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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Sep 21. 2023

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40

“사고는 조 팀장이 치고, 수습은 장 팀장이 하느라 고생이 많아요.”


데스크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빤히 꿰뚫고 있다고 실토했다.


“본부장이 무림 세계에 대해서도 말했겠네요?”


“네?”


데스크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괜히 흑마술의 마왕이 아니구나. 판을 꿰뚫어 보면서 다음 수를 정확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잔인한 구석이 있다는 짐작만 어설프게 했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본부장을 상대로 기획물 시리즈로 협박할 수 있을까. 카페에서 만났을 때는 그저 탐욕스러운 보통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앞으로 잘해봅시다. 한 가지 명심하세요. 충곱니다. 무림의 세계는 잔혹합니다.”


데스크는 뒤늦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면서도 가까이해서 이득을 볼 게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홈페이지 수정 문제는 지금쯤 처리됐을 겁니다. 골치 아프니까,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세요.”


“정말입니까?”


“여기로 오면서 지시했으니까요. 생각보다 장백호 씨가 순진한 구석이 있어요. 마음에 듭니다.”


“네?”


“본부장이 시키는 대로 지금, 하고 있잖습니까? 아닌가요?”


왜 이 회사에 지원했느냐는 면접관의 날카로운 질문 이상이었다. 카페에서는 자신의 내공을 숨긴 흑마술사였네! 본부장의 말처럼 탁월한 실력을 갖춘 고수가 아닌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자객으로 변신하는. 혹시라도 책잡히는 말을 했다간 앞으로 곤란해지겠어.


“그래서, 소개할 사람이 있는데, 괜찮겠어요? 합석하는 거?”


“아무렴요.”


“거의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이 친구가 좀 굼뜬 스타일이라….”


데스크는 시계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비넥타이가 얼굴을 빠끔히 들이밀었고, 뒤이어 사내가 걸어들어왔다.


“이제 오는구먼.”


사내는 얼굴에 피곤함이 묻어있었지만, 데스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한 눈에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TV 뉴스는 물론이고, 신문에도 종종 얼굴이 나오는 국민의 종이었다.


“인사하시게. 이쪽은 장백호 씨라고, 대기업 전략기획팀 팀장이죠.”


국민의 종이 습관처럼 손을 내밀었다. 나는 허리까지 숙여가며 악수했다. 데스크의 벌거벗은 모습도 뜻밖이었지만, 국민의 종이라니!


“아니, 바쁜 거, 다 아시면서 부르시네.”


국민의 종은 너스레를 떨었다.


“국민의 종이, 부르면 와야지요. 총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장백호 씨!”


“그럼요.”


이럴 때는 납작 엎드려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는 방법이 최고지.


“지난 총선에서 도움을 주신 것처럼 이번에도 맞붙을 상대 후보의 비리를 대문짝만하게 실어주신다면 지옥이라도 당연히 와야죠. 실어주실 거죠?”


국민의 종이 비굴한 표정을 지으면서 데스크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남입니까?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듣던 중 반가운 말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오늘은 제가 쏘는 걸로….”


“아닙니다. 오늘은 여기, 장백호 씨가 내는 자리니까, 다음에 내시고, 서로 인사했나요?”


데스크는 국민의 종에게 손사래를 치며 재빠르게 말을 끊었다.


“조금 전에 당연히 했죠. 한 표가 아쉬운 판에 제가 농땡이 부릴 처집니까? 장백호 씨라고 했죠?”


국민의 종은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아, 네. 잘 부탁합니다.”


악수를 또 했다.


“부탁은 제가 하는 거죠.”


국민의 종은 습관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본부장이 얘기한 대평로 문파의 문주는 아니지만, 국민의 종도 그만큼 값어치가 있었다.


“생색내려고 하는 말은 아닌데, 얼마 전 당에서 엄청나게 시끄러웠습니다.”


국민의 종은 데스크를 보며 말했다.


“무슨 일로요?”


데스크는 기자답게 호기심을 발동했다.


“있잖습니까? 발행 부수로 사기를 치다가 딱 걸린 사건!”


“아, 그거요?”


데스크는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제재해야 한다 어쩐다, 시끌벅적 난리였다니까요. 내가 누굽니까? 국민의 종이 아닙니까? 언론을 죽이면 민주주의가 죽는다고 단칼에 잘랐지요.”


“역시 믿고 밀어준 보람이 있습니다.”


데스크와 국민의 종은 서로 마주 보며 매우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이익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악수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는 증거를 눈앞에서 보았다. 어쩌면 데스크가 북악정으로 오기 전에,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수집했을 거라는 불안한 추측이 들었다.


신문사의 정보력도 무시할 수 없지만, 거기에 더해 국민의 종도 만만치 않은 정보력이 있었다. 얼마든지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지 않은가? 최소한 데스크는 어느 정도 나를 파악했으니 국민의 종을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추측이 거기에 닿자 데스크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어설픈 추측까지 했다. 만일 그렇다면, 그 그림은 본부장과 상관없을까? 불현듯 원장의 마리오네트였던 슬픈 하루들이 떠올랐다.



*


학생 식당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중앙도서관으로 가던 길이었다.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오픈북 테스트였으나, 답안지에 책 내용을 고스란히 옮겨적을 수 없었다. 그랬다간 F 학점을 받을 게 뻔했다. 책 내용과 상반된 주장을 찾아 적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 내 주장을 밝혀야 모범답안이 될 수 있었다.


“학교생활 잘하고 있지? 내일 기부금 모금 행사가 있는데, 와 줘야겠어.”


