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에 실린 기사는 처리됐을 겁니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앞으로 기획물 시리즈에서 회사 이름이 나갈 일도 없을 것이고요.”
“데스크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렇게 됐을 거야. 그리고, 노파심 때문에 하는 말인데, 입이 무거워야 하네. 비단 이번 일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무림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만, 자신들의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믿거든.”
본부장은 다짐이라도 받아내려는 말투였다.
“알겠습니다.”
화성 물류센터 파트장에게 했듯이 삐딱하게 나갈 수 없었다. 본부장이 회장 늙은이와 각별한 사이라는, 데스크와 국민의 종이 나눈 대화가 떠올라서였다. 창고지기를 하면서 온몸으로 절실하게 느꼈다. 능력 위주로 직장생활을 하려는 고리타분한 고집은 서울과 화성을 버스로 출퇴근하는 숱한 날들 속에 파묻어버렸다. 어차피 직장생활은 줄서기였다. 무엇보다 본부장은 나를 창고지기 위치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팀장으로 승진까지 시켜준 터였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물론, 그 자리에 들은 얘기들도 침묵해야 하네. 친분을 쌓는 게 중요하니.”
“알겠습니다.”
“가서, 일 보게.”
“네.”
나는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본부장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장실을 나와 전략기획팀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에 익은 뒷모습을 보았다. 화성 물류센터 파트장이었다. 본사에서 얼굴을 본 게, 한번은 우연이라며 그냥 넘어갈 수 있으나, 벌써 네 번째였다. 파트장은 총괄영업장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수상했다. 파트장의 비리와 총괄영업장이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게 아닐까? 의혹이 일었지만, 지금 당장은 파헤쳐보고 싶을 만큼 생각의 여유는 없었다. 제부도에서 대물낚시 가게를 한다는 전임 파트장을 만나면 어느 정도 뒷정보를 캐낼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장 팀장님! 계장님이 찾으시던데요?”
기획실로 돌아가자, 깻잎머리가 말했다.
“무슨 일로 찾으시는데?”
나는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말씀하시지 않던데요? 자리에 없냐고 물어보곤 바로 끊었어요.”
깻잎머리는 눈망울을 초롱초롱하게 떠서 나를 보며 말했다. 깻잎머리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짐작이지만, 황이 닮은꼴 조 팀장을 바라보던 눈빛과 닮지 않았나? 사회 초년생 때부터 권력에 민감하면 그다음은 볼 것도 없었다. 줄서기에 열을 올릴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들만 믿게 될 터였다. 황이 그러지 않은가.
“장 팀장이 예전부터 계장님의 해결사였다면서요?”
볼펜이 끼어들었다.
“아무나 해결사겠어? 유능하시니까.”
안경이 맞장구쳤다.
“해결사는 무슨…, 애로사항을 몇 번 손봐준 것뿐인데.”
차량 부서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불독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 넘겨짚었다. 내 앞에서 맹세까지는 아니더라도 단단히 다짐했지만, 다혈질 성질이 어디 가나, 싶었다. 확실한 것은 계장을 만나봐야 알 수 있었다.
“애로사항을 손봐주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장 팀장님이니까, 손봐준다고 말하는 거지.”
안경과 볼펜은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놓고 듣기 좋은 소리만 지껄이는 것 같아서, 볼펜과 안경을 향해 가볍게 인상 쓰고 기획실을 나섰다. 볼펜과 안경이 내 사람이 되었다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기획실 후배였던 박 주임과 황을 보더라도 안심할 수 없었다. 닮은꼴 조 팀장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자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에 나를 저성과자로 거침없이 내몰지 않았나. 물론, 그전에는 신문사로 이직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신입이 타켓이었지만. 당시를 생각하면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계장은 차량 부서 사무실에 혼자 있었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살피면서, 독수리 타법으로 운행일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찾으셨다고요?”
사무실 안에서도 차량 부서의 독특한 냄새가 났다. 윤활유 냄새이거나, 쇳내 같기도 했다. 아니면 그 둘을 알 수 없는 비율로 뒤섞은 냄새 같기도 했다.
“바쁜 모양이야? 찾을 때마다 자리에 없어?”
계장은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부장의 주의가 아니더라도, 계장에게 북악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무림의 세계에서 보자면, 계장은 보이지도 않는 하찮은 존재였다. 당연히,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좀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으셨나요?”
내 물음에 계장은 창문 밖을 살폈다. 주차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보다 장 팀장이 더 잘 알 것 같아서 불렀어. 의견을 좀 들어보려고.”
“무슨…?”
“자네 친구, 불독 말이야. 본부장을 담당하는 기사가 갑자기 그만둔다고 해서, 그쪽으로 옮길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당연히, 본부장이 불독을 마음에 들어 해야 하겠지만.”
“글쎄요.”
계장은 사내 동향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의심 없이, 내가 본부장 쪽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운전은 곧잘 하고, 비위도 이럭저럭 잘 맞추는 모양이야. 차량 부서에 와서도 입이 무거워. 총괄영업장의 성질이 개지랄이라는 거, 다들 아는데도 입술을 꽉 다물고 있더라니까. 기특해.”
“계장님이 그렇게 판단했으면, 그렇게 하시죠?”
“문제가 있어. 총괄영업장과 본부장이 사이가 좋지 않잖아? 본부장이 불독을 삐딱하게 볼 수도 있으니까. 총괄영업장이 보낸 첩자로 의심할 가능성이 높아. 중간에서 나만 곤란해지잖아?”
“금시초문인데요? 영업장과 본부장이 껄끄러운 관계예요? 첩자라고 할 만큼?”
