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그녀 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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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아귀 맞지 않는 삐걱거림은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몰라. 알면서도 짐짓 서로 모른 척하며 우리는 살아왔으니.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념적이지 않다'와 '이념적이다'의 충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농태기라고 하는데 끝내 줍니다. 여주인이 만든 술을 한 잔 받고서부터 김용덕은 기분이 상했어. 눈치 없이 김철수는 기고만장했지. 옥수수가 주원료인데 카사바로 만든 소주보다 훨씬 낫다고 했어.
이미 삐딱해진 김용덕은 소주 예찬론을 꺼냈고 김철수는 피식피식 웃었어. 소주든 농태기든 뭐가 중요해? 그냥 술일 뿐이잖아? 남자들은 정말 이상해. 비실비실한 군인들로 적화통일이 가능하겠냐고 도발했어, 느닷없이 김용덕이. 레드 콤플렉스야. 무적 해병은 남쪽 한국에서나 통하지 캘리포니아에서 미국 사람 김철수에게 먹혀들 거라고 여겼을까? 얼핏 보면 싸움은 온갖 종류의 무기로 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정신력으로 하는 거라며 김철수는 쐐기를 박았어.
상처 많은 땅임에도 김철수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고향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랄까? 멜라니는 김용덕과 김철수의 팽팽한 긴장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야. 멜라니 입장에서 보면 영락없이 도토리 키재기에 지나지 않아. 사진전만 해도 그래, 비겁한 짓이야. 김철수는 단호했어. 잊지 않고 있다는 거지.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야. 김용덕도 지지 않았어. 때린 사람은 발 뻗고 자지만 맞은 사람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덧붙였어. 피해자 코스프레야. 김철수는 빈정거렸어. 서로에게 가해자니 피해자니 손가락질은 아무 의미도 소용도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거기까지 가려면 우리는 얼마나 먼 길을 가야 하는 걸까. 멜라니가 김철수의 옆구리를 찔렀어. 그때부터 김용덕은 무적 해병을 줄기차게 끄집어냈고 김철수는 입을 다물었지. 한참 후에야 녀석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걸 알고서 머쓱 해했지. 비로소 자신이 캘리포니아에 있다는 걸 깨달았던 걸까, 급격하게 의기소침해졌어. 측은하다는 마음도 잠시 들었지만 딱 거기까지야. 우리는 저마다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이념 과잉의 남쪽 한국에서만 살아온 녀석에게 캘리포니아는 너무 낯선 땅이긴 해. 농태기는 독했어. 이만, 총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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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P로 보이니? 그 정도까지 아니야. K는 웃었다. 안면인식장애.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K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해성사하듯 말할 때 나는 장난기 발동했지만 캘리포니아로 간다는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미쳤어?
닦달해보지만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나에겐 K를 붙잡아 둘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절망했고 자학을 일삼았다. 시간이 갈수록 이별을 정해진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욕심도 새롭게 돋아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과 판단일 뿐이다. P가 출소했다.
나름 의미 있는 일이라 믿었는데 학우들의 눈총이 따갑다. 게다가 똘이장군도 눈치챈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능글맞게 모른 척한다. 이 바닥이 원래 속이고 속아주는 척하며 서로 이용해 먹는 곳이 아닌가. P는 K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뒤포에서 합석했다. P는 일부러 교도소 면회 왔던 K의 모습을 자꾸만 얘기했다. 질투라도 느껴보라는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K는 캘리포니아로 간다는 일정을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K는 집으로 찾아온 이틀 뒤에 한국을 떠났다. 모든 것이 잔인한 과거가 됐다. 잊혀지든 기억하든 어쩔 수 없이 나는 깊은 늪에 빠져버렸다.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깊어지는 늪, 수렁.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만났던 건 아닐까? 애당초 있지도 않은 사랑을 있는 것처럼 스스로 속여가며. 오로지 필요만 있을 뿐이다.
