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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Sep 03. 2023

그래서 그는 자수성가 했다 38

황은 말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하고서 여전히 고혹적인 눈빛으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생각과 달리 조금씩 뜨거워지는 아랫도리가 반응할까 싶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은 아쉬운 표정이었다. 치사하게 그냥 가게? 사내자식이? 치켜뜬 눈이 말했다. 황의 눈길을 피하면서 밖을 내다보았다. 노을이 길바닥에 잔잔히 깔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뭐,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요.”


어쩔 수 없다는 황의 말투여도 미련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는 허탈감이 얼굴에서 뚝뚝 떨어졌다.


*


오전 내내 모니터 앞에 앉아 신문사 홈페이지를 훑어보았다. 데스크의 약속은 아직 지켜지지 않았다. 월요일이면 본부장의 호출이 있을 게 뻔했다. 회사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소비자라면 얼씨구나 좋다며 캡처해서 여기저기 실어 나를 것이다. 블랙컨슈머들에게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다. 당장이라도 데스크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하고 싶지만, 고자세로 나갈 수 없는 을이고, 휴일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출근하자마자 데스크와 약속을 잡아야 했다. 큰소리칠 수 없으니, 죽는소리를 잔뜩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얼굴만 아는 데스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자니, 자존심이 상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도 없었다. 말단 기자에서 데스크까지 올라갔을 정도면 만만한 흑마술사가 아니었다. 새 광고 하나에, 뒷돈까지 챙겨주었으면 됐지, 뭘 또 바라는 거야? 마음이 답답했다.


오피스텔 원룸 창가에 오도카니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7층 높이라, 동네 단독주택의 지붕들이 빤히 내려다보였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들이며, 전봇대들, 고만고만한 아이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도 드문드문 들려왔다. 어디에도 솟을대문은 보이지 않았다. 게딱지처럼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단독주택은 마당이라고 해봐야 두서 평 정도였다. 연못과 정자가 있을 만한 넓은 마당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옥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집이었어…, 수상하고, 괴이한…, 꼬마이고 노인이었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네.”


지나고 나니 꿈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기억은 생생해서 분명히 꿈은 아니었다. 원룸을 나와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느긋하게, 차근차근, 꼼꼼하게 골목들을 살펴볼 요량이었다. 노인을 만났던 골목과 놀이터 근처도 살폈다. 헛수고였다. 한참을 이 잡듯이 살펴봐도 솟을대문이 있는 골목은 없었다. 팔다리를 힘없이 허우적거리며 원룸을 향해 걸어갔다.


“장백호 맞지? 백호, 너지?”


눈길은 여전히 솟을대문을 찾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남자가 대뜸 말을 걸어왔다. 눈을 돌리자 한 눈에도 원장임을 알 수 있었다.


“나야, 보육원 원장님! 몰라보겠어?”


“안…, 안녕하세요?”


화성 물류센터에서 창고지기 노릇을 할 때, 모아둔 기부금을 전달하기 위해 보육원을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곧이어 선한 척하면서 뒤로는 더없이 악독하다는 도일의 말이 자동으로 기억났다. 당연히 보육원에서 만났던 새치 드문드문 보이는 중년인 후임 원장도. 사회로 내보낸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구한다는 소문은 여전히 귀에 못처럼 박혀있었다.


“졸업식이 마지막이었나? 보아하니, 어엿한 사회인이 됐어! 자랑스러워.”


원장은 가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소문은 당사자를 비껴간다더니, 보육원 출신들 사이에 자신의 얘기가 이미 퍼진 줄 모르는 걸까. 반가우면서도 경계심이 들었다. 보육원을 다녀온 후로, 대리 기사를 그만두었다. 화성까지 출퇴근하느라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이 만만찮기도 했지만, 원룸으로 돌아오면 예외 없이 피곤함에 절어 기절하기 일쑤였다.


“이 동네에 산다는 걸 우연찮게 들어서…, 짬 날 때마다 돌아다녔어. 이렇게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원장은 나를 만나기 위해 수시로 동네를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그 필사적인 노력이 열매를 맺으니, 헛되지 않았다는 가슴 뿌듯함이었던 모양이었다.


“회사는 잘 다니고?”


“그럼요.”


후임 원장에 따르면 원장이 보육원을 사업체로 운영했다고 볼 수 있었다. 어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말 잘 듣는 나 같은 아이와 애당초 반항기로 똘똘 뭉쳐진 불독 같은 아이를 갈라치기하고서, 차별 대우를 일삼아, 비교 대상으로 서로를 멸시하게 했다. 당연히 지자체 보조금을 서로 다르게 집행했다. 그런 사실을 파악한 불독은 더욱더 나를 괴롭혔다. 기부금이나 보조금을 뒤로 빼돌린 것은 뒤늦게 밝혀졌지만.


헐벗고 굶주리는 아이들을 더욱 굶주리게 만들어 기부금을 긁어모으는 재주까지 부렸으니, 보육원 출신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했다. 나는 애써 그런 원성들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러나 원장의 가면이 벗겨지고 나서, 더 이상 두둔할 수 없었다. 소문이 좋게 날 수가 없었다.


“유학 간 아드님은 귀국했나요?”


작심하고 물었다. 내게도 숨겨오던 원장의 아들이었다. 원장은 흠칫 몰라며 빳빳하게 곧추세웠던 허리의 힘을 풀었다.