“몰랐어? 아, 그때, 화성에 있었지. 장 팀장이 없을 때, 총괄영업장과 본부장이 대판 붙었어. 얘기하자면 길어. 엊그제 들어온 기사가 있긴 한데, 처음부터 대뜸 임원을 담당하는 기사로 앉힐 수도 없고…, 난감해.”
계장은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입술을 삐죽 내미는 특유의 표정을 지었다. 이마의 주름살이 고랑처럼 깊어졌다. 고민할 만도 했다. 임원의 출퇴근을 방해하는 꼴이어서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게 뻔하고, 급기야 근무 태만으로 몰릴 수 있었다.
“다른 임원들을 담당하는 기사들은 자리를 옮기는 걸 싫어하나 보죠?”
“당연하지. 기사도 기사지만, 임원이 싫어하잖아? 새로운 기사면 임원도 기사 얼굴에 적응해야 하고. 다행히 총괄영업장은 괄괄해서 개의치 않게 생각하지만, 문제는 본부장이야. 경계심이 워낙 유별나잖아? 이 일을 대체 어쩐다냐?”
계장은 한숨까지 내쉬었다.
“불독이 들어오면 내가 본부장님한테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키면 어떨까요?”
“그렇게 해주겠어? 본부장에게 장 팀장이 말을 잘해주면 나야 오케이지.”
계장은 은근히 바라던 일이라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본부장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스럽긴 해도, 나를 무림의 세계에 데뷔시켰다고 여기는 만큼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장 팀장이 차량 부서의 일까지 신경 쓰나? 그런 말이 나올지도 몰랐다. 더구나 친구라고 한다면 경계심 많은 본부장이 나에게서 신뢰감을 거두어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턱대고 나설 일이 아니었다.
“계장님. 생각해보니까, 내가 나서면 일이 꼬일 수도 있겠어요. 먼저 계장님이 본부장님을 만나 담당 기사가 퇴사하게 되어서 불독으로 교체한다고 먼저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럴까? 장 팀장이 차량 부서 책임자도 아닌데, 괜히 나서면 나만 우스운 꼴이 될 수도 있겠어. 그 생각을 미처 못 했네.”
“본부장님께 보고할 것도 있으니까, 기회를 봐서 살짝 얘기해보죠. 계장님은 오후 늦게 올라오세요. 전 점심시간 지난 다음에 올라갈 테니까요.”
“그럴까? 본부장실에 다녀온 다음에 전화 줘.”
“알겠습니다.”
계장과 헤어져 전략기획팀으로 돌아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깻잎머리가 나를 쏘아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뒷덜미에 싸한 느낌이 몰려왔다. 개인적인 호감을 눈치챘지만, 털어놓을까, 걱정이 앞섰다. 다른 장소도 아니고, 사무실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면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팀장이라는 허울을 보고 눈에 콩깍지가 씌어 있으나, 고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손바닥 뒤집듯 없던 일로 얼굴색부터 바뀔 터였다. 그녀는 엉덩이를 흔들면서 내 책상까지 쪼르르 따라왔다. 불만을 입안 가득 머금고 있었다.
“왜?”
나는 일부러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에 들은 얘기인데, 뭘 물어봐도 돼요?”
“뭐든.”
의자에 앉아 모니터 화면으로 신문사 홈페이지에 들어가며 말했다.
“얼마 전에, 국밥집에 갔었죠?”
깻잎머리는 당돌하게도 따지는 목소리였다. 황이 신경까지 써서 회사와 멀리 떨어진 곳을 약속 장소로 했는데, 어떻게 소문이 돌았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국밥집? 아마도 갔겠지. 국밥을 좋아하니까.”
홈페이지 기사를 읽으며 무심하게 말하면서도, 깻잎머리가 무슨 얘기를 어디서 들어서 이러는가, 궁금했다. 깻잎머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개인적인 호기심을 보이면 십중팔구 중대한 실수로 내게 돌아올 가능성이 높았다. 황을 통해서 겪은 실패를 반복할 수 없었다. 내 안에 있는 자격지심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사랑은 남의 일이었다. 불독이 봄이를 만난 것처럼, 엇비슷한 환경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살아야 뒤탈이 없었다.
“비서실장 언니하고 둘이서요.”
눈은 여전히 모니터의 기사를 읽으면서, 덤덤한 표정을 바꾸지 않으려 애썼다.
“둘이든 셋이든, 국밥집에 간 게 왜? 뭐가, 문제가 되나?”
데스크의 말처럼 기사에서 회사를 씹던 문장은 말끔히 사라졌다. 다른 기획물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매주 금요일에 실리는 기획물 시리즈에서도 더 이상 회사는 언급되지 않을 터였다. 잘 마시고, 잘 놀다 가네. 덕분에. 주차장에서 차에 올라타며 데스크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인사말을 했었다. 가는 것이 있어야 오는 것이 있는 뜻인가? 그러나 너무 지나치지 않나? 주차장의 밤하늘은 별조차 없었다.
“둘이 데이트한 게 아니고요?”
강하게 부정하면 오히려 나쁜 메시지를 줄 가능성이 높았다.
“데이트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종종 만납시다! 덕분에 즐기고 갑니다! 기업과 국민의 종은 원래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지 않습니까?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사이잖습니까?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가재 잡고 도랑 치우고. 국민의 종은 습관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알량한 역사까지 꺼내 들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악수하자, 힘차게 흔들었다.
*
“비서실장 언니와 다시 사귀는 거, 아니죠?”
우리가 남입니까? 사이좋은 오누이 같은 거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국민의 종은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주차장 흐린 불빛에 비치는 국민의 종은 흡사 유령 같았다.
“사귀다니? 여긴 직장이야. 말을 함부로 하면 서로 곤란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