필요가 없어졌을 때 이별은 너무나 당연하고 감정은 폐기 처분된다. 감정은 소비하는 것이지 저축하는 게 아니다. 상대에게 소비할 감정이 없어졌을 때 사람은 누구나 잔인해진다. 어쩌면 어느 순간에 나도 K에게 잔인하게 굴었는지도 모른다. 상처는 언제나 주고받는 것이니까.
여동생이 다니는 작은 부동산 회사 앞에서 나는 한동안 눈물을 삼켰다.
총학으로 들어온 구인의뢰. 면접을 봤다. 학교 선배라는 국장은 마냥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지만 사회생활 마르고 닳도록 한 이력을 숨길 수 없었다. 경험이 아니다, 이력이다! K가 떠난 후 몸에서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에 곧잘 휩쓸려 정신 놓는 경우가 많다. 어느 순간 정신줄 잡으면 생판 낯선 거리를 걷고 있는 자신이 몽유병이라도 앓는 것처럼 여기다가도 금세 잊어버려 다시 걷는다. 그렇다. 어떤 상처는 끝내 아물지 않는다.
사람이 바뀐다고 정치가 달라질까? 얼굴마담이 바뀐다고 유구한 정치 관습이 바뀔까? 머릿속에 단단하게 뿌리내린. 신문사라고 하지만 일간지가 아니라 주간지에다 전문지여서 지명도는 거의 없는 편이다. 그래도 재정은 튼튼하다. 변호사 협회지니까. 시간이 날 때마다 들쑥날쑥 수업에 들어가지만 취업 증명서를 제출하고서부터 좀 뜸해졌다. 탈반에 가끔 가서 춤도 추지만 후배들과 얘기하다 보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지나온 길에 왜 자꾸 돌아가려고 하는 걸까. K를 잊지 못하는 걸까.
이제 와 다시 읽어보니 왜 이런 걸 썼을까? 벌써 몇 년이 지났나. 잊을 것은 이미 기억에조차 없고 습관처럼 하루하루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 무감각하다. 뭔가 어제와는 다른 오늘이거니 하며 살아도 영락없이 오늘은 어제가 되어버린다. 학생 때도 하지 않았던 판례 샅샅이 살피는 일도 이젠 시큰둥하고 멍하니 창밖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P는 나와 다르게 열심히 사는 모양이다.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여전히 노조 결성을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데 누구에게나 클라이맥스는 있는 법이다. 지나고 나야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상의 편리에 발을 들어 놓이면 빠져나가기 어렵다. 세상이 훨씬 단순해지고 간단해지는 마법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 월급의 달콤함과 자동차의 편리함, 유혹은 잔인하다.
이따위 기록이 무슨 소용일까. K도 이미 지난 사람이다. 문창반 녀석들과 편지 왕래는 하는 모양인데 내게는 철저히 침묵이다. 잊어가는 중이거나 잊었다는 거겠지. 장욱진은 여전히 유쾌했지만 K 얘기를 하면서 눈빛이 빛나지 않았다. 녀석에게도 K는 잊혀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조셉이나 허쯔의 이름들이 낯설다. 그보다 더 낯선 땅에서 낯설게 살아가는 K의 얼굴은 이제 희미하다. 과연 한때 내 여자이기나 했을까. 항상 오늘은 어제가 되어 잊히는 것, 어제의 무덤 속에 갇혀 사는 건 미친 짓! 그러나 무덤은 언제나 마음의 언덕 양지바른 곳에 있지 않은가, 눈길 고스란히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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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난 얘기지만 P를 왜 재물로 삼았어? 장욱진의 물음에 한순간 몸이 얼었다. 총학 차원의 결정이었다고 해도 결국 행동 대장 역할을 한 터라 침묵했다. 그날의 결정은 사실 내 손 바깥에서 움직였다. 아무리 피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해도 동지를 헌신짝처럼 필요에 따라 팽개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다시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나는 다르게 움직였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역시 비겁한 일은 비겁한 거다.