원장이었다. 내일이 시험 당일이었다. 몇 주 내내 준비했던 과목을 포기하느냐, 기부금 모금 행사에 참석하느냐,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학점 관리를 잘해야 취업에 유리하나, 갓난아이 때부터 보살펴준 원장의 부탁을 외면하는 짓도 도리가 아니었다. 다른 부탁도 아닌 기부금 모금을 위한 행사가 아닌가. 아직도 보육원에서 부족한 것들이 많은 채로 지내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지도층 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라, 깨끗한 옷으로 입고 와야 한다. 코리아나 호텔 로비니까, 아침에 늦지 않도록 와야 하고.”


원장은 내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있는 기부금 모금 행사는 매우 중요했다. 잠시 망설였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불독이라면 얻다 대고 수작질이냐며 단칼에 거절했을 터였다. 원장에게서 배은망덕한 놈이라며 손가락질받기도 싫었다. 무엇보다 보육원 아이들에게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울 일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를 헌신짝처럼 버렸어! 나쁜 형이야!


“알겠어요.”


통화를 끝내자, 허탈감이 몰려왔다. 몇 주 동안 밤잠을 줄여가며 상반된 주장이 실린 책을 통독하고 요약했는데, 쓸모없어졌다. 작년에 이랬고, 재작년도 마찬가지였다. 벗어나고 싶지만 끝내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올가미라는 생각을, 나도 사람이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의 끝은 항상 참석이었다. 자신에게 시간을 투자하는 것보다, 아이들을 위한 시간이 먼저라는 판단이었다. 애착 담요조차 없이 한겨울을 나는 아이들이었다.


호텔 로비가 행사장이었다. 아이들이 만든, 엉성하기 짝이 없는 액세서리 수제품들이며, 협찬받은 물건들을 전시했다. 간단한 다과를 준비했으며, 음료도 있었다. 나는 찾아오는 사람을 접대하는 역할이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삐기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을 위한 모금 행삽니다. 많이들 와 주십시오!”


“이봐! 학생! 여기서 호객행위를 하면 어떡하나! 그렇지 않아도 대기업 세미나가 있는데! 높으신 양반들이 보면 눈살 찌푸려! 저쪽 구석에 가서 찌그러져 있으라고!”


호텔 직원이 매서운 눈으로 나를 불러 새워, 노려봤다. 당장 뺨따귀라도 냅다 갈기겠다는 기세였다.


“보육원 행사장은 저쪽 구석인데, 왜 통로까지 나와서 이 지랄이냐?”


호텔 직원은 낮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나를 꾸짖었다. 몹쓸 짓이라도 한 듯 어깨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행사장이 아무리 로비 구석이라고 하더라도, 로비 출입구에서 얼쩡대는 행동을 제약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나는 최대한 명랑한 목소리로,


“여기에 있으면 안 되나요?”


라고 물었다.


“당연하지! 여기가 도떼기시장인 줄 알아? 어서, 저쪽으로 가서 죽은 듯 찌그러져 있어!”


호텔 직원의 완강한 태도에 어쩔 수 없이 행사장 앞으로 돌아왔다. 구석진 자리여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쉽게 닿지 않았다. 행사장 안에 몇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원장이 자랑삼아 떠벌린 지도층 인사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대기업 세미나를 두고 설레발쳤던 게 아닐까? 아니면 지도층 사람들이 오니, 내가 물어오라는 뜻이었나? 나는 뒤돌아 원장을 찾았다. 행사장 안쪽에서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멀뚱하니 서서 원장은 고갯짓으로 호텔 출입구를 가리켰다. 윙크까지 하며.


호통쳤던 호텔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슬금슬금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아까처럼 큰소리는 내지 못하고 조용한 호객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출입구를 지나, 로비 카페로 갔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타켓으로 삼았다. 내가 사는 가난한 세상과 전혀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 소파에 앉아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번쩍거리는 갑옷과 다름없는 빛나는 양복을 입고,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아침부터 세상을 눈 아래에 두고, 무료함도 즐거운 삶의 순간들을 즐기고 있었다. 하루 두 끼, 그것도 라면이나 국수로 때우는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세상을 사는 사람들. 나는 용기를 내서, 홍보 용지를 꽉 움켜쥐고,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선생님! 모금 행사를 하는데, 이것 좀 읽어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노년에 접어든 사내에게 홍보 용지를 내밀었다. 사내는 고개 돌려 나를 보더니, 표정이 조금씩 변하면서 뚫어져라 내 얼굴을 보았다. 옆에 앉은 중년의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사내와 중년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내 얼굴에 검정 숯이라도 묻었나? 살짝 불쾌했다.


“너, 범이 아니냐? 여기서 뭐 하냐?”


노년의 사내는 사뭇 놀란 표정과 못마땅한 표정이 엇갈리면서, 노여움이 섞인 목소리로 퉁명스레 말했다.


“언제 귀국했어? 형님 말씀처럼 여기서 뭘 하냐? 지금?”


중년의 사내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이었다는 표정이었다. 노년과 중년의 표정과 말투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직감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저는 장백홉니다. 범이 아닌데요?”


라고 말했다. 노년과 중년은 시력이 좋지 않아, 엇비슷한 나를 범이라는 사람으로 착각했다고 여겼다.


“백호라고? 그러고 보니, 아닌 것도 같네. 범이가 지금 한국에 있을 리가 없지.”


“맞습니다, 회장님. 범이가 아무리 천방지축으로 날뛰어도 설마, 학기 중인데 한국에 들어올 이유가 있나요? 게다가 아버지도 못 알아보고 이따위 찌라시를 돌릴 리가 있나요?”


중년은 노년에게 말했다. 그제야 노년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홍보 용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돋보기안경을 꺼내 썼다.


“보육원 기부금 행사라…, 좋은 일 하는구먼. 이봐, 비서한테 가보라고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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