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그녀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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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근황 알고 있다는 현사반 후배 만나 달랑 공장 주소만 들고 이 골목 저 골목 가느다란 희망 하나에 눈을 부라리며 헤맸다. 진성 종합화학이라고 하는 데 가보지 않아서 정확히 모르구요, 번동 어디쯤 있다는 것만…, 그런데 얼마 전에 잠깐 만났을 때 무척 힘들어하더라고요. 말은 끝내 하지 않아서 무슨 일인지 몰라도 박 선배도 무척 지쳐 있더라고요….
박철수는 현사반 안에서 이미 빛바랜 전설이었다.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어?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사뭇 신기하고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후배들의 세계에서 박철수는 오래 기억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잔인한 군부독재는 사라졌고 저항과 투쟁은 역사가 되지 못하고 갈수록 흐려지는 기억으로 전락했으며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사랑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얼마나 커다란 마음 먹먹함을 남기는지 뒤늦게 눈치채듯이 젊음이 지나가고 난 뒤에야 돌아보니 실수들과 사소한 잘못들과 뜨거운 열정들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는지 똑바로 바라볼 때의 회한이란! 골목은 쉼 없이 골목으로 이어져 있었다. 한참 뒤에야 주택가에 포위된 담벼락 낡은 공장 정문에 서서 쭈뼛쭈뼛 안을 들여다보았다. 공장 마당에는 지게차가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상차작업을 하고 있었다.
직원 뽑지 않는데 무슨 일이세요? 수상하다는 눈빛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사내가 불쑥 나타났다. 박철수라고…, 혹시 있나요? 포장반 반장인데 서에서 나왔나요? 사내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건 아니고…, 친굽니다. 다시 떨떠름해지는 눈빛. 상차작업 끝나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사내는 미련 없이 뒤돌아 사무실로 들어갔다. 쭈뼛쭈뼛 공장 마당으로 들어섰다. 박철수는 트럭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야! 샌님이 여긴 뭔 일이야?"
박철수는 구릿빛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작업이나 끝내라."
"당연하지. 지루하더라도 좀 참아라."
공장 규모는 작았다. 마당을 중심으로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는 여러 건물 안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 아주머니들의 서슴없는 걸쭉한 말들, 팔레트 위에 차곡차곡 벽돌처럼 쌓여 있는 납덩어리들, 마당 한 편에 버티고 서 있는 외제 승용차 하나가 공평하게 햇살 아래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전태일도 끝내 바꾸지 못한 가난한 노동 현장에서 서 있다고 생각하니 서글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세상은 확실히 우리들의 열망과 다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시 나부랭이나 쓰지 누추한 곳에 샌님이 무슨 일로 행차했나?"
상차작업 끝내고 짐칸 가득 물건 실은 트럭을 내보내고서야 박철수는 여전히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핀잔처럼 말했다. 노동에 익숙해진 팔다리가 튼튼해 보였다.
"인철수 얘기를 좀 듣고 싶어서."
"자다가 봉창 두드리냐? 느닷없이 철수는 왜?"
"갔다는 소식은 알고 있지?"
"장례식장에 갔었어."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딱히 아는 사실도 그다지 많지 않고 괜히 들쑤셔 마음을 엉망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있었다.
"별동대였다며? 알고 있었어?"
"몰랐어. 나중에 대장이 말해주더라. 캘리포니아는 잘 지낸대?"
"보고 싶냐? 나도 보고 싶다."
"그리운 건 아니고 안부가 궁금할 뿐이야. 그래도 한때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으니까. 교도소 면회 왔던 얼굴이 아직 선명해. 누군가의 닻이 되어 준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거든."
"인철수랑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소문이 있던데 알고 있었어?"
"지난 얘기지만 철수랑 연적이었잖아. 그런데 기생오라비 뺨치는 미모를 내가 감당할 수 있겠냐? 그래도 면회는 왔었으니 의리는 있다고 봐야지."
기억은 쉽게 녹슬었다. 기억은 저마다 내용이 달라 생소했다. 박철수는 대단한 무용담처럼 지랄탄 소낙비로 쏟아지는 그해 뜨거운 유월의 거리를 떠올렸지만 나는 교문 앞 작은 공터에 중무장하고 쭈그리고 앉아 있던 전경들이 떠올랐다. 명동성당의 아우성을 기억해냈지만 문창반 종이비행기를 떠올렸다. 그러나 코를 사정없이 후벼 팠던 최루 가스는 여전히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서 하는 일은…, 잘 되냐?"
