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부장이 귀찮음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요령껏, 눈치껏, 몰라도 아는 척할 수밖에.
“넵! 알겠습니다.”
본부장실을 나와 기획팀으로 돌아가면서도, 머릿속은 여전히 정리하지 않은 서랍 속처럼 엉망으로 뒤죽박죽이었다. 똑같은 사물이나 현상을 보면서도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본부장의 시선이 새롭기도 하고, 얼토당토않기도 했다. 대한민국 상위 1%의 무림 세계? 막연히 그런 세계가 있겠거니, 짐작은 했다. 보육원 출신인 나와 너무나 동떨어져, 아무 상관도 없다고 여겼다. 지난번에 데스크를 만났을 때도 무림 세계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데스크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하루 24시간을 살며, 세끼 밥을 먹으며, 같은 공기로 숨 쉰다고, 의심할 여지 없이 믿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장 팀장님! 본부장이 또 난리 쳤나요? 그놈에 성질은 언제 죽으려나?”
볼펜은 듣기 좋은 말을 하며, 히죽 웃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내 사람이 되었다며 속으로 은근히 좋아하겠지만, 무림 세계의 입문을 앞둔 지금, 이상하게도 저잣거리의 상인쯤으로 보였다. 각성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슬그머니 기분이 좋아졌다.
“제가 듣기로 까칠하고, 삐딱하고, 저돌적이라고…, 사사건건 예전 조 팀장과 부딪쳤다고 하던데요? 조 팀장이 직급은 본부장보다 낮지만, 한가락 하는 성격인지라 상당히 전투적으로 맞섰다고…, 그런데도 화성 물류센터 창고지기로 가지 않고, 엘에이로 갔다니…, 미스터리입니다.”
안경이 말했다. 듣고 보니 이상했다. 안경이나 볼펜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어, 보통 세계를 사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논리가 무림 세계에서 당연히 통하나? 그렇다면 닮은꼴 조 팀장도? 막연히 짚을 수 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지만, 본부장님을 뒷담화하면 좀…, 그렇지 않나? 그 맛에 회사를 다니긴 하지만.”
나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안경은 뻘쭘해져서,
“장 팀장님을 믿고 따르니까, 이런 불평도 하는 거죠. 그렇지 않냐? 볼펜!”
이라며 볼펜에게 동의를 구했다.
“당근이지.”
볼펜은 지그시 웃으며, 내 표정을 살폈다.
“알았어. 그만 자리로 돌아가.”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 비록 저잣거리 상인일지라도 내 사람이라는 판단에, 듣기 좋게 말했다.
오후 2시를 넘어, 직장인이라면 해야 할 일들을 대충 처리해서 한가한 때가 되자, 데스크에게 전화를 넣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몇 주 전에 만났던 장백호라고 합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이렇게 기사를 쓰면 우리가 망해! 아직 그것도 몰라? 독자보다 신문사 이익이 우선이라는 것도 몰라! 주위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요?”
데스크의 목소리에 화가 잔뜩 묻어났다.
“얼마 전에 만났던 장백호라고, 회사 이미지 광고를 부탁한….”
“아, 장백호 씨!”
데스크는 광고 얘기를 하자, 뒤늦게 아는 체를 했다. 초짜라고 해도 정도껏 봐주는 거지, 정신 못 차릴 거야! 초등학생도 그 정도는 알아! 수화기 밖에서 또 구박하는 소리는 들렸다. 야! 조용히 못 해! 살살 달래가면서 가르쳐야지! 데스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장백호 씨, 미안해요. 시끄럽죠? 신문사가 원래 바쁩니다. 그런데 이미지 광고는 몇 주 뒤에나 가능할 것 같은데, 무슨 일로?”
데스크는 기획물 시리즈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까마귀 고기를 통째로 삶아 먹었나? 천연덕스럽게 눙치려고?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태도에 태클을 걸 수 없었다. 나는 을이었다.
“저녁에 시간이 되시면 만날 수 있을까, 해서요.”
“만나요?”
데스크는 미적지근한 목소리였다. 이미 볼 일은 모두 봤다는 투였다. 통화를 더 길게 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북악정이라고, 거기서 7시쯤에 만나 뵀으면 합니다.”
