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겠습니다.”
중년의 사내가 말했다. 나는 허리를 심하게 굽혀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며 인사하고, 허리를 펴는데, 뒷덜미를 잡는 억센 손이 느껴졌다.
“아이고, 회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한눈판 사이에…, 죄송합니다.”
호텔 직원은 깍듯하게 노년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노년과 중년의 눈길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나는 호텔 직원에게 뒷덜미가 잡힌 채로 로비 카페에서 개처럼 끌려 나왔다. 호텔 직원은 나를 중범죄자 다루듯이 했다.
자존심이 여지없이 구겨졌다. 원장은 멀찌감치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한 번만 더 카페에 얼씬거렸다간, 행사 자체를 아예 못 할 줄 알아! 사장님께서 특별히 가엾게 여겨, 무료로 공간을 내주었더니, 어디서 거지 같은 게 와서…, 물을 흐려? 오늘따라 잡것들이 파리처럼 꼬이네. 알았어? 알아들었냐고?”
호텔 직원은 주위 사람들을 의식해서,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눈썹을 치켜올렸다. 불끈 쥔 주먹을 내 눈앞에 대고, 으름장을 놨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허리를 연신 굽혀가며 비굴하게 굴었다. 호텔 직원은 한참이나 나를 매섭게 쏘아보더니 뒤돌아 걸어갔다. 초라한 자신과 어깨 당당한 호텔 직원이 슬펐다. 직원 말대로 초라하게 구걸해서 슬프고, 직원은 그걸 막을 수밖에 없는 당당함이 슬펐다. 로비 카페를 건너다보았다. 노년의 사내와 중년 사내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거기는 내가 갈 수 없는 다른 세상이었다.
“홍보 용지 많이 돌렸어? 밖으로 나가 더 돌려야 해.”
원장이 다가와 빚쟁이처럼 따지듯 독촉했다.
비서는 끝내 오지 않았다.
*
“은밀한 첩보를 수집했는데, 확인하고 싶어서 여기에 오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국민의 종이 데스크를 빤히 쳐다보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정보를 들었다는 거요?”
“떡상할 계획을 착착 진행 중이라고, 이왕이면 나도 끼워주시죠? 확실히 도움이 될 겁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데스크는 시치미를 딱 잡아뗐다. 그러면서도 불편한 기색을 얼굴에서 숨기지 못했다.
“선수끼리 이러지 맙시다. 내가 여의도에 살짝 흘리면 증권가 애들이 알아서 뻥튀기할 것이고, 찌라시가 나돌 테고, 그러면 형님 좋고 매부 좋잖습니까?”
“글쎄요…. 헤지펀드는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데스크는 엉덩이를 소파 깊숙이 집어넣으며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정치권에서 흘러나온 말이라, 증권가 애들은 껌벅 죽어요. 나중에 문제가 되면 오리발 내밀면 되고.”
“아니, 작년에 페니 코인으로 재미 좀 봤다면서 또요?”
데스크는 확실히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카페에서 만났던 그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코인은 확실히 주식보다 확장성이 있어서 재미 봤죠. 어린 것들까지 개나 소나 달려드니까, 돈이 좀 됐어요. 아주 쪼옥쪽 빨아먹었죠.”
국민의 종은 흐뭇한 성취감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눈치가 떠올랐다. 페니 코인이 떡락해서, 코인베이스와 빗썸을 비롯한 가상화폐거래소에서 거래 자체가 되지 않았다. 눈치는 몇 달 동안 우울증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발행사는 싱가포르에 있었으나 페이퍼컴퍼니였으며, 발행자 권주형은 FBI의 적색 수배령이 내려졌다. 캘리포니아 공대를 중퇴한 권주형은 동유럽 모처에서 호화 생활하고 있다거나, 아프리카 빈국으로 은신했다는 등등의 소문이 어지럽게 들려왔었다. 백억 달러 이상을 숨겨두었다는 추측 또한 무성했다.
“그 작자, 이름이 뭐였더라? 무공은 대단한데, 어설픈 구석이 있어.”
“권주형이죠. 동창생이죠.”
“그렇게 연결되는구먼. 당연히 내부 정보를 이용해서, 피크에 있을 때 코인을 몽땅 처분했겠네?”
“동창 좋다는 게 뭐, 있나요?”
눈치뿐만 아니라,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휴지 조각보다 못해진 페니 코인 때문에 낭패당하거나, 급기야 투신하는 사건도 있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사내가 있었다. 결혼을 육 개월 정도 남겨둔 사회 초년생이었는데, 3억가량을 페니 코인에 투자했다. 피크가 지나 막차를 탔던 모양이었다.
사내는 서울에 집을 장만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모아오기 시작한 돼지저금통과, 주변에서 빌리기까지 해서 투자했다. 당연히 신부가 될 애인의 돈도. 행복한 결혼식은 물론이고 신혼집을 장만한다는 달콤한 현실을 꿈꾸었으나,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아 페니 코인은 떡락했다. 달콤한 현실은 악몽이 되었고, 사내는 점심시간에 회사 옥상에서 투신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애인 역시 한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FBI가 잡으면 적어도 99년은 때릴 텐데….”
데스크는 진심으로 권주형을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한국으로 데리고 와야죠. 많아야, 3년 내지 4년일 테니까요. 내가 왜, 국민의 종이겠습니까?”
국민의 종은 자신만만해했다.
“그럴 계획까지 준비했으니 한몫 잡게 했네. 무공이 어설픈 게 아니네?”
“나름 비상한 녀석이라니까요. 아무튼 이번 건에 저도 끼워주시죠?”