"아버지 회사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여기서 이러고 뻗대고 있는 게 대수는 아닌 거 같아."
"아버지 회사? 사장님 아들이었어?"
"대충…, 그렇지. 사실 폐업 예정이라 그동안 노력이 부질없어졌어. 중국 물건 쏟아져 들어오니 회사도 버틸 재간이 없는 거야."
"너네 회사에서 노조 만들려고 해야지 왜 생판 남모르는 여기서 지랄하냐?"
"노조 만들 만큼 크지 않아. 그리고 대구잖아?"
"대구든 어디든."
박철수는 뻘쭘해지는 모양인지 뒤통수를 긁었다. 햇살이 따가웠다.
"인철수라면 캘리포니아가 가장 잘 알 텐데 왜 헛수고하고 다녀?"
"말도 못 꺼내게 한다."
"지금 기억났는데 말이야…, 종암 경찰서 대응팀이었어, 별동대가. 하긴 그쪽 정보과에서 어느 정도 눈치는 챘다고 하더라. 똘이장군이라고 있는데 이 사람이 아주 기가 막혀. 그쪽 바닥에선 날아다녔대. 이제는 뭐 다 쓰잘 데 없는 일이지. 죽었다 깨도 과거는 잊혀지기 마련이잖아? 너도 그만둬. 이제 와 인철수를 궁금해한들 무슨 소용이냐? 잊을 수 있는 것들은 재빨리 잊어버리는 게 상처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내가 변했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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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해졌구나. 자신에 대해 너무…, 관대해졌구나."
"변명 같지만, 너도 학교 밖으로 나와봐야 깨닫지 않을까? 더구나 젊음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는 하루들은…, 지독한 형벌 같은 거야…, 뭐 너처럼 아니면 말고…."
박철수는 늙어버린 말들을 혼잣말도 아니고 건네는 말도 아닌 어중간한 톤으로 천천히 중얼거렸다. 공장 마당에 햇살이 고여 출렁거렸다. 그 속에서 조금씩 흐려지는 새파랗게 젊은 날들의 박철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시위를 주동하고 교과서로 배운 역사가 얼마나 구멍 숭숭 뚫린 엉성하기 짝이 없는 허수아비 관념인지 낱낱이 토론하던 젊음은 이제 없었다.
끊임없이 부정해야 긍정할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하루들에 지쳐 편리해지고 싶었구나…. 코앞의 유혹은 언제나 강렬하지 않던가, 뿌리치기 어렵지 않던가. 이제는 앞장서지 않고 엉거주춤 사람들 속에 섞여서 나이가 주는 무게와 지극히 작고 소박한 자신에 대한 구체적인 책임감이 던져주는 평범한 보통의 하루들 속으로 들어가고 있구나…. 추모관 서 있는 들판의 노을이 을씨년스럽게 되살아났다.
"이 병장 아니야? 혹시나 했는데 맞네!"
노가다였다. 아득해진 광산골 기억들이 빠르게 되살아났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 찌푸리며 애써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서로 아는 사이야?"
박철수는 사뭇 몰라는 표정, 노가다는 악수한 손을 쉽게 놓지 않고 연거푸 흔들어댔다.
"야, 여기서 만나네. 어쩐 일이야?"
"친구 만나러 왔지요. 여기서 일해요?"
"주물반에서 조정기 찍어내는 일을 하는데 폐업한다니 또 다른 일자리 알아봐야지. 박 반장님하고 친구야?"
"네."
광산골의 계급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게 거북했으나 한 기수 선임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영원히 부정할 수 없는 불문율 같은 거여서 몹시 불편했다. 그때 과연 우리는 정말 무엇을 위해 군 복무했을까. 등 떠밀리듯 엉거주춤 어쩔 수 없이 들어놓은 발을 빼기에 너무 늦어버려 침묵하며 하루하루 흐르는 물에 흘려보낸 것은 아닌가.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흉한 흉터로 남지 않았나. 하여 이토록 불편한 것이 아닌가.
"허스키 알지? 그놈이 거래처 부장이야. 덕을 좀 보려는 참인데 폐업한다니 말짱 꽝이 됐어. 잘 지내지?"