프락치라는 손가락질은 편안한 직장으로 이어졌으나 P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역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의 행동이 누군가의 삶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뒤틀어놓는다는 생각은 그때는 하지 못했다. 개인이 조직에 아무리 도전한다 해도 결국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요즘 알게 되었지만. 하루아침에 사무실 책상이 사라져 버린 사람들이 어디 한두 명인가?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한다는 총학생회장은 조직의 생리를 이미 꿰뚫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외근한다. 주로 법원을 들락거리는 데 쓸만한 기삿거리를 찾아 헤매는 거다. 이혼 앞둔 부부 사이인지 싸운다. 처음에는 신기한 동물 구경하듯이 바라보았으나 나중에는 심드렁해졌다. 외부 자극에 둔감해진다. 타인에게 무뎌지면 자신에게도 무뎌지는 게 아닐까?
요즘 일상이 주는 안도감에 너무 빠져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동과 생각들. 내가 나를 사는 것인지 조직이 나를 사는 것인지 모호한. 이런 식으로 꼰대가 되는 걸까. 소문에 따르면 K가 한국에 잠시 들어왔다고 하는데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K에게 나는 추억이거나 망각의 대상일지도.
객사의 유구한 가족사. 아버지와 할아버지. 이산가족 찾기에서 끝내 찾을 수 없었으니 아마도 어느 능선 혹은 골짜기에서 객사.
정기자와 모델까지 갔지만 결국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얼굴 발그레 붉은 정기자는 모텔방에 들어서자마자 거침없이 달려들어 키스를 퍼붓더니 훌러덩 옷을 벗었다. 살냄새가 짙었다. 정기자는 순식간에 벌거숭이가 되더니 곧이어 내 옷도 벗겼다. 샤워 부스에 마주 서 있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오늘 드디어 결국 끝장을 내야 한다고 다짐했을까? 비누 움켜쥔 정기자의 손길이 몸 구석구석을 더듬을 때도 여전히 취기는 가시지 않아 제정신이 아니었다. 설령 제정신이었다고 해도 꼼짝달싹 못 했을 거다. 지난번처럼 또 도망가면 다신 못 볼 줄 알아요! 정기자는 욕실 밖으로 나를 밀어내며 협박했다. 물기도 닦지 않고 침대 모서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K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첫 경험은 강렬했지만 악명 높은 감옥이었다. 욕실에서 들리는 바닥으로 곧장 솟구치듯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들, 손바닥만 한 창문 밖으로 어둠이 단단하게 쌓이고 있었다. 정기자가 싫은 건 아니었다. 숱한 남자들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았던 정기자이지 않은가. 모텔방 천장에 유리 없는 게 신기했다. 얼마나 많은 남자와 여자가 침대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냈을까. 그들의 그토록 강렬한 뜨거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어느 사이 주섬주섬 옷을 서둘러 챙겨 입고 있었다. 욕실의 물소리, K가 현관문 열고 모텔방을 빠져나갔다. 뒤따라 서둘러 나는 여전히 취기 가라앉지 않은 정신으로 길고 좁은 복도를 빠져나왔다. 욕망은 더 이상 내게 없었다.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잡지사 '돌싱즈'에 갈 수밖에 없었다. 모텔 사건이 있은 후 정기자는 전화도 하지 않았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서도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처럼 경계심 잔뜩 곧추세우고 입술 굳게 다물었다.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서둘러 일을 마치고 잡지사를 빠져나왔다. 물론 정기자는 자신의 다짐처럼 행동했다.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그 뒤로 일 때문에 몇 번 만났지만 철저하게 오해하기 시작했고 나는 객사의 유구한 가족사처럼 K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사무적인 필요에 따라 건조한 말들만 주고받으면서 지낸다. 물론 여성잡지 '돌싱즈' 사무실에 파다하게 퍼진 나에 관한 흉흉한 소문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어쩌면 프락치 손가락질보다 더 잔인하지만 해명하거나 설명하는 따위는 하지 않기로,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진실을 풀어놓기 위해 정기자와 모텔방 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살아내야 하는 하루가 또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