“소문이 퍼진 것은 알아요? 보육원에서 야반도주했다고…?”


원장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과거의 내가 아니라는 걸 밝혀야 하나, 의문이 들었지만, 후임 원장의 말대로 그림자처럼 평생을 쫓아다닐지도 몰랐다. 원장은 당장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불독은 아예 만날 생각은 하지 않을 터이고, 도일은 긴가민가 확신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가장 만만하다고 여겼을 터인데, 대놓고 면박을 주니 당연했다.


“사실은…, 아들놈이 돌아오지 않았어.”


“지금이면 학교를 마치고도 남았을 텐데요? 그럼, 미국에 정착하려고 거기서 취업해서 사나요?”


“미국에서 사는 건, 맞는데…, 취직을 못 했어.”


“듣기로 좋은 대학에 다닌다고 하던데요?”


원장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대학에 다니긴 했지. 중간에 그만둬버려서…, 졸업은 못 했어.”


“왜요? 다달이 학비며 생활비까지 보내줬다고 들었는데요?”


보육원을 사업체처럼 운영하며 뒤로 빼돌린 돈이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것쯤은 보육원 출신들은 이제는 다들 알고 있었다.


“약쟁이가 됐어.”


원장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놀이터의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아득바득, 악랄하게 돈을 긁어모아 유학까지 보내주었지만, 그 끝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몇 달 전에야 알았어. 미국에 가서야 비로소.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했더니 다음 날 도망가버렸어. 실종신고를 했는데, 경찰서에서도 아들놈을 알더군. 찾지 말라는 거야. 절대로 찾을 수 없다는 거야. 무엇보다 약쟁이들은 약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군. 벗어나면 기적이라는 거야.”


원장은 말을 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원망하기라도 하는 걸까? 원장은 좀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저녁이 오려는 하늘은 맑고 투명했다. 구름 하나 없었다.


“어쩌다가 마약을…?”


“친구 따라 강남 간 거지. 돌봐줄 사람 없이 혼자 타국에서 오죽이나 외로웠으면….”


원장은 아들에 대한 끈을 끝까지 붙잡고 있었다. 그런 원장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애잔해졌다.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다. 엘에이에 지사가 있으나 내 힘이 닿지 않는 곳이고, 더구나 닮은꼴 조 팀장이 거기에 있지 않은가. 내 부탁 따위는 단칼에 잘라버릴 게 분명했다. 보육원 출신들 모두가 원장을 욕하고 저주해도, 나는 그럴 수 없지 않나. 그런 생각만 꾸역꾸역 되새김질했다.


“찾지 못했다면 아직도 미국에 있어요?”


“육 개월 동안 아들내미가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살펴봤어. 결국 찾지 못했지. 뉴욕에 있는지, 켄싱턴에 있는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지…, 그 넓은 미국 땅에서 노숙자처럼 헤매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요즘도 잠이 오지 않아. 다시 가야지. 가서, 꼭 찾아서 데리고 와야지…. 그래서 말인데…, 비행기 삯이라도….”


원장은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번득, 보육원에 찾아갔을 때 만났던 새치 드문드문한 중년의 당부가 떠올랐다. 퇴소한 고아들 등쳐먹으려고 동분서주한다는 거야. 단칼에 자르지 않으면 평생 쫓아다닐 거야. 자네도 조심하고, 특히 장백호란 놈한테 조심하라고 일러줘.


“도움을 주면 안 될까? 염치가 없지만, 이렇게 부탁하네.”


원장의 비굴함 속에 숨어 있는 약삭빠른 계산법을 넘겨짚었지만, 단칼에 거절하기 어려웠다. 다른 고아들과 달리 특별히 신경 써준 것들에 비하면 모른 척하기가 쉽지 않았다. 비록 앵벌이 짓과 다름없는 원장의 마리오네트 역할을 하긴 했어도 대학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원장의 뒷바라지 덕이었다.


가까운 은행에 들러, 틈틈이 모아둔 기부금을 원장에게 주었다. 원장은 환하게 웃으면서, 이번엔 기필코 아들놈을 데리고 오겠다며 내게 다짐까지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원장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 안으로 쓸쓸함이 차곡차곡 쌓였다.


*


“기사가 아직 그대로네. 약발이 먹혀들지 않은 모양이군.”


본부장은 모니터를 쏘아보며 투덜거렸다. 나는 부동자세로 책상 앞에 서서, 마치 죽을죄를 지었다는 표정을 억지로 지었다. 신문사 홈페이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태평로 문파가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없겠지. 저녁에 데스크를 만나서 접대하게. 친분을 쌓으면 확실히 효과가 있을 거야.”


은둔 고수니, 문파니, 하는 무협 용어가 낯설었다.


“대평로 문파를 이끄는 문주와 데스크가 막역한 사이라니까, 가능하면 문주와 합석하면 좋겠는데…, 기회가 있겠지. 장 팀장! 알겠지? 장 팀장이 무림의 세계에 데뷔하는 거야. 여기로 전화해서 예약하고, 데스크와 약속을 잡아.”


“네?”


쪽지를 받아 들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술집이야 널리고 널렸는데, 콕 집어준 곳으로 가라? 데뷔는 또 무슨 말이야? 본부장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나를 장기판의 졸처럼 대하네? 하긴 부하 직원이니 그럴 수 있다지만.


“장 팀장이 대한민국 상위 1%의 무림 세계에 데뷔한다는 말이야.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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