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그녀 25화
75
버스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거리를 걷다 보면 편안해지고 슬며시 마음도 평화로워져. 긴장이 풀어지고 걸음은 느려지고 하루를 탈 없이 보냈다는 안도감도 들어. 물론 서울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아파트 4층까지 올라가면서 계단에서 만난 할아버지와 인사했어. 3층에 홀로 사는 할아버지는 아직 정정해. 낯선 사람에게 무뚝뚝하고 험상궂은 얼굴이지만 이웃에게 조그마한 피해도 주지 않으려 모든 걸 혼자서 잘해.
멜라니의 아파트로 처음 이사하던 날, 할아버지는 아파트 입구 흔들의자에 앉아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어. 불현듯 간혹 할아버지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궁금했지만 오래가지 않았어. 주위 둘러볼 만큼 여유롭지 않았어. 시간을 쪼개서 자학하듯 잠시라도 쉴 틈 없이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숨 쉴 수 있었어. 돈뿐만 아니라 향수병 때문이라도.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천 길 벼랑 아래로 가차 없이 추락한다고 믿었던 때니까.
생각해보면 캘리포니아에 첫 발걸음 내디딜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저녁을 만끽해. 버릇처럼 아침이 두려운 건 낯선 땅에서 살아야 남아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아직 남아 있지만. 4층까지 천천히 계단 밟으며 올라가 현관 앞에 섰을 때 남자 목소리가 들렸어. 알프레드가 아니었어. 엄습하는 불길함에 휩싸여 아주 잠시 어쩔 줄 몰라 했어. 여긴 위험한 동네니까. 도둑이 강도로 강도가 살인자로 건너뛰는 건 이 동네에서 흔한 일이야.
아득한 선조부터 시작한 약탈의 유구한 관습은 여전히 살아 있어. 따지고 보면 캘리포니아도 약탈한 땅이니까. 현관문 열고 무심코 들어갔다가 총 맞을 수도 있다는 짐작에 손잡이 잡지 못하고 잠시 망설이는데 멜라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맞아, 늦은 오후라고 해도 익숙한 공간이라 해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될 일이야. 항상 조심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현관문 열고 들어가자 멜라니와 김철수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어. 깜짝 놀랐어. 김철수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한 것도 그렇지만 김철수가 멜라니의 아파트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거든. 더구나 단둘이서. 김철수는 나를 기다렸던 건 아닌 거 같아. 인사만 잠시 하고 자기들끼리 얘기에 집중했거든. 멜라니의 마음속, 알프레드가 떠난 자리에 김철수가 들어와 앉은 걸까? 의심할 수밖에 없었어.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뭐라 참견할 일도 아니지만.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어. 멜라니와 김철수는 여전히 얘기에 열중했어.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면서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멜라니는 단호했어. 김철수는 곤혹스러워했지. 거대한 동물원이라고 단정 짓는 것도 이상해. 물론 재미있는 표현이야. 하지만 그런 표현 밑바닥에는 남한국과 북한국이 합쳐져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어. 왜 그래야 하는데? 하나의 민족이 반드시 하나의 국가여야 한다는 당위성은 애당초 없는 거야. 허구야. 프랑스도 다민족 국가야. 민족이 언제나 국가에 앞서는 건 아니야. 그런 경우는 세계사 전체를 훑어봐도 거의 없어.
멜라니는 흥분했어. 둘은 어디까지 간 걸까? 김철수를 집까지 데리고 올 정도면 이미 달콤한 사랑을 나누지 않았을까? 멜라니의 행동 양식으로 봤을 때 그러고도 남아야 하는데 외출복 차림 그대로야. 알프레드였다면 전신 거울 앞에서 생쇼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론과 현실의 차이라고 할까? 이론과 감정의 차이라고나 할까? 김철수는 한 발 뒤로 물러났어. 남한국과 북한국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어. 세계가 하나의 민족, 두 국가로 인정하고 있어.
그런데 정작 북한국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지. 대포를 쏘지 않나 핵폭탄을 만들지 않나. 두려운 거야. 세계가 인정한 국가인데 남한국이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공산국가라기보다는 독재국가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이 무너졌어. 공산주의 국가는 생명을 다했다고 봐야 옳아. 민주국가인가 독재국가인가 하는 기준만 남은 거야.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베트남도 은근슬쩍 자세 고쳐 앉는 마당에 이념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여겨? 김철수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있었어.