"그럼요."
노다가는 비로소 손을 놓고 나를 다시금 살폈다.
"야, 이 병장도 늙어가는구나. 언제 한잔해야지? 일하다 나와서 들어가 봐해. 나중에 한잔해?"
노가다는 대답도 듣지 않고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고 서둘러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규칙적인 기계음이 들려왔다. 느닷없어 황망하기까지 한 짧은 만남이 만들어 놓은 광산골의 기억이 비 내리는 유격장으로까지 번져 마음이 씁쓸했다. 옷자락 빗줄기 타고 흐르던 핏물들. 골짜기 사이에서 피어오르던 산안개.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들은 땅이 아니라 자존감일지도 모른다는 얼핏 스친 생각들.
"박광호 부장이 연락되면 만나보면 좋아할 텐데."
"시인이라던?"
"와이프가 화장품 가게를 했었는데 사기당해서 이젠 연락도 되지 않아."
박철수는 작은 돌멩이 하나 주워 공장 마당 햇살 속으로 던졌다. 풍덩, 돌멩이는 자맥질했다.
"노조 만든다는 얘길 듣고 악착같이 말리더니 퇴사하고서는 오히려 도와주었으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관계에 얽매여서 사나 봐.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데 입장이 달라지니 사람이 변하는 건 어쩔 수 없나 봐. 고지식하긴 했지만 착하고 반듯한 사람인데 다들 그런 사람들이 사기를 당하더라. 알고 보니 시인이 된 것도 외동딸 때문이었어. 자살했지. 목숨보다 순결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간당했으니 그 비참함이야말로 다할 수 있겠어? 우리 주위엔 거대한 헤게모니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작고 사소한 것들이 삶을 더 많이 방해해. 그런 훼방꾼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고. 변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누구나 변하면서 살아가는 거니까."
나는 마른세수를 연거푸 했다. 누구나 자신의 깃발을 하늘 높이 올려세우지만 지나고 보면 다들 거기서 거기인 높이를 뒤늦게 발견했을 때의 난감함은 어김없이 부끄러움과 아련한 깊은 슬픔을 불러내지 않던가.
"주물반에서 기계 돌리다가 거래처 부장이 아는 사람이라 영업부로 점프할 기회를 놓친 것도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지 알게 해주는 사건이잖아? 폐업이니 느닷없이 뒤통수 맞은 거지. 나도 마찬가지지만."
마치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겠다는 투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박철수가 또 수상한 말장난을 하고 있다는 짐작이 들었지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렵고 우연찮게 박철수는 만났지만 빈손일 수도 있다는 판단과 그 반대로 학교 안에서 결코 얻을 수 없는 무엇을 깨달았다는 판단이 뒤섞였다. 나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공장 마당을 향해 힘껏 던졌다. 돌멩이는 풍덩, 잔물결 일으키며 자맥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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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히 예상했지만 부딪쳐보니 역시였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원장이 치근덕거리지 않는 정도? 아직까지는. 영화제는 지난번 상영했던 것들을 그대로 올리기로 했는데 문제는 사진전이야. 이곳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사진전이어서 한계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아양 떨거나 아부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낯 뜨거워져.
물론 이미 지난 일이라며 생까는 짓은 나도 용서가 안 되지. 하나같이 민둥산에 허허벌판을 배경으로 휘날리는 성조기가 자꾸만 눈에 거슬려 팀장에게 빼자고 했지. 무슨 소리! 관람객은 미국인들이야. 당신들의 희생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기에 안성맞춤이잖아? 내가 무슨 말을 더하겠어? 돈이 깡패인데. 낡고 더러운 치마저고리에 세수도 하지 않은 어린 여자애가 더 어린아이를 포대기로 업고 성조기 휘날리는 탱크 앞에 서서 표정 없는 얼굴로 카메라 앵글을 바라보는 사진은 고통스러워.
맞아, 과거는 부정할 수 없어. 그러나 과거가 발목 잡는 미래는 누구도 원하지 않아. 고통스러워도 어쩔 수 없어. 인철수는 떠난 뒤에도 마음속에 유령처럼 남아 있었다고 솔직하게 인정해. 하지만 유령이 상처가 되어 걷는 길 방해하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우울과 무기력에 한동안 어쩔 수 없이 빠지더라도 힘껏 떨치고 일어서야 해. 망각보다 무서운 건 왜곡되어버린 기억이야.
