피어나고 있었다.


"언니가 알면 한마디 할 텐데?"


"캘리포니아에서 어쩌겠어? 또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잖아?"


김선미는 뒤늦게 찾아온 울적함에 입술 굳게 다물고 오래된 바람에 실려 들판 가득 넘실거리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길은 노을 속으로 뻗어 있었다.


"박철수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걸,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집착하지 마. 이미 떠난 사람이잖아?"


"마음이 편치 않아…."


나는 김선미와 마주 서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지금 상황과 버스 정류장이, 숱하게 다녀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기지감에 놀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멀리에서 버스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진족의 후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