확신하건대 멜라니와 김철수는 친구 사이가 아니야. 한쪽이 화내면 다른 쪽은 받아주고 한쪽이 우울하면 다른 쪽이 힘 실어주는 관계야. 멜라니의 풍성한 유방을 김철수는 얼마나 탐닉했을까. 내가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독재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거야. 작은 이익을 위해 큰 이익을 외면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 입술 굳게 다물고 있던 김철수는 마침내 카운터 펀치가 필요했던 걸까, 눈빛이 짧게 빛났어.
멜라니가 거기에서 살아보지 않아서 하는 판단이야. 쿠데타는 물론이고 작은 폭동마저 꿈도 꾸지 못해. 수상한 짓을 했다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려. 흔적조차 없어진다고. 카운터 펀치라고 하기엔 부족했어. 그것만큼 찌질한 변명은 없어. 멜라니는 단호했어. 프랑스 대혁명은 얼마나 많은 피를 품고 있는지 알아? 피가 없는 저항이 있다고 여겨? 누구나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리더를 갖는 거야. 남 탓하면 정직하지 않는 거야.
논쟁의 출발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경험 많아서 할 말 있는 김철수는 주로 듣는 편이었고 평양을 관광한 멜라니는 신나는 쪽이었어. 이처럼 기묘한 불균형이 과연 논쟁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숱한 남자를 다루면서 얻은 멜라니의 솜씨가 부러웠어. 관계를 만들고 필요에 따라 너와 나 사이에 여전히 일정한 거리가 있다는 긴장감도 소금처럼 뿌려대는 능숙함이란! 김철수가 집까지 와서 소파에 앉는 것은 분명 멜라니의 1차 관문을 통과했다는 뜻이라고 봐야 하겠지?
여자가 보기에도 멜라니는 이뻐. 금발에 윤기 흐르는 매끈한 피부, 흠잡을 데 없는 늘씬한 몸매는 모든 남자가 꿈꾸는 여자야. 게다가 세상에 대한 엄청난 호기심은 지적 능력을 말해 주잖아? 남자가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마다해? 하지만 늘봄식당 여주인과 아저씨는 확실히 다르게 볼 거야. 물론 애인이라면 그다지 간섭하지 않겠지만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 어쩌면 조카 애인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지 않을까? 가족이 될 가능성조차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해. 법적으로 미국인이지만 심정적으로 여전히 북쪽 한국 사람이니까.
멜라니가 소파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자 논쟁은 쉽게 끝나버렸어. 김철수는 나를 향해 멋쩍은 웃음을 지었어. 남쪽 한국문화원에 다닌다는 사실이 김철수에게 막연한 어색함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어. 어쩌면 멜라니의 선택을 받은 터에 나에게 찝쩍거렸던 지난 일들이 쑥스러워서인지도 모르지만. 화장실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어. 알프레드처럼 김철수도 멜라니의 침대에서 자고 갈까? 궁금증보다 덜컥 겁이 났어.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어. 눈앞에서 김철수가 확실하게 멜라니의 애인이라는 걸 확인하는 게 두려웠던 걸까? 아니면 김철수 역시 멜라니의 숱한 애인 중 한 사람으로 언젠가 잊혀지는 게 두려웠던 걸까? 모르겠어. 세상엔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
76
김철수는 모르겠지만 만일 멜라니에게 대한민국 헌법 3조를 들이밀면 뭐라고 할까? 그건 너네 주장이고. 단칼에 무시하지 않을까. 맞아. 여긴 서울이 아니고 캘리포니아야. 세상의 모든 욕망을 통제하는. 멜라니의 샤워하는 물소리를 김철수는 무슨 상상 하며 듣고 있을까? 체제보다 무서운 것은 고향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헌법보다 무서운 것은 고향이라고 하지 않을까? 미안하지만 가야겠어.