“북악정이요? 정말입니까?”
데스크는 화들짝 놀란 목소리에 되묻더니, 믿기지 않는 듯 말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면 그쪽에서 시간을 정해도 상관없습니다만.”
“아이고, 다른 데도 아니고, 북악정이라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내야죠. 7시요?”
데스크의 목소리는 한껏 달아올랐다. 도대체 북악정이 뭐길래 이렇게 좋아하지? 왜 몸이 달아올라서 안달이 났지? 의아했다.
“그런데, 북악정은 무턱대고 그냥 가면 쫓겨날 텐데요?”
“제가 예약을 해놨습니다.”
“아, 그래요? 장백호 씨 이름을 대면 안내 받을 수 있다는 거네요?”
“그렇겠죠?"
“알겠습니다. 이따가 북악정에서 만나도록 하지요.”
선배님! 알겠습니다. 이런 실수를 다시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신입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호기롭게 닮은꼴 조 팀장에게 사표를 내던지더니 신문사에 들어갔나? 목소리는 지문과 같아서 닮은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영락없이 신입이었다. 목소리만으로도 반가웠다. 그렇지만 신입이 대평로 문파에 들어가, 일개 하급 무사로 혹사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안쓰러웠다. 생활이 구석으로 몰리자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고 해도, 불의에 절대로 굴복할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지껄였는데, 안타까울 뿐이었다. 역시 사람은 말보다 행동으로 판단해야 했다. 일부러 독자를 위한 관점에서 기사를 썼다고 추측할 수 있지만, 선배의 다그침에 굴복하지 않을까? 마침내.
*
“손님, 여기 까집니다. 내려야겠는데요?”
기사는 고개 돌려 말했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이 차선 길이지만, 택시는 멈추었다.
“왜요? 아직 도착하지 않았잖아요?”
“여기서 더 갔다간 딱지 끊어요. 갈 수 없습니다. 자가용이라면 모를까. 외길이니까, 쭉 걸어가시면 북악정이 나옵니다.”
막무가내로 더 갈 수 없다는 기사의 성화에 떠밀려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는 이내 방향을 바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감탄할 정도로 숲은 울창해서, 조금 전의 빌딩 숲이 신기루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되돌아가는 택시의 꽁무니를 멀거니 바라보면서, 인기척이라곤 눈과 귀를 모두 동원해도 찾을 수 없는 숲길에 홀로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세상에서 버려진 듯한 기분이 불쾌했다. 보육원 정문에 버려졌던 기억할 수 없는 그날 밤에, 어쩌면 새벽일지도 모르지만, 포대기 안에서 느꼈을 기분이 이런가? 어스름은 숲속에서 뭉글뭉글 돋아나고 있었다.
한참을 걷자, 멀리 길 끝에서 불빛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주차장이었다. 어느새 주차장은 빽빽하게 들어찬 자가용들로 붐볐다. 언뜻 봐도, 바다 건너온 차들이었다.
“예약자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출입구로 들어서자, 정장을 빼입은 사내가 정중하게 물었다.
“장백호라고 합니다만….”
사내는 모니터에 터치하면서 나를 힐끔 건너다보았다.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니라는 의심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일행이 먼저 와 계시네요. 이분을 봉황홀로 안내해 드려.”
사내는 옆에 부동자세로 서 있던 나비넥타이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따라오시죠? 나비넥타이는 오른손을 옆으로 돌려 복도를 가리키며 한발 앞서 걸었다. 뒤따라 걸으면서, 참으로 희한하네, 속으로 중얼거렸다. 서울 구경을 처음 하는 촌놈처럼 한시도 주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리석으로 마무리한 복도 바닥은 물론이고, 샹들리에가 걸려 있는 높은 천장이며,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저 인터넷으로만 보아왔던 유명한 명화들이 복도 벽에 줄지어 걸려 있었다. 모조품일 수도 있지만.
나도 모르게 위축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나비넥타이에게 들킨 순 없었다. 깊은 심호흡을 했다. 이윽고, 나비넥타이가 금박 손잡이가 있는 문 앞에 멈춰 섰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나비넥타이는 문을 열어주며 정중하게 말했다. 문이 열리자 넓은 식탁과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데스크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기다리던 일행인가 봐요?”
