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그녀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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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리로 가는 길은 고통스러웠다. 작은 부동산 사무실에 다니던 여동생은 아이들이 좋아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며 길을 알려주었다. 버스가 당고개를 넘자 아득한 과거로 빨려드는 듯한 기묘한 기분에 빠져 한동안 허우적거렸다. 겨우 고개 하나인데 이편과 저편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거칠고 사나운 욕망이 사람을 삼켜버린 이편과 달리 저편은 모든 것이 느린, 느려도 대자연의 질서에 조금도 어긋남 없이 순응하는 땅, 바람이 열린 차창으로 서슴없이 들어왔다. 낡은 버스의 끈적한 숱한 땀 냄새가 축사에서 실려 온 익숙하지 않은 바람에 쉽게 밀려났다. 버스는 가볍게 덜컹거렸고 마음은 살아 있다는 아픔을 자꾸만 풀어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단단한 돌부리가 되어 걷는 걸음 주춤거리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령 뒤포 지붕 낮은 술집에서 마주쳤을 때 무시와 경멸의 눈초리가 얼마나 악의적이었나, 교문을 사이에 두고 전경들과 공방전 한창일 때 멀찌감치 서서 물끄러미 이쪽 바라보는 인철수를 비웃던 웃음은 또 얼마나 솜털보다 가벼웠나…, 버스는 들판을 가로질러 청학리에 들어섰다. 여동생의 말대로 두 번째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조금 떨어진 아파트를 향해 걸었다. 아파트 상가 단지 한쪽에 유치원이 있었다. 아기자기 꾸며놓은 유치원 마당에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세상과 아무 상관 없는 해맑은 웃음이 더없이 부러웠다.
"오빠 글씨가 유일하게 남은 공책인데…, 내가 읽어봐도 별 의미 없는 낙서인데…, 꺼내오긴 했지만 돌려줄 거죠?"
여동생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아이들의 웃음이 여동생 등 뒤에서 꽃처럼 피어났다.
"그럼요."
"나도 이젠 아주 간혹 드문드문 생각해요. 어쩌면 곧 잊혀질 거예요. 기억해주니 고맙긴 하지만 오빠도 누군가의 상처로 남길 원하진 않을 거예요…."
여동생과 헤어져 서울로 돌아가는 길도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비켜서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는 강박감에 마음은 금세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장욱진처럼 안간힘으로 뒤돌아보지 않는 용기는 없었다, 절대 멈추지 않는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시간들 속에 파묻혀 과거는 당연히 잊혀져야 한다고 믿을 용기는 없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날들이라 해도 오늘을 있게 한 날들이므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노트를 펼쳤다. 간략한 메모와 복잡한 감정이 실린 짧은 문장들이 나타났다. '아버지는 좋은 곳으로 갔다, 잊는다'라거나 '다음 학기의 장학금을 위하여' 등등이 주인 없는 신발처럼 눈에 들어왔다. 몇몇 사람들이 실명으로 나타났고 곧 사라졌다. 버스는 쉬지 않고 흔들렸다. 단숨에 수십 갈피가 넘어갔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익명들이 등장했다. 여동생이 읽었더라고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문장들, 들숨과 날숨이 가늘어졌다.
K는 눈부시다. 명랑하다. 중앙도서관 열람실에서 오후를 같이 보냈다.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타인을 위해 친절해지는 자신이 놀랍다. 내 속에 그런 모습이 있다는 발견은 확실히 의외다. K는 나를 바꾸고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책을 읽으면서도 옆에서 숨 쉬고 있는 K를 순간순간 곁눈질한다, 본능이다. K가 오른손으로 자기 콧등을 살짝 문지를 때마다 온몸이 짜릿하다. 왜일까?
P는 혁명의 필요성을 얘기했고 K는 비웃었다. 변혁도 어려운데 혁명이라니! P의 생각을 K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기말을 오픈북 시험으로 치렀다. 몇 주를 밑줄까지 꼼꼼하게 치며 주구장창 준비했던 학우들이 탄식했다. K의 말이 맞았다. 교과서는 단지 참고사항에 지나지 않는다는 믿음. 그것을 확인하는 시험이라는 걸 대부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책에서 답안지로 글자를 옮기는 어리석음. K가 거대한 벽처럼 느껴진다.