멜라니와 난 친구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김철수는 알프레드가 앉았던 소파에서 일어났어. 왜 친구라고 말했을까? 왜 도망치듯 가버리는 걸까? 멜라니의 올가미에서 끝내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작별 인사도 더없이 어색하게 하고 김철수는 갔어.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놓쳐버렸다는 아쉬움이 먼저 들었어. 짐작처럼 멜라니는 수건 한 장으로 아슬하게 몸 가리고 씩씩하게 거실로 나왔어. 몸이 빛난다는 걸 믿을 수 있어? 전신 거울 앞에서 멜라니는 빛났어. 네가 오면 간다고 했거든. 멜라니는 빛났어…. 이만, 총총총….
"잘 지내고 있어?"
"좀 까칠해졌더라. 뒷걸음질 치고."
김선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티켓 두 장 내밀었다.
"박 선배도 우릴 보면 그렇게 생각할걸. 애인 없으면 후배라도 데리고 와서 봐."
"이번엔 무슨 역할인데? 혹시 알런 역을 맡았나?"
"내가 무슨…, 그냥 스텝이야. 에쿠우스는 읽기만 했지 보지 않았잖아? 읽는 거와는 완전히 딴판이니까 시간 낭비 아닐 거야."
"고맙다. 그런데 수확이 전혀 없지는 않았어. 일종의 위장 프락치가 아니었나 싶어. 말하자면 종암 경찰서에 선을 만들 필요가 있었나 봐. 이쪽 정보를 슬쩍 넘겨주고 저쪽 정보를 눈치껏 챙겨 오는 거지."
"이중 스파이 같은 거?"
"대충 그런 역할을 한 모양인데 박철수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더라. 이젠 관심도 없고."
"그날들은 빛바랜 기억이야. 추모원에 같이 간 것도 사실 살짝 후회스러워. 괜히 장단 맞춰준 것 같아서. 형도 이제 그만 놓아줘. 다 지난 일들인데 이제 와서 뭘 어쩌려구?"
김선미는 예술대 쪽으로 무리 지어 재잘거리며 걸어가는 여학생들을 보면서 핀잔처럼 말했다. 여학생들의 걸음은 우리가 가져보지 못한 가볍고 들뜬 즐거움이 가득했다. 앞산에 산벚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교문 앞 작은 공터에 최루탄 사정없이 쏘던 전경들은 이제 없었다.
"뭘 어쩌자는 게 아니야. 사는 거야 어떻게든 살기 마련이지만 그거에 떠밀려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버릴 수는 없잖아? 더구나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잔챙이들의 젊음인데."
"나도 그런 생각은 해봤는데 누구도 기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쪽이야."
"어째 장욱진스럽다? 요즘도 자주 만나냐?"
"필요할 때마다."
"필요? 수상한 말이네? 여자가 남자를 필요로 하는 때는 언제야? 몸이 고플 때야?"
"맘대로 상상해. 눈치 보지 않고 살기로 했으니까. 말 나온 김에 불러낼까? 퇴근 시간에 맞춰서."
"나야 상관없지. 시간만 널널하니까."
"근데 형은 그렇게 공부하고 싶어? 세상은 지식과 상관없이 굴러가는데?"
"캘리포니아 그녀처럼 말하네?"
"갑자기 보고 싶어지잖아. 이젠 얼굴도 희미해진 것 같아, 낡은 기억처럼."
김선미는 아련한 표정으로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내기 농구라도 하는 모양인지 땀 뻘뻘 흘리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학생들은 캘리포니아 그녀를 모를 거라는 짐작에 측은하게 보였다. 어쩌면 오히려 모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어떤 사람은 이유도 없이 깊은 상처가 되니까.
"뒤포로 갈까, 돈암동으로 갈까?"
"뒤포는 사양이다. 혹시나 아는 후배 만나면 연애한다고 소문날라."
"왜? 내가 어때서?"
"농담이야. 애들이 퇴근하고 여기까지 오겠어?"
"하긴. 암튼 가자."
앞산 산벚나무꽃은 어제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77
"통 전화를 받지 않네."
"김용덕? 출장 갔어. 엊그제 잠깐 만났는데 목포 촌놈이 미국 간다고 자랑질하더라."
장욱진은 괜스레 입맛 다시며 통유리 밖 거리를 내다보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거리는 불안한 눈빛과 서두르는 걸음이 가득한 암갈색 짙은 프랑스혁명 전야의 거리를 무심하게 그린 유화처럼 더없이 우울하게 보였을 터이지만 아직 남은 햇살 때문인지 가볍고 활기차게 보였다.