데스크 옆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는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말했다. 얼굴을 보자, 뜻밖에도 낡은 기억 속에서 그녀를 어렵사리 되살릴 수 있었다. 페라리를 대리운전했을 때, 세상은 몸 놓고 돈 먹기라며 주저리주저리 떠들다가, 머슴 짓한다며 나를 힐난하던 그녀였다. 넓고도 좁은 세상이라지만, 확실히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친 셈이었다. 그녀는 나를 기억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접대해야 할 손님으로만 여기는 듯했다.
“반가워요. 매니저 송이라고 해요.”
그녀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나를 담당하는 매니저인데, 어때? 미인이지요?”
데스크는 송의 손을 잡아 만지작거리며 와이프이기라도 한 듯이 자랑질이었다. 소파 앞, 탁자에는 양주와 과일이 있었다.
“먼저 시작했어요. 북악정에 와서 시간 낭비를 하긴 쉽지 않지요.”
데스크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기에 찬 목소리였다. 나를 향해 지그시 웃고 난 뒤, 소파에 앉아 송의 어깨에 팔을 걸고, 호인처럼 껄껄 웃기도 하고, 지그시 웃으며 송과 눈맞춤도 했다. 이윽고, 여편네가 동창회에 가서 말이야, 어쩌고 하면서 흉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데스크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어머, 어쩜! 송은 데스크의 말에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다가도, 무엇이 우스운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기분이 묘했다. 외간 여자에게 아내를 흉보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리일까? 여자의 생산 능력은 말이야…, 매력과 비례한단 말이지…. 어쩌고 하면서 데스크는 송과 농담 따먹기를 계속했다. 초대한 사람은 나인데, 초대받은 느낌이 들었다.
“아 참, 장백호 씨가 계셨지!”
한참 후에야, 데스크는 정색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뻘쭘해졌다. 연인의 사랑스러운 장난질을 훔쳐본 무뢰한이라는 느낌이 갑자기 밀려왔다. 데스크가 사람 다루는 솜씨가 보통은 아니네. 하긴 그러니 흑마술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지. 하지만 기억 속의 송의 말로 미루어 보아, 흑마술이 통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지금은 데스크가 송을 마음껏 농락한다고 해도, 송의 마음은 데스크가 뿌리고 갈 돈에 있지 않을까?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는데?”
데스크가 송에게 말했다.
“알겠어요.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진 마세요.”
송은 헤어지기 싫어하는 아쉬운 표정까지 지으며 일어섰다. 송이 방을 나가자, 데스크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 되었다. 데스크를 만나 신문사 홈피에 있는 기사를 수정하도록 요구하는 일도 있지만, 친분을 쌓아야 한다는 본부장의 말이 떠올랐다. 무턱대고 대뜸, 먼저 용무를 꺼낼 수 없었다. 나는 흑마술사를 접대해야 하는 을이었다.
“본부장 얘기가 맞네. 조 팀장, 아니, 장 팀장님.”
데스크의 말에 나는 순간 벙쪘다. 닮은꼴 조 팀장을 알고 있구나! 더구나 본부장의 전화를 받았다고? 접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면접 보러온 취준생이라는 착각이 들 정로 순식간에 긴장했다. 자세히는 몰라도 회사 돌아가는 사정만 대충 알고 있다고 해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부장님을 알고 계시는군요?”
“한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대기업 본부장인데, 모른다고 하면 더 이상하지 않아요?”
“조 팀장도요?”
“몇 년 전에 얼핏 만났지요. 얼굴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본부장이 장 팀장과 비슷하다고 하니, 비슷한 거겠죠?”
본부장은 어디까지 데스크에게 말했을까? 그리고, 데스크가 본부장과 안면 있고, 조 팀장도 알고 있는 사이라면서, 기획물 시리즈로 괴롭히는 이유는 분명했다. 덮어줄 만큼의 친분은 없다는 것. 있다고 하더라도 이익 관계 안에서 친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 나는 앞뒤를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