버스는 변함없이 흔들렸고 가쁜 숨 연거푸 몰아쉬면서 내뱉으면서 당고개를 넘고 있었다. K가 캘리포니아 그녀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P는 아마도 박철수인 듯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캘리포니아 그녀는 곧잘 중앙도서관 열람실에서 인철수와 함께 있곤 했었다. 버스에서 내려 당고개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매캐한 서울 공기가 엄습했다. 사람들은 허둥지둥 욕망을 향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그동안 결코 알 수 없었던 인철수가 천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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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의 밤은 음흉했다. K는 침대에 누워 마치 K가 아닌 듯 정신을 모텔 밖 세상에 두고 온 것처럼…. 불과 며칠 전이지만 도무지 자세한 기억은 없다. K와 P의 논쟁을 알고 있다. 네이밍 혹은 이름 짓기를 수구 기득권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나도 인정한다. 너희들은 주사파야, 너희들은 자주파야. 짭새가 도표까지 그려가며 엉터리 브리핑을 하면 수구 기득권은 얼씨구나 좋구나, 지들 마음대로 전혀 상관없는 것들도 마치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덧붙여 가며 신문 기사를 쏟아낸다. 포장의 달인이다. 프로파간다의 달인이다.
K의 몸은 이미 뜨거워졌다. 그런데 왜 거울이 천장에도 있는 걸까. 모텔의 방도 음흉했다. 그러나 수구 기득권만큼 음흉한 것이 또 있을까. 주사파와 자주파라는 범주를 만들고 배경으로 한국전쟁을 펼쳐놓는다. 식민지 정부로부터 온갖 특혜와 정치적 유산까지 꼼꼼하게 챙긴 수구 기득권은 식민지 트라우마를 지우기 위해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한다. 절대 밑지지 않는 장사다. K의 몸은 뜨거웠다. 우리는 아득한 날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처럼 침대에서 쉬지 않고 움직였다. 달콤한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움직임들….
현사반(현대사상연구반)과 탈반(탈춤반)과 문창반(문예창작반)은 다르다. 나와 P와 K가 다른 것처럼.
P는 용감하다. 하지만 과격하다. 전쟁 중에도 대화를 한다는데 막무가내다. 뒤포에서 K는 비웃었다. 어쩌면 P는 K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용감무쌍하며 지칠 줄 모르는 용기와 투철한 신념의 소유자인지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동지이자 애인으로 만들기 위한 헛수고들. P는 K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람은 모두 변해. K가 초등학생 달래듯 말했다. 사실 현사반과 탈반은 약간의 일사불란함이 있다. 문창반은 다르다.
일사불란은 고사하고 모래알처럼 쉽게 흩어진다. 그러나 현사반이나 탈반은 모래알이 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지만 문창반은 정반대다. 왜 그럴까? K와 나는 캠퍼스 안에서 철저하게 친구이다. 속사정 모르는 P가 가끔 안 됐다는 생각. K와 사귀기 위해서 신념보다 취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정작 중요한 것은 거대한 것이 아니라 작고 사소한 것이 삶을 좌우한다는 사실.
똘이장군은 역시 장군이다. 싸움에서 이길 생각만 한다. 옮고 그름이라든가 선과 악, 혹은 민족이나 역사, 존재에 대한 고찰 따위는 완전히 없다. 누구나 자신이 하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것조차 없다. 오로지 승리. 그 승리가 당장은 만족스럽고 일종의 성취감마저 줄 수 있지만 결국 수구 기득권을 더욱 탄탄하게 만드는 행위인지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외면한다. 자신이 마치 수구 기득권에 속하는 것처럼. 냉정하게 보면 똘이장군도 결국 식민지 시절 말단 조선인 순사에 지나지 않는 것을. 하긴 그것도 기득권이라면 기득권.
K가 집까지 찾아왔다. 청학리 안쪽 깊은 골짜기 금방이라도 무너질 집에. 처음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가난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지만 K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규정짓고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거리라는 걸 K는 알고 있었다. 의정부 교도소에 다녀왔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문도 없는 어두운 방에서 K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학교 홍보 책자에서 보았던 메이퀸의 웃음은 없었다.
반쯤 열린 방문 너머 마당을 바라보는 눈빛은 모텔 음흉한 방에서 천장에 달라붙은 거울을 바라볼 때와 또 달랐다. 여기 지금 있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저쪽, 그보다 더 먼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빛.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세월이 가도 절대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몸짓, 움직임이 늦은 햇살 가득한 마당과 달리 어두침침한 방 안에서 부드럽게 때론 거칠게 쏟아졌다. 아! K가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나는 귀신에 홀린 듯 더욱 집요해졌다. K가 철수야, 낮게 말했지만 P인지 나인지 알 수 없었다.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더욱 힘껏 허리를 움직이면서 도저히 기억할 수 없는 아득한 옛날, 벌거숭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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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키 마사오의 나라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해봤어? P가 말했다. 뒤포였다. 누가 현사반 아니랄까 P는 곧잘 수상한 말들을 늘어놓곤 했다. 봉산 탈춤을 추고 하회 탈춤을 배우니까 한글로 수업을 하니까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 끔찍할 정도로 식민지 정부의 정치적 경제적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마사오의 나라…,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은 뭐가 다를까? P는 취했다.