"미국 갈 거면 나한테 연락이나 하지, 좀 섭섭하네."
김선미는 마음이 상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커피는 조금씩 식고 있었다.
"로밍하겠지. 그리고 엘에이 한인타운에서 늘봄식당 찾기가 어렵겠어?"
장욱진은 심드렁하게 말하고선 무료한 듯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침마다 책상에 쌓이는 일거리도 어느덧 익숙해진 전형적인 직장인의 나른한 저녁 시간이 몸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가벼운 긴장도 풀린 탓일까, 기지개는 한없이 길어졌다. 눈빛만 봐도 대충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정도이니 얼굴 마주하고 앉아 있어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낯섦이 없어도 생활은 불편하지 않으니 시간은 있으나 없으나 신경조차 쓰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흐린 배경이 되어버린 걸까, 나는 장욱진에게서 직장인 특유의 냄새를 맡았다. 가난하지 않은 생활을 위해 꿈 따위는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책상에 쌓이는 일거리를 묵묵히 감당하면서 인생 별 거 있냐는 식으로 대충 짓뭉개면서 사는.
"추모관은 잘 다녀왔고? 죽은 놈만 모든 걸 잊을 수 있지…."
장욱진은 말끝을 흐렸다. 깊은 우물 속에서 건져 올리는 두레박처럼 이제는 아득한 기억의 저편을 떠올리는 듯하다가도 지난 일들은 이미 지난 일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단단한 눈빛으로 허공을 쏘아보았다. 지워도 지워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상처는 외면하면 과연 보이지 않는 걸까.
"선미한테 얼추 얘기 들었는데 일기가 있다고?"
"여동생이 말하길 일기가 아니라고 하더라. 낙서라고 메모라고 하던데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어. 고민해보겠다고 하길래 알았다고 했지."
"일기든 낙서든 손에 넣어서 뭘 하려고? 쓸데없는 짓이다."
"나야 남아도는 게 시간뿐이잖아?"
"잘도 갖다 붙인다. 내가 널 모르냐?"
"아무튼."
침묵 사이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가 잔잔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정작 하고 싶은 말들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잔인한 사실을 저마다 알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화석처럼 굳어진 기억을 애써 꺼내 나름대로 정리한 지난날들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엉망이 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것도, 예스터데이는 추억으로 남아야지 미련이나 안타까움으로 포장되어선 안 된다는 것도.
"김용덕이 캘리포니아 그녀를 만날 것 같아? 잠깐 봤다며?"
"너라면 어쩌겠냐?"
"얼굴이라도 한번 보겠지. 낯선 땅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기쁨이야 얼마나 마음 든든해."
"용덕이라고 다르겠냐?"
"하긴."
바닥에 몇 방울 남은 커피까지 모조리 입에 털어 넣고 또 말이 없어졌다. 시간은 옆구리를 치고 어김없이 지나갔다. 김선미가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장욱진은 그런 얼굴을 읽었다.
"왜? 아직도 연락하지 않고 출장 갔다고 삐졌냐? 바쁘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게 아니라 좀 다혈질이잖아. 괜히 늘봄식당에 가서 무적 해병 어쩌고 깽판 치지 않을까 걱정되네."
"남의 동네까지 가서 그럴 리가 있겠어? 어린애도 아니고. 깽판 치다가 진짜 갱들 만나면 어떡하려고?"
"하긴."
예스터데이가 이어지고 있었다. 통유리 밖 거리에 여전히 햇살들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돈암동의 시간은 아주 오래된 느낌으로 다가왔다, 만지면 금방이라고 부서질 듯. 서울에 갇힌 김성칠(金聖七) 선생이 거리 어디에선가 여전히 걷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짐작. 허리 굽혀 손 뻗으면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일보의 호외도 쉽게 집어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한 놈은 연극판 기웃거리고 한 놈은 학생이니 거두어 먹이려면 부지런히 벌어야지 않겠냐? 나가자. 이 동네 맛집도 많다던데."
장욱진은 의자를 뒤로 힘껏 밀어내며 일어섰다. 나와와 김선미는 오리 새끼처럼 뒤따라 일어나 오른발 왼발 차례로 흉내 내며 카페를 나섰다. 거리는 초저녁으로 막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