그 기억을 끊임없이 되살려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하려는 원장의 속셈은 눈 감고도 손에 잡혀. 남쪽 한국에서 여전히 먹히고 있지만 여긴 캘리포니아야. 고지에서 펄럭이는 깃발은 더 이상 전사한 전우들을 기리는 위령제가 아니야. 대령 출신 원장처럼 자신의 온갖 이익을 위한 구호에 지나지 않아. 처절한 몸부림과 숭고한 희생은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아. 사실은 잊혀지고 기억만 남을 때 위태로워져.
사진전이 바로 그런 거야. 기억을 확대 재생산하는 거지. 한국전쟁을 잊지 않으려는 문화제인 건 맞죠? 더구나 캘리포니아에서요. 팀장은 기획 의도가 정확하다며 고개까지 끄덕였어. 그런데 사진전이 퇴행적이지 않나요? 말하자면 과거의 가치는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미래의 가치는 좀처럼…, 보이지 않잖아요? 지금도 여전히 한국은 한 발짝도 한국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을까요?
그 트라우마에 갇혀 있다고 믿지 않을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는 걸. 팀장은 살짝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어. 폐허가 된 서울 풍경과 높은 빌딩 빽빽하게 들어선 요즘 서울 풍경을 같이 전시하는 게 좋겠군, 그렇지 않아? 과거는 처참했지만 현재는 멋지다. 그렇다면 손쉽게 미래를 예측하지 않겠어? 팀장은 의기양양했어.
두 사진을 나란히 전시하면 나름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현재가 과거의 도우미 역할밖에 할 수 없다고 얘기하지 않았어. 한국전쟁의 엄청난 충격이 좀처럼 씻어낼 수 없는 지독한 트라우마를 재생산하는 걸 부정할 수 없어. 하지만 트라우마는 종전이 아니라 정전이라는 이름 아래 합리화한 수많은 독재 시스템을 만들어냈잖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마치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기도 했고. 거기에 무슨 미래가 있을까? 말하지 않았어. 돈이 깡패가 되어버린 현실 뒤편에 독재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어. 얼핏 보면 모두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자세히 보면 한국전쟁 전투 현장 하나하나에서 곧잘 발견할 수 있는 안타까운 숭고한 희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현재의 자신 위치를 합리화하려는 도구로 포장하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은 걸까.
아니 그런 생각을 하긴 했을까? 참, 이산가족 상봉도 있었지. 그렇다면 10년 단위로 끊어서 각각의 시대가 어떻게 변해갔는지 역동적인 구성으로 하면 어떨까? 한국전쟁 문화제와 거리가 있어 보이긴 하지만 고려해볼 수 있지 않을까? 팀장은 지독한 고뇌 끝에 짜낸 묘수처럼 말했어. 하지만 나는 알고 있어. 원장이 쉽게 퇴짜 놓을 거라는 걸. 대령 출신 원장은 겪어보지도 않은 한국전쟁을 밑천 삼아 평생 잘 먹고 잘살아.
기획 회의 도중에 잠깐 회의실로 들어왔던 원장은 거드름 피우면서 대단히 만족스러운 얼굴이었어. 원장의 눈빛이 몇 걸음 앞에서 내 살갗에 닿을 땐 징그러운 벌레가 기어 다니는 착각에 빠졌어. 오싹했어. 트라우마 올가미를 씌우려는 자와 벗어나려는 자…, 숨바꼭질은 끝나지 않을 거야. 서로 다른 두 이데올로기에 갇혀 괴로워했던 한 남자…, 그 남자와 우리가 얼마나 다를까? 과연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토록 많은 시간이 흘러갔음에도.
첫 번째 기획 회의는 원장이 회의실을 나가고 조금 더 있다가 끝났어. 팀장은 원장의 퇴근을 알고 있었어. 캘리포니아의 햇살은 따가워. 좀처럼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차가 멈춰 섰어. 조수석 쪽 차창이 열리더니 팀장이 타라고 했어. 괜찮다고 했어. 그 동네 좀 위험하잖아요? 팀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어.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고 했어. 어둠이 내리면 안녕과 안전에 신경 곤두세우지만 다시 해가 뜨면 발걸음 멈추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어. 버스는 여전히 오지 않았어. 캘리포니아에서 버스 타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인내심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