기득권의 카르텔을 깨부수는 독립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렇지 K야? P는 울고 있었다. 취해서 우는 것인지 나라 걱정에 우는 것인지 혹은 평생 몰라도 좋을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알아버려 후회하는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이명준의 죽음은 심청이가 인당수에 풍덩 뛰어내리는 것만큼 삶의 반전을 가져오지 않아. 그래서 씁쓸하지. K가 말했다. 인당수에 빠진다고 하루아침에 왕비가 되는 기막힌 행운 따위는 없어. 적어도 독립운동은 그렇게 할 수 없어. P는 불끈 쥔 주먹으로 눈물 훔쳤다. 독립운동이 통일운동이라거나 이명준이나 심청이니 하는 것들이 더없이 생소했다.
교문을 중심으로 사방이 전쟁터였다. 최루탄과 지랄탄을, 화염병과 짱돌을 주고받으며 학교는 난장판이 되었다. 중앙도서관은 텅 비고 창문 뚫고 강의실까지 날아와 터지는 최루탄은 지식보다 폭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몸으로 깨닫게 했다. 기득권의 카르텔은 위대했다. 교내에 침투한 불순분자를 색출해야 한다는 논조의 신문 기사가 떴고 위수령이 발동될 거라는 위험한 소문이 떠돌았다.
똘이장군을 만났다. 문창반은 K가 있기도 하지만 개성이 강해 조직화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터라 뺐다.
전에는 등교할 때만 하더니 이젠 하교할 때도 전경들이 가방 검사를 했다. 여학우들의 가방도 예외 없었다. 콘돔을 엄청 많이 수거했다는 소문. 강철서신이나 화염병이 가방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아랫도리도 감시하는 위대함이란!
보안에 목숨을 건 똘이장군이 어쩐 일인지 낯선 남자와 같이 있었다. 동료 짭새인 줄 알았는데 나와 비슷한 연배였다. 성은 허 씨고 스키입니다. 스스럼없이 자신을 소개하는 그도 프락치였다. 설마 본명은 아니죠? 프락치가 본명을 쓸 리는 없었다. 역시나 별명. 허스키는 내게서 동질감을 느껴보려는 듯 곧잘 웃었지만 왠지 징그러웠다.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름이 아닐까, 아버지. 떠나는 여자 끝내 붙잡지 못한 아버지. 젖동냥까지는 아니지만 동생 분유 살 돈을 위해 더없이 비굴해졌던 아버지. 야반도주한 여자. 마을로 넘어오는 낮은 고갯길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아버지. 그날 깊은 저녁 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아버지를 폭행했던 놈을 짭새는 절대 잡지 않았다.
교문에서 당당히 영장도 없이 가방 검사는 하면서도 살인범은 잡지 않았다. 이게 현실이다. 훌쩍 커버린 동생이 유치원 교사를 하고 싶다는 열망도 접은 채 작은 부동산 회사에 들어간 것도 내 죄다. 아버지 노릇을 하자니 어쩔 수 없다는 걸 뻔히 안다. 시쳇말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은연중에 심으려고 희생을 택했는지 모르겠지만 과연 내가? 법학과이니 사법고시쯤은 당연히 붙을 거라 믿는 걸까? 어느 동네 것을 줄곧 옮겨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법도 수상하다. P의 말대로 사회가 작동하는 시스템은 식민지 무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 한국인의 탈을 쓴 마사오의 후예들.
몸살인가? 온종일 아무 짓도 하지 못했다. 몸은 꿈쩍도 할 수 없는데 정신은 날개라도 달았는지 제멋대로 움직였다. 위가 마비되었는지 허기도 없다. 당고개 너머 세상이 아득하다. 그 세상에서 살았다는 게 아주 오래된 옛날 같기만 하다. P와 K, 탈반 아이들과 코흘리개 현사반, 문창반 녀석들도 무슨 꿈에서나 만났던 것 같다.
끈을 놓지 말아야 하는데 판검사는 되지 못하더라도 끈을 놓아선 안 되는 데 도무지 힘이 나지 않는다. 몸이 불편하니 모든 게 헛것 같다. 부질없는 것 같다. 그래도 가만히 K를 떠올리면 이래선 안 된다는, 죽은 듯이 누워 있어서만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슬픈 아버지, 가여운 아버지,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 야속한 아버지…, 나는 제대로 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