국민의 종은 재촉했다. 데스크는 당신도 기회가 있는데, 어때? 하는 듯이 나를 건너다보았다. 뒤이어 국민의 종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보육원에 기부할 요량으로 마련한 얼마간의 돈이 있긴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동지도 한순간에 자객이 되는 잔인한 무림의 세계가 아니던가? 내 사람이라는 확신도 돌다리처럼 두들겨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장백호 씨라고 했던가요? 믿어도 될까요?”
국민의 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기업 본부장 심부름으로 온 사람이야. 당연히 믿어도 되지.”
데스크가 빙그레 웃었다. 화성 물류센터의 파트장이 떠올랐다. 급여 외의 수상한 돈을 입금했던 것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를 이미 내게 씌운 걸까? 카페에서 뒷돈을 준 사실이 떠올랐다. 데스크 입장에서 문제 삼으려면 얼마든지 나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회사까지도 걸고넘어지면, 상당히 골치 아파졌다. 도덕적으로 비난받은 것은 물론이고, 법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블랙컨슈머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었다.
가까스로 복귀한 전략기획팀의 팀장 자리도 한순간에 날아갈 것이고, 창고지기로의 추락마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물론 데스크 역시 돈을 받았으니 어느 정도 내상을 입겠지만, 신문사라는 튼튼한 방패가 있었다. 게다가, 국민의 종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봐서,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순간에 개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눈치의 예언처럼 복귀하고 얼마 되지 않아 퇴직당하는 것이다. 예언이 잔인한 것은 반드시, 언젠가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본부장이 회장 동생이라면서요?”
국민의 종이 데스크에게 물었다.
“친동생은 아니고, 정확한 관계는 나도 모르는데, 사돈의 팔촌 정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남이죠.”
“아니야, 남은 아니고 사촌 동생쯤 될 거야. 먼 사촌이거나 이웃사촌? 그러니 지금까지 가신으로 인정받고 있지.”
“멍군이거나 장군이나 똑같죠.”
“어쨌거나 회장이 상당히 신임한다니까, 핏줄이 아니고선 어렵지.”
“아무튼! 저를 끼워주시죠? 헤지펀드에!”
국민의 종은 데스크를 강하게 압박했다. 데스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페니 코인처럼, 데스크가 은밀하게 작전 중인 헤지펀드에 숟가락을 얻어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국민의 종을 <국민을 종>으로 여기고 있다고 추측했다. 그다지 새롭지도 않은 발상이었다. 언론이 정치를 반목하다가도, 궁극적으로 공생관계여서 이익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국민>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국민은 개돼지라는 진심 어린 솔직한 고백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흑마술을 비롯한 온갖 제도들이 있는 자들에게 맞춰져 있으니, 한번 기생수(기초생활수급자)는 영원히 기생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물며 나처럼 보육원 출신들은 기생수 축에도 끼지 못했다. 찬달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끼기도 전에, 회사 옥상이거나 한강 다리에서 자유낙하를 하겠지. 있어도 있는 줄 몰랐던, 순둥순둥했던 보육원의 강 선배처럼. 결혼을 육 개월 앞둔 사내처럼.
“관계한 사람이 많아서, 지금 당장 답하기는 곤란해. 나중에 따로 연락하지.”
데스크가 마지못해 말했다.
“기다리겠습니다.”
국민의 종은 데스크가 자신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로부터 서로의 약점을 잡고 있으니, 손잡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것쯤은 은밀한 비밀도 아니었다. 언론은 알려야 할 사실은 은폐하면서, 엉뚱한 사건을 과대 포장해서 널리 유포하고, 정치는 이를 증거로 국민에게 서슴없이 가학 정책을 집행하여 이익을 창출했다. 가령, 언론은 치부가 드러나도 국민의 종을 두둔하고, 국민의 종은 발행 부수 따위들의 불법을 눈감아 주고.
“자자, 북악정에 왔으니 회포 좀 풀고 가야겠지? 매니저를 부르자고.”
잠시 후에 매니저 송과 단발머리와 빨간 립스틱이 들어왔다. 송은 단골이라며 데스크 옆에 앉았고, 단발머리 역시 자연스럽게 국민의 종 옆에 앉았다. 빨간 립스틱은 주춤거리다가, 내 옆에 앉았다. 양주로 몇 차례 건배가 오갔고, 데스크와 송은 봉황홀 안쪽에 있는 방문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국민의 종도 단발머리의 허리를 휘감고 그 옆 방문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우리도 들어갈까요?”
빨간 립스틱이 또 다른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요,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나는 말끝을 흐리며 빨간 립스틱의 눈길을 피했다. 빨간 립스틱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줘도 못 먹는다는 거네? 참, 별꼴이야.”
비아냥거렸다. 그녀는 양주를 잔에 가득 부어 원샷했다. 대리 기사를 할 때 만났던 송의 성깔로 미루어 보아, 이곳 여자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어림짐작했으나, 확실히 당찼다.
*
“별세계이지 않나?”
본부장은 만남의 결과보다 북악정의 분위기를 물었다. 무림의 세계에 데뷔시킨 장본인이라는 만족감이 얼굴에 드러났다. 유흥의 한 파편일 수밖에 없는 북악정이 무림의 세계일까, 의구심은 있었다. 어쩌면, 데스크와 국민의 종이 나눈 은밀한 대화는 단지 맛보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서울에 그런 곳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서울이니까, 있는 거지. 무림의 세계를 겨우 손톱만큼 맛만 본 거야. 데스크가 껌벅 죽지?”
본부장은 북악정에서의 만남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불현듯 궁금해졌다. 본부장이 무엇 때문에 나를 북악정으로 보낸 것일까? 물론 닮은꼴 조 팀장이 싸질러 놓은 똥을 설거지하는 것이지만, 팀장으로 승진시킨 것도 본부장이 아닌가? 본부장의 머릿속에 있는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기사 건은 당